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없어.’
몇 번이고 확인한 결과였다.
‘미행을 완전히 따돌린 것 같지만 아직 부모님께 갈 수는 없다.’
진청운의 죽음을 알리고 재차 밖의 출입을 삼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만일 자신을 감시하는 눈을 하나라도 놓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오히려 가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었다.
정호기의 시선이 북쪽을 향했다.
‘할아버님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지?’
자신의 덩치가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곳.
그렇기에 몸을 숨기기 더없이 적당한 곳.
바로 태력문이 있는 곳이었다.
‘또 한 가지…….’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냉백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질적인 원수라 할 수 있는 냉백을.
‘섬서에 들어선 이후로 행적이 묘연하단 말이야.’
분명 섬서까지는 그가 확실히 들어왔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아무래도 파천궁에 간 것 같은데…….’
정호기 자신도 혈신이었던 시절 초기에는 파천궁과의 연합을 추진했고, 잘 부려 먹었었다.
‘나는 그때 공손우를 보냈지만, 조당은 다르지.’
아마도 냉백을 보냈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너무 걸려.’
냉백이 섬서에 들어서고 그 행적이 묘연한 것이 벌써 얼마인가?
이미 가부간의 결정을 내리고 흑룡문으로 돌아갔어도 벌써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뭘까?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어쩌면 벌써 흑룡문으로 돌아갔음에도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개방에서는 그의 흔적을 완전히 놓쳤으니까.’
산모퉁이를 돌아 세 시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추적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놈은 아니었나? 그럴 리 없을 텐데…….’
현정훈, 즉 야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자신을 쫓는 이들이 없다는 것은 조당이 그의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놈에게 자신의 뒤를 맡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왜?’
조당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대적인 추격자들이 붙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렇듯 조용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곳에 있어 봤자 도움 될 것은 없으니 떠나야겠구나.’
슬쩍 흑룡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 정호기가 신형을 날렸다.
***
“낭인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시오.”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우렁찬 젊은 청년의 외침에 사오십 명의 사람이 우르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각자 이곳에 자신들의 별호와 성함을 적도록 하시오. 그 후에 다시 조를 나눠 이동할 것이오.”
그 말에 몇몇 이들의 얼굴엔 득의의 빛이 감돌았지만, 대부분의 낭인들은 불만 서린 표정이었다.
별호와 이름을 적으란 것은 실력에 따라 조를 나눈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수당에도 영향을 주지만 만일 실력대로 조를 짤 경우엔 화살받이가 되어 개죽음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험도 보지 않는 것이오?”
“맞소이다! 기량을 겨룰 기회를 주시오!”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불만인 분들은 나중에 공을 세우면 될 것이 아니겠소이까? 당장 내일이라도 공을 세운 이들은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것이오. 그것이 싫다면 돌아가시오!”
이렇듯 강압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산서로 낭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호기를 잡고자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주 소수만 남은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은밀히 퍼지는 흑룡문이 조개를 죽였다는 소문 때문에 그나마도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는 태력문과 파천궁의 싸움이었다.
거기다 지금은 큰 싸움이 없어 낭인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산서로 몰려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자, 여러분! 아시겠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소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공을 세울 수 있으니 어서 가서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자, 이쪽으로 오시구려.”
투덜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수고가 있었고, 들인 돈도 적지 않았다.
태력문에서 쫓겨나면 파천궁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파천궁보다는 태력문이 더 낫기 때문이었다.
“쳇, 어쩔 수 없군. 파천궁은 월봉을 줄 때가 되면 죽을 자리를 골라 보낸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파천궁이 사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은밀히 퍼지고 있는 그 소문을 믿는 이들이 많았다.
“일단 여러분이 이곳까지 찾아온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했으니 그것들을 드시지요. 제가 내일이라도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했지만, 설마하니 당장 여러분을 전투에 내보내겠습니까? 우리가 파천궁도 아니고 말입니다. 여독이 풀리신 이후에 차차 전투에 투입될 것이니, 지금은 저를 따라 오십시오.”
청년의 말에 투덜거리던 이들도 입맛을 다시며 그를 따랐다.
그런 무리에 같이 끼어 있는 정호기는 청년을 보면서 기특하단 생각을 했다.
‘사람들을 부리는 재주가 있구나. 거기다 교묘하게 파천궁을 끼워 넣으면서 그들에 대한 안 좋은 인식도 심어 주고.’
사람을 선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불만이 가득한 이들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그럼에도 앞서 가는 청년은 나름대로 잘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보게.”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늙수레한 소리에 정호기가 고개를 돌려 보자, 오십 줄에 들어선 것 같은 노인이 바라보고 있었다.
