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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18화 (119/137)

118화

‘정운성, 아니 백부님이시군.’

자신의 할아버지인 정만조의 둘째 아들이자 아버지인 정운룡의 형이었다.

그를 본 정호기는 자신의 예상보다 빠르게 일이 처리될 것 같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사마진혁인가?”

“예.”

“반갑네. 정운성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칠 척의 장신에 단단한 몸집.

거기다 얼굴을 뒤덮고 있는 고슴도치의 가시를 연상시키는 수염을 가진 정운성은 삼국지의 장비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리 봐도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실상 그의 나이는 벌써 오십 줄에 들어선 지도 사 년이나 흘렀다.

“사문을 밝힐 수가 없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예.”

“어차피 파천궁과 싸우다 보면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네.”

맞는 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하면 사문의 절기를 써야 할 것이니까.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정호기가 입을 열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대신 비밀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네.”

대답을 한 정운성이 내명준을 내보냈다.

“자, 이제 말해 보게.”

“제 무공은 역린도입니다.”

“역린도? 설마 귀수귀도 민관영 님의 후손이란 말이오?”

“예.”

“그분은 소림에 의해 유폐되셨다 들었는데…….”

벌써 오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사조님은 당시 사부님께 모든 것을 물려주신 상태였습니다.”

“아, 그러셨구려. 그나저나 소림에서 이 일을 알면…….”

“그렇기에 비밀에 부친 것이었습니다.”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정운성은 이자가 왜 그런 비밀을 함부로 자신에게 말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약점.

상대에게, 그것도 처음 본 상대에게는 털어놓고 싶지 않은 비밀이기 때문이었다.

싸우는 와중에 드러난다고 했지만,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으니까.

정운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호기가 빠르게 그를 향해 쇄도해 들었다.

***

“무슨 짓이냐!”

정운성의 무공도 녹록치 않았고, 태력문은 권을 수련하는 곳이었기에 반응도 빨랐다.

쭉 뻗어 오는 정호기의 팔을 팔꿈치를 이용해 위로 튕기고는 땅을 박찬 후에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미끄러졌다.

“놈!”

뒤로 도망가는 속도보다 쫓아오는 정호기의 몸놀림이 더 빨랐다.

그런 정호기의 턱을 후려칠 요량으로 다리를 차올렸지만 걸리는 것은 없었다.

대신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뒤집으며 일어설 수는 있었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뭔가가 그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컥!”

“손의 힘을 푸시지요.”

정운성은 자신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있는 정호기의 손을 느끼며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공에 발을 들인 지 사십칠 년. 그동안 패배를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이렇듯 새파란 이에게 맥없이 제압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죽더라도 내공을 모아 놓은 주먹은 내지르고 죽고 싶었다.

“으윽…….”

축 늘어지는 사지와 아련히 흩어져 가는 내공을 느끼며 정운성은 죽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마혈을 찍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란이 일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갑자기 자신을 의자에 앉히며 정중하게 말하는 정호기의 모습에 정운성은 혼란을 느꼈다.

‘살수가 아니란 말인가?’

자신을 죽이러 온 살수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행동은 살수라고 볼 수 없었다.

우두둑! 찌이익!

순간 정호기의 몸이 커지며 옷을 찢었다.

‘축골공!’

일반적으로 축골공을 펼치면 평소 자신의 무공에서 삼 할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봐야 했는데, 그럼에도 자신을 간단히 제압한 것에 대해서 정운성은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혹시?’

짐작이 가는 이가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라면 가능할지도.’

축골공을 푼 정호기가 본모습으로 돌아온 후에 쓰러져 있던 의자를 가져다 정운성의 앞에 놓고는 앉았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모두 들으신 후에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주십시오. 그리고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리 말씀하십시오. 바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정운성은 축골공을 푼 후에도 정호기의 외모가 달라지지 않은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저 근육과 탄력은 단순히 무공만 높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야. 역용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저렇게 세밀하게 만들 수는 없다. 역체변환술을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태력문과 오도방의 위기라 할 수 있었다.

‘나로 변해서 살육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지금 덩치를 키운 것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았다.

‘이놈이 내 경계심을 풀려고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사술이라도 걸려고 그러나? 그래서 직접 내 손으로 문도들을?’

정운성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하늘 높이 날고 있을 때, 그를 현실로 추락시키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백부님.”

‘그래, 저렇게 백부라 부르며 내 경계심을……. 백부?’

“정, 운 자, 룡 자 쓰시는 분을 알고 계시지요?”

‘운룡이를 어떻게 알지?’

이제는 가문의 사람들도 가족을 제외하고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이름이었다.

