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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13화 (114/137)

113화

“이 녀석아, 정신 좀 차려라.”

현정훈의 등에 업힌 정호기의 입가에서는 연방 피가 흘렀고, 그것이 현정훈의 목을 적시고 있었다.

“어, 어르신… 노, 놈들은…….”

“흥! 그따위 놈들이 내 경공을 따라올 수나 있으려고? 벌써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그러니 이제 조용한 곳을 찾아 요양만 하면…….”

말을 하던 현정훈이 마치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철퍼덕 쓰러지더니,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몇 바퀴를 구른 후에야 멈췄다.

“그럼 이제 네놈을 죽일 순간이란 말이군.”

혼란스런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현정훈을 정호기가 비릿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게…….”

다 죽어 가던 정호기는 없었다.

지금 정호기는 멀쩡히 서 있는 것도 모자라 온몸에서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음, 음… 입 안쪽을 깨물었더니 신경 쓰이네. 뱃전에서부터 몇 번을 씹었더니 제대로 낫지를 않아. 아물 시간을 좀 줄 걸 그랬나?”

입가를 타고 흐른 피가 그래서였나 보다.

그런 정호기를 바라보며 현정훈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의문에서 놀람으로, 다시 의문으로.

그리고 허탈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자리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의심은 했었지. 그러다 그 의원을 만났을 때 그 의심이 싹을 틔웠고, 확인은 중경을 오는 여정 중에 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현정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의원의 실력이 내 생각보다 뛰어났던 모양이군.”

“네가 어설픈 거지. 찌르려면 제대로 찌르던가. 상처는 깊어도 내장은 다치지 않았다더군. 마치 일부러 그렇게 찌른 것처럼.”

“운이 좋았을 수도 있잖으냐?”

“아니, 그 의원은 확신했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이상은 그 부위에 그런 상처를 입을 수 없다고 말이다.”

“허허! 늙어서 마음이 약해진 탓인가? 겨우 몸 다치는 것을 저어해 대사를 그르치다니…….”

“사부님이 목표였나?”

“그래.”

말을 마친 현정훈은 마치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술술 입을 열었다.

“네놈은 죽으면 안 되는데, 진가 놈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죽으면 곤란하니 네놈을 진가 놈과 떨어뜨려 놓는 것이 필요했지. 영초린 그놈이 먼저 무리를 이탈한 덕분에 내가 강굉의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더 수월했고. 그렇게 각기 떨어져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니 나머지 일은 자연 이루어지더군.”

만산에서 처음 살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영초린을 보낸 것이 정호기의 실수였다.

현정훈의 말처럼 그로 인해 현정훈이 떠날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 일행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무리를 지어 이동했다면, 어쩌면 진청운이 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진청운 그놈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그래서 몇 번 칼로 쑤셔 줬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처럼. 물론 내 화풀이도 되었고.”

진청운은 자신이 잡히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역시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어.”

이제 확실해졌다.

“물론. 네놈이 흑룡문을 나서는 그 시점부터 난 네놈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네놈의 의심을 피하고자 한 놈을 멀찍이서 따라오게 하기도 했지.”

대답을 한 현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될까?”

“물어봐.”

“나를 물에 빠뜨린 것도, 네놈의 그 종잡을 수 없는 행동도 모두 연극이었느냐?”

“네놈이 나에게 추종향을 뿌린 것 같은데,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더군. 게다가 분명 네놈의 몸에도 추종향을 뿌렸을 터이고. 그것을 지우자면 물에 빠져야 하는데, 마침 네놈이 약을 올리기에 이때다 싶었지. 아까 말한 것처럼 그때 그 피는 내가 입 안쪽을 깨물어 일부러 흘린 거였어.”

잠시 말을 멈춘 정호기가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에 빠진 이후 뒤를 살폈더니 쫓아오는 추격자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더군.”

“그런데 어째서 다시 종적을 드러낸 것이지? 나를 의심했다면 그때 죽이고 빠져나가면 그만 아니었나?”

“그래서야 내 계획이 완성되지 않거든. 이번 중경행을 고집한 것은 모두 너 때문이었으니까.”

“나 때문?”

“그래. 마침 그 계획의 종지부를 찍어 줄 인물이 다가오는데?”

정호기의 눈에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정철심과 파산검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네놈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해서야 내가 얻는 것이 없잖아.”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

“흑룡문은 너무 숨을 죽이고 있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계기를 만들어야겠지.”

“나 하나로 될까?”

“넌 개방의 장로로 죽는 거야. 조당의 그림자인 야제가 아니라. 그리고 그런 너를 죽이는 것은 열이 오르면 천지 분간을 못하는 정철심 저놈이 될 것이고. 파산검이라면 노망났다는 소문이 있더라도 충분히 목격자의 자격은 되겠지.”

“정가 놈을 기다린 것이냐?”

“언젠간 저런 놈을 보낼 줄 알았지.”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징글징글하게 잘 알지.”

