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허허… 중경에?”
“예. 그렇기에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화입마를 치료할 수 있는 분도 계시고.”
“알았다. 더 이상은 말하지 말거라. 아무래도 네게 있어서는 소중한 비밀인 듯싶으니.”
“감사합니다.”
“아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하구나. 괜히 채근한 것 같으니.”
“아닙니다. 저도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여기서 지체할 필요가 있겠느냐? 서두르자.”
현정훈이 빨리 떠날 것을 종용했지만, 정호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갈 수 없습니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럴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제 위치를 노출시키지도 않았겠지요.”
‘무슨 말이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행동은 주화입마로 인한 것이 아니라 뭔가 노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인가?’
의아한 현정훈이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알았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냐?”
“조금 더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제가 벌인 일 때문에 저를 쫓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겠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는 이들은 저를 쫓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의 실력이 뒷받침되는 이들이겠지요. 그들을 모아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밀 장소를 찾아가면서 어째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한단 말인가?
‘사리분별이 혼란스럽구나. 이것도 주화입마의 영향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결정권을 가진 것은 정호기였기에 그가 그렇게 하겠다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내가 쓸 만한 놈들이 어디쯤 있는지 알아 오마.”
말을 마친 현정훈이 정호기를 남겨 둔 채 신형을 날렸다.
***
“놈들이 중경으로 들어섰습니다.”
공손우의 보고를 받은 조당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물었다.
“그놈들을 쫓아온 놈들은?”
“어림잡아 백여 명이 훨씬 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는 파산검도 있습니다.”
“파산검이?”
“예.”
파산검은 벌써 십 년도 전에 검을 꺾고 은거에 들어간 정파의 고수였다.
그런 그도 정호기에게 걸린 현상금을 탐내어 중경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이들도 제법 되니, 만일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따로 떨어져 있을 때 각개격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네. 그냥 놔두게.”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고 있지만, 공손우는 조당의 속내를 몰라 답답했다.
‘중경을 정파 놈들이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던 분이신데, 어째서 그들을 용납하시는지 모르겠구나.’
“파천궁 놈들은?”
“섬서의 평리현을 지났단 보고를 들었으니, 며칠 후면 중경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그놈들도 가만 놔두도록. 그래, 정호기 그놈이 향하는 방향으로 보건대 목적지가 어디인 것 같은가?”
“그게,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정한 행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지도 위에 펼쳐진 붉은 점은 갈지(之)자 행보도 모자라 어떤 곳은 뒤로 물러난 곳도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적을 놓치지는 않았겠지?”
“예.”
“그나저나 놈도 우리의 의도를 알고 있을까?”
“그럴 것입니다.”
확실한 마무리를 하지 않는 흑룡문의 행보에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란 것을 정호기가 파악하고 있으리란 말이었다.
“우리를 의식해서 그런 행보를 보인다고 보나?”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흐음… 도무지 놈의 의중을 모르겠군. 좋아. 어쨌거나 이쯤에서 또 한 번 자극을 줄 필요는 있겠어. 준비는?”
정호기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냥 방치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놀고 싶다면 놀아 주면 그뿐.
그리고 흑룡문은 정호기를 이용해서 문내의 골칫거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보내게.”
“알겠습니다.”
골칫거리들을 선발하는 것이 공손우의 일이었는데, 무공은 높지만 문에 있어서 해가 되는 이들을 골라내 그 임무를 맡기는 것이다.
죽어도 아깝지 않은 것들로.
아니,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질 만큼 시원한 놈들로.
***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정호기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도대체 어째서 저따위 놈들에게 고전을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분명 지금 정호기가 상대하는 이들은 이전에 왔던 놈들에 비해서 한 수 떨어지는 것들이었는데, 그럼에도 정호기는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중이었다.
현정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나설 수 있다면 좋겠구먼.’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호기가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더 이상 시간을 잡아먹히는 것은 사절이었다.
‘저놈들이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어.’
멀리서 다가오는 십여 명의 인물.
그중에서 백발과 백수(白鬚)의 노인이 신경 쓰였다.
‘파산검, 저 늙은이가 제대로 노망이 났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벌써 나이가 칠십을 넘긴 파산검이 좋지 못한 소문에 휩싸인 것은 삼 년 전 그가 새로 부인을 들였을 때부터였다.
이제 겨우 이십일 세인 그 여인은 열여덟 살의 나이로 팔리다시피 시집을 와서 그때부터 파산검을 쥐고 흔들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이 삼 년 만에 바닥을 보일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고 하더니, 결국 은거를 깨고 이런 지저분한 시궁창에 발을 담글 정도가 되었나 보군.’
사람이 망가졌건 어쨌건 간에 파산검의 솜씨는 확실했다.
