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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15화 (116/137)
  • 115화

    십여 명의 인물들과 함께 회의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손우는 들어서는 조당을 보면서 불안감이 들었다.

    깊은 분노는 침잠한다고 했던가?

    회의청 중앙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정철심을 봤음에도 조당은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슬쩍 홍여립을 바라보니 정철심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가 홍가의 그늘에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저벅거리는 조당의 발소리가 들릴 만큼 회의청은 조용했고, 그 침묵을 가르며 조당이 천천히 정철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원래 그가 앉는 상석의 의자로 가려면 정철심을 지나쳐야 하였기에 가는 방향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조당이 정철심에게 곧장 가리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단, 공손우 한 사람만 빼고.

    ‘문주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구나.’

    완벽한 무표정.

    마치 철갑으로 만든 가면을 쓴 것 같았다.

    그런 조당의 얼굴을 보면서 공손우가 우려하고 있을 때, 조당이 정철심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라.”

    “으윽!”

    낮은 목소리였지만 회의청을 웅웅 울리게 했고, 쌓인 먼지가 부스스 떨릴 정도로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내력이 약한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닥친 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물론 무식하게 힘만 좋은 정철심은 끄떡없었지만,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는 조당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인내해 왔다고 생각한다. 보다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사부님과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후대에 흑룡문의 세상을 여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말을 멈추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침묵 속에서 긴장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하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한 조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것을 바꾸려 한다. 더 이상 숨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정파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조당의 말에 중인들의 얼굴에 흥분이 깃들었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는 나이가 많아 다음 세대가 정파와 전쟁을 벌이면 후방에서 지원을 맡아야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끝나기 전에 정파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이후로 누구도 내 행동이나 결정에 이의를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존명!”

    우렁찬 외침에 다시 한 번 회의청이 들썩였다.

    그런 이들을 미리 살펴보기 좋은 자리로 이동한 공손우가 예리한 눈으로 휘둘러보았지만, 누구도 당황한다거나 의심스런 표정을 짓는 이는 없었다.

    ‘분명 배신자가 이 중에 있다면 조금이라도 티를 냈을 것인데… 어째서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거지?’

    공손우도 조당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렇게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니, 정호기의 진정한 정체와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랬겠지. 그럼 이 중에는 배신자가 없다는 것일까?’

    그것은 말이 안 되었다.

    지금까지 조당과 얘기를 나눈 결과 배신자는 직위가 높은 이들 중에 있을 확률이 높았고, 그 수도 적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째서 내가 발견할 수 없을까? 배신자들 모두가 진심으로는 전쟁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모두 연기력이 뛰어나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 갑작스런 순간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뭔가…….’

    공손우의 머릿속에서 조금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배신자가 없다면? 아니, 그 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면?’

    들뜬 얼굴의 흑룡문도들과 그들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조당의 모습을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문주님이?’

    그럼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전대 문주의 아들, 그리고 그가 익히고 있는 광랑십삼검, 절대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정보들.

    ‘아니야, 아니야. 너무나도 억지에 가까운 추측이다. 무엇 때문에 문주님이 그런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문주님의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에 흥분의 빛이 돌 정도이거늘…….’

    정파와 싸우기를 원했다면 지금처럼 한마디만 하면 끝이었다.

    괜히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손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조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내 의지이고, 앞으로 있을 내 방식이다.”

    “컥!”

    순간 정철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곧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으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조당에게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조당의 기세가 워낙 강한 탓도 있었고, 방금 전의 흥분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당이 잠시지간 공손우와 눈을 맞추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

    “군사,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조당이 나간 후 모든 이들이 공손우에게 몰려왔는데, 정철심에게는 홍여립이 눈길을 한 번 주고 수하를 시켜 시체를 수습하게 한 것이 전부였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많은 것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일단 정 대주에 관한 것만 말씀을 드리지요. 정 대주는 개방의 조개 현정훈을 죽였고, 그 일을 파산검에게 들켰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개를?”

    “허… 언젠간 크게 사고를 칠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일을 벌이다니…….”

    죽인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일을 들킨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보아하니 파산검을 죽여 입막음을 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예. 아무튼 이 일로 개방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동안 우리 문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정파의 단결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문주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신 것 같습니다.”

    “에잉…….”

    사람들의 눈이 홍여립에게로 향했다.

    정철심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일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질책 섞인 눈길인 것이다.

    “하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겠소?”

    조당이 전면전을 벌일 것이란 암시만 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갔기에 물은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십시오.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내일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이란 것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먼 후일을 바라보면서 한 것이었기에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 회의청에는 공손우와 홍여립 두 사람만이 남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홍여립의 말에 공손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무어라 말씀을 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문주님께서 지시를 내리면 그때 다시 말씀을 드리지요.”

    “정호기란 놈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

    “냉 장로님께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묻지 않아도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음… 냉 장로님이 말씀하셨다고요?”

    “예. 조금 과격하긴 하셨지만요.”

    느닷없이 찾아와 홍가의 태상 가주이자 홍여립의 부친인 홍의만과 홍여립의 목에 칼을 겨누고 물었던 것이다.

    [네놈들의 목을 따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나와 함께 문주를 도모할 생각이 있냐, 없냐?]

    두 사람의 가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가문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사실 홍의만과 냉획은 목숨까지도 걸 수 있을 만큼 친했다.

    그런 관계에서 냉획은 자신의 친우인 홍의만이 자신을 속이고 배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정공법을 택하고 말았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까?”

    “같이 술이나 한잔하러 오셨다면서 평소와 다르게 저까지 부른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지요.”

    그러면서 목을 쓰다듬는데, 얇게 붉은 선이 가 있는 것이 피까지 본 모양이었다.

    “사실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도 몰랐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냐? 이제야 그런 말을 하다니……. 당연히 생각이 있지. 그날 이후로 늘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었지 않냐?]

    “정말 놀랐지요. 아버님께서 문주님을 배신할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까요.”

    “…….”

    물론 그것이 아니었기에 지금 이렇듯 말을 하는 것이리라.

    “예전에 문주님께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똥통에 처박힌 과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숨 돌렸지만요.”

    공손우도 그것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

    사마진혁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우러르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조당이라는 존재를 질시하고 흑룡문 내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를 우습게 여겼다.

    조당과 냉획, 홍의만은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싸움의 승자는 조당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 이후에 냉획은 조당을 받아들였고, 홍의만은 조당을 시기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는데 그게 오늘날 조당이 냉가를 배후에 두게 된 이유였다.

    “그 이후에 전대 문주님의 아들과 배신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제 목을 걸고 홍가는 절대 아니란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홍가도 아니고 냉가도 아니다. 역시…….’

    문득 어이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문주님 외에 그런 정보와 광랑십삼검을 외부로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무공과 정보.

    이것에 딱 들어맞는 것은 조당뿐이었다.

    “군사?”

    “아, 죄송합니다. 냉 장로님께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문주님께서는 이번 조개의 사태를 이용해 정면으로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배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지면 문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문주님이 중원을 손에 넣게 되신다면 전대 문주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명분이 없어지지요. 이미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니까요.”

    “역시 문주님다우시군요. 정면 돌파라. 거기다 정 대주의 죽음을 이용해 확고한 의지까지 보이셨으니, 누구 하나 문주님의 명을 거역하는 이는 없겠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공손우는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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