[죽여! 아니다. 내가 직접 죽이고 말 테다! 어디 있느냐?]

무식하면 충성스럽기라도 하든가.

그놈은 어떻게 해서든 말썽을 부리려고 고민을 하는 놈이었고, 그런 주제에 충성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눈치와 요령, 그리고 강한 무공뿐.

“눈치도 빠르고 요령도 좋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을 할 때만 그렇지. 그런 놈이 무식하기까지 하면 골치 아프고.”

무식하다는 것은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놈의 성질머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화가 치밀면 앞뒤 안 가리는 것이다.

“궁금하지 않으냐? 나와 흑룡문주의 관계가?”

“힘들지? 그때와는 점혈에 쏟은 내공이 다르니까.”

그 말에 현정훈이 흠칫했다.

“일부러 그 정도의 내공으로 점혈을 한 것이다. 네가 방심하도록. 어쨌거나 궁금하긴 하지만, 시간을 더 끌어서 일을 실패할 정도는 아니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정호기가 현정훈의 아혈을 찍었다.

“네놈이 기다리는 것이 아마도 줄곧 우리 뒤를 쫓아다니던 놈이겠지?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현정훈의 몸을 짊어진 정호기가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빨리 찾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정철심의 닦달에 그의 수하가 땅바닥에 코를 박고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이쪽입니다!”

결국 흔적을 찾아냈는지 수하가 한 방향을 가리켰고, 그쪽으로 정철심이 뛰어갔다.

“서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사라지는 정철심 등의 모습을 보면서 홍적하가 묻자 파산검이 혀를 찼다.

“쯧쯧! 애써 곰이 재주를 부리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말리려고 하시오?”

말을 하면서 파산검이 정철심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래도…….”

홍적하가 뒤따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홍 문주, 어차피 이곳은 누구의 눈도 없는 곳이오.”

그 말은 여차하면 정철심 등을 죽이고 정호기를 가로챌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흑룡문의 영역이 아닙니까? 정가 저자는 흑룡문 소속이고 말입니다.”

“누가 알겠소이까? 어디 강호에서 이유 없이 사라진 자들이 하나둘이오? 운이 없으면 제집에서도 사라지는 것이 운명인 것을.”

“그렇지요.”

파산검의 말에 미소를 짓던 홍적하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는데,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보는 눈이 없다?’

흘깃 옆에서 달리고 있는 파산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앞에 두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나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호기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나를 찾아와 동업하자고 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어.’

홍적하의 명성과 파산검의 명성을 비교하면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한창때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사람들을 모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고 보니 사람들을 모은다고 했을 때 시간이 없다며 서둘던 파산검의 행동도, 지금 생각하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현상금을 나눌 사람이 많아지면 몫이 줄어들 뿐이라는 말에 혹하다니… 욕심이 화를 불렀구나!’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야. 괜한 내 억측인지도 몰라.’

피를 흘리며 업혀서 도망치던 정호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손만 뻗으면 황금이 손아귀에 굴러들어 오는 것이다.

‘수하들을 데리고 왔으니 더 달라고 하려 했는데, 일단 그것은 접어야겠구나.’

반씩 나누기로 했지만 어쩐지 손해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 생각하니 그다지 손해라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저놈들에게는 대충 얼마 쥐여 주면 되겠지.’

“홍 문주.”

“아, 예?”

“서두릅시다. 아마도 놈들을 발견한 것 같소이다.”

파산검의 말마따나 갑자기 정철심 등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

그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멈춰라!”

고함 소리와 함께 덤불 속에서 한 인영이 솟구치자 정철심은 무의식적으로 도끼를 휘둘렀고, 그런 그의 도끼에 인영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무척이나 허망한 죽음이었는데, 죽은 이의 모습이 또한 이상했다.

“어? 이놈은?”

시체를 확인한 정철심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가 놈을 데리고 도망친 거지 같습니다.”

“이놈은 개방의 장로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놈이 왜 갑자기 자살을 해?”

자살.

그 말을 제외하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수하의 시선을 따라간 정철심의 눈에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방의 인물이 아니라 소림의 방장도 기회만 있다면 죽이면 그만이었다.

물론 목격자가 없어야겠지만.

살인멸구.

-내색하지 말고 주위를 살피는 척해라.

정철심의 전음에 수하들이 현정훈의 시신에서 벗어나 빠르게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놈!’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일이 요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정철심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기는 했지만, 정호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화가 치밀었다고 상대도 보지 않고 도끼를 휘두르다니.’

[절대 정호기 그놈을 제외하고 다른 이와 부딪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같이 다니는 개방의 장로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지 마라. 만일 그가 나선다면 즉시 작전을 중지하고 문에 알리도록. 알았느냐?]

공손우의 말이 떠오르자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직 정파와 척을 질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어찌한다?’

해결책은 가까이 있었다.

흘깃 파산검 등을 쳐다본 정철심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 죽인 것으로 하면 될 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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