‘저 걸음걸이로 보건대, 녹이 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노련해진 모양이구나. 하긴, 젊은 부인을 만족시키려면 수련을 더 열심히 했겠지. 어이쿠! 저 녀석,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정호기의 만류에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정훈이 기겁할 정도로 놀란 것은 정호기가 제대로 한 칼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가슴 어림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제법 심각한 부상 같았다.
‘먹이를 놓칠세라 급했구나.’
느긋하게 걷던 파산검이 갑자기 경공을 발휘하며 접근하고 있었다.
***
“하하하하! 이놈! 이제 그만 무릎을 꿇어라!”
호기롭게 외치며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는 이는 흑룡문 내당에서 오 년째 경비만 서다가 처음으로 문을 벗어난 개산대부 정철심이었다.
육 척이 넘어서는 키에 덩치도 다부진 그였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쩡!
대도와 대부가 부딪치면서 불꽃이 일었고, 정호기의 몸이 무려 이 장이나 뒤로 날아갔다.
“컥!”
정철심과 같이 온 흑룡문도 하나의 목이 정호기가 휘두른 호아에 의해서 날아갔는데, 벌써 열두 명째였다.
“이놈이!”
남은 것은 여섯 명.
아무리 정호기의 목을 가지고 돌아간다고 해도 수하들을 이렇게 많이 잃어서는 책을 잡힐 것이었다.
‘절대 다시 경비만 설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어떻게든 정호기의 목을 발판 삼아 경비를 벗어나 중원을 휘젓고 다니리라 결심한 정철심이었다.
“죽어!”
허공으로 뛰어오른 정철심의 대부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마치 벼락처럼 정호기를 향해 흰 빛이 춤을 추며 떨어졌다.
다섯 줄기의 강기는 닿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근육을 수축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그것은 다음 공격을 할 때 적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결정적인 공격을 하기 전에 하는 포석인 셈이었다.
‘맞지 않고 막기만 해도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차고 막 다음 공격을 하려는 찰나, 정철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갑자기 정호기의 몸에서 수십 줄기의 빛이 뿜어지더니 자신의 공격을 모두 튕겨 버리고 나머지 다른 빛줄기들이 쇄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압!”
정철심이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휘두르자, 마치 산이 불쑥 솟아오르듯이 그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벽이 생기며 정호기의 공격을 막아 갔다.
콰콰콰쾅!
정호기의 공격이 벽을 두드리자 안에 있는 정철심의 입가로 피가 흘렀다.
“제길! 한 수가 있었다 이거지!”
공격을 막아 내자마자 정철심이 악을 쓰면서 정호기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그런 그를 맞는 정호기는 힘이 다했는지 호아를 축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정철심을 지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환뢰!”
초식명을 외치며 도끼를 휘둘렀는데, 그의 공격은 초식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환영이 없는 빠른 공격이었다.
무식하게 생겼지만, 생긴 것 같지 않게 약삭빠른 놈이었던 것이다.
사실 싸움에 임하면서 초식명을 외친다는 것부터가 우선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가끔 정철심과 같이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초식을 외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저 기량을 겨루는 비무도 아닌 상대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는 싸움에서 초식을 외칠 힘이 있다면, 주둥아리 나불댈 그 힘을 무기를 잡은 손에 쏟는 것이 옳았으니까.
땅!
도끼와 호아가 만나 불똥이 튄 순간 다시 정철심이 도끼를 휘둘렀다.
“속뢰!”
역시나 이번에도 외침과는 정반대로 십여 개의 환영이 정호기를 압박했다.
“분뢰!”
콰콰쾅!
강기로 이루어진 환영들이 갑자기 정호기의 면전에서 폭발해 버렸다.
“이놈!”
폭발의 여파를 이용해 뒤로 물러나는 정호기를 정철심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따라붙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과 몸 곳곳에 있는 상흔들, 그리고 입가에 흐르는 핏물로 보았을 때 멀쩡한 몸이라고 보이지 않았으니까.
‘서둘러야겠구나.’
정철심이 흘깃 뒤를 돌아보니 십여 명의 인물이 각기 무기를 꺼내 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정호기를 치는 것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 것을 명받았기 때문이었다.
“응! 이런 개뼈다귀 같은 늙은이야! 거기 안 서!”
정말 찰나였다.
잠깐 눈동자만 살짝 돌려서 뒤를 확인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누더기를 입은 늙은이가 정호기를 낚아채서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었다.
다 된 오리구이에 코를 풀어도 유분수지, 기껏 다 잡아 놨더니 거지새끼가 어부지리를 취하는 형국이었다.
“거기 서란 말이다!”
서란다고 선다면 이 세상에 추격전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철심이 살기가 등등한 얼굴로 현정훈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파산검 등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