“아버님이십니다.”

그리고 정운룡이 가문을 나선 후에 천수신의를 만난 것과 어머니와 야반도주 끝에 섬서에 정가장을 열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제 이름이 정호기입니다.”

‘섬서 정가장의 정호기!’

최근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그일 것이다.

소림사 방장의 이름은 몰라도 정호기란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이가 자신을 백부라 부르다니…….

“마혈을 풀어 드릴 테니, 믿는다 믿지 않는다 말씀만 하십시오. 믿지 않으신다면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정호기가 마혈을 풀었음에도 정운성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 정운성을 정호기도 가만히 앉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자네의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했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정운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적인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떠나겠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저나 아버님께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면 한 번이라도 조사를 해 주시고, 가족의 시신이나마 거둬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정호기가 대례를 올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증거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증거는 없습니다. 아버님을 모셔 올 수도, 그분께 모셔 갈 수도 없습니다.”

“무공은? 설마 가문의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겠지?”

정운성의 물음에 정호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는 정말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무공은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가르쳐 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못내 죄송한 표정을 짓는 정호기를 보면서 정운성이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진정 모르느냐?”

“예.”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운룡이는 무공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예?”

‘아버님은 분명 무공을 익히고 계셨는데……. 그것이 가문의 무공이 아니었단 말인가?’

좀 많이 미흡하긴 해도 정운룡은 분명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내공도 불순물이 적은 정통 내공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무공을 익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예.”

“일단 그럼 차근차근 대화를 해 보자꾸나. 그럼 우선 왜 흑룡문이 너를 쫓는 것이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익히고 있는 무공은 역린도입니다. 당시 사조님이 정사를 가리지 않고 살육을 벌였기에 소림이 나섰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흑룡문에서 날조를 한 것이지요.”

“흑룡문이? 어째서?”

“역린도란 이름은 한 무공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는 무공이란 뜻입니다. 즉, 그 무공의 역린이란 말이지요.”

“역린?”

“예. 그리고 그 무공은 흑룡문의 문주가 익히고 있는 광랑십삼검입니다.”

“뭐라고?”

“육십여 년 전 정사대전에서 패한 흑룡문은 내분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문주를 견제하는 세력이 나왔고 그들이 그러한 마음을 먹은 것은 역린도의 발견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는 바람에 시도도 하지 못하고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요. 그런 와중에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오신 분이 바로 사조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어째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셨단 말이냐?”

당시의 귀수귀도는 정사지간을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수를 전개했기에 소림에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잡아들인 자였다고 알고 있었다.

“어찌 스스로 드러내셨겠습니까? 다 흑룡문이 뒤에서 일을 벌이고 그것을 사조님께 덮어씌웠기 때문입니다. 소림승을 죽였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중에 잡히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일 뿐 그 발단은 흑룡문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물론 모두 거짓말이었다.

혈신이었을 당시 소림을 무너뜨린 후에 수거한 무공들 중에 역린도가 있었을 뿐이었고, 광랑십삼검의 역린이라는 것도 거짓이었다.

그러나 알 게 뭔가?

거짓을 말하는 정호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 그렇기에 흑룡문이 절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때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씌워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채고 저를 압박하기에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저는 영웅회를 방패로 버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예. 아마도 그동안 사부님의 행방을 쫓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있구나. 흑룡문은 어째서 그 일을 소림에 넘긴 것이지? 소림에서 역린도법을 얻게 되면 큰일인데 어찌 그것을 소림에서 처리하게 했단 말이냐?”

“역린도법이 소림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조님이 소림이나 다른 정파와 손을 잡기 전에 미리 악명을 퍼뜨리고 소림승을 죽인 혐의를 씌워 그들이 죽이도록 말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흑룡문이 마음대로 중원을 활보할 수 없다는 제약과 사조님을 막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겠지요.”

정호기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진 대협은?”

“진 사부님은 가족과 저를 지키기 위해 모신 분이신데, 이번에 놈들에게 쫓길 때 그만…….”

“돌아가셨단 말이냐?”

“예.”

침울한 정호기의 얼굴을 보고는 정운성이 혀를 찼다.

“그분 덕분에 역린도를 변화시켜 소림이나 흑룡문에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놈들을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흑룡문이 소림에 알리지 않은 것이냐? 분명 알렸다면 모종의 조치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저를 소림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당시 사조님이 속하셨던 세력이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어서 그쪽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들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고개를 숙인 정호기의 태도에서 자책이 묻어 나오자 정운성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서 얘기를 해 보거라.”

하는 행동은 완전히 정호기를 자신의 조카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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