“예?”
“자네는 덩치도 작은 사람이 무슨 그런 큰 도를 들고 다니나?”
현재 정호기는 축골공을 이용해 몸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만든 상태였다.
물론 계속해서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몸에 무리가 올 것이지만, 기회를 봐서 정상으로 몸을 돌리고 살핀다면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여기 오기 전에 하나 구입했습니다.”
“쯧쯧! 자네도 그 정호긴가 뭔가 하는 놈을 따라 하는 것인가?”
정호기처럼 덩치에 안 맞게 대도를 든 이들도 더러 보였는데, 정호기의 영향이었다.
“…….”
“휘두를 수는 있나?”
“당연하지요.”
“원래 도법을 배운 겐가?”
“원래는 부법을 익혔습니다만, 제가 좀 다듬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부와 도는 그 쓰임새가 다른 법인데, 그걸 바꿨단 말인가?”
“뭐, 비슷하던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정호기를 본 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천둥벌거숭이와 같아 틀림없이 며칠 안으로 죽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거머리였군.’
낭인들 사이에서 거머리라 부르는 족속이 있었는데, 실력이 뛰어난 이들과 친분을 만들고 그들을 방패삼아 목숨을 이어 가는 이들을 일컬었다.
“자, 이곳이 여러분이 묵을 곳입니다.”
청년이 안내한 곳은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커다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너비 이 장에 길이가 육 장 정도 되는 건물들이 여섯 개가 붙어 있었고 그것들과 좀 떨어진 곳에 같은 크기의 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따로 떨어진 건물 하나에서 여인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곳은 낭인들 중에서 여인들만 모아 놓은 곳인 것 같았다.
“자,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면 곧 음식과 술을 내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청년이 돌아가자 남아 있는 이들이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땅에서 한 자 정도 솟은 마루처럼 길게 이어진 침상과 벽에 붙어 있는 사물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긴장감으로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 십여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침상에 누워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거나 조용히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덩치가 커다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어서 가지고 오너라. 조심하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을 가지고 온 청년이 하인들에게 지시를 하고는, 준비해 온 종이 뭉치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자, 이것은 계약서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조용히 이곳을 떠나시면 됩니다. 아니면 그곳에 성함과 태어난 곳, 별호를 적으시고 수결을 하십시오.”
받아 든 종이를 펼쳐 보니, 별다른 내용은 없고 삼 개월의 기간 동안 태력문의 소속으로 활동을 한다는 것과 부당하지 않은 명령에는 항명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 골자를 이룬 계약서였다.
‘전투 시 항명은 즉결 처분이라…….’
별것 아닌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낭인에게 있어서 그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죽을 곳인 줄 뻔히 알면서도 들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대충 훑어본 정호기가 조당의 사부인 사마진혁이라는 이름을 적고는 먹물을 이용해 수결을 마치고 계약서를 돌려준 다음 청년이 건네준 젖은 헝겊으로 손을 닦고 있을 때, 다른 이들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수결을 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이들도 있긴 했는데 아직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라 그런 것이었고, 결국 그들도 곧 수결을 했다.
“그럼 오늘은 식사를 마치시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곧 다른 사람이 열흘 치의 임금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열흘 치밖에 안 주는 것이오?”
“그 열흘 안에 전투에 나가 살아오시는 분들은 한 달 치의 임금을 선지급해 드립니다.”
그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의원! 의원을 불러라!”
“제길, 기습에 걸리다니! 정찰을 맡은 개새끼는 어떤 개새끼야!”
신음 소리와 불만이 가득한 고함 소리,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짙은 살기가 사람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패잔병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악! 사, 살려 줘!”
잘려 나간 팔꿈치를 하늘로 치켜들며 고통스러워하는 한 낭인의 절규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넘겨준 계약서를 바라보며 후회하는 눈치였다.
“자, 자, 들어가시지요.”
계약서를 들고 왔던 청년이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가고자 하시는 분들은 계약을 파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몇몇 이들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추려지고 남은 이들은 모두 서른여섯 명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과 음식을 먹은 후에 침상에 드러누웠다.
***
“기상!”
묘시 초에 문이 벌컥 열리며 중년인이 들어왔는데, 지금까지 그들을 상대했던 이들과는 달리 평범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난 오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내명준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너희는 모두 내 조에 배치되었다. 모두 짐을 싸도록!”
오래 쉴 생각은 없어도 한 이삼 일은 쉴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그것은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