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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11화 (112/137)

111화

“그나저나 저놈들은 언제까지 달고 갈 생각이냐?”

인파도, 건물도 없는 숲 속에서 어설픈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는 일단의 무리였다.

“뭐, 상관없습니다. 저들도 머리가 있다면 중경으로 들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곧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고도 따라온다면 저들 팔자소관이지요.”

대답하는 정호기를 보면서 현정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쪽인가 하면 아니고, 저쪽인가 하면 또 발길을 돌리니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중경으로 가는 것만은 확실하니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하는 짓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웠지만 그 행보는 중경을 향해 있었다.

“그래도 저들은 위험한 것 같군요.”

정호기의 시선을 따라 현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흑의로 통일한 삼십여 명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 놈들 같으냐?”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녹록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대답하는 정호기를 현정훈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내상도 다 나았을 텐데, 겨우 저렇게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놈들을 어렵다 생각한단 말이냐?”

“아무리 고수라도 눈먼 칼에 맞으면 죽을 뿐이죠.”

“눈먼 칼에 맞으면 그걸 고수라고 할 수 있냐? 힘만 센 멍청한 놈이지.”

세간에 진리처럼 번져 있는 하수의 칼이라도 고수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었다.

현정훈의 말처럼 하수의 칼에 죽는 순간, 그 인간은 고수가 아니라 멍청한 놈이 되고 마니까.

그리고 하수들이 혹시나 하고 만들어 낸 그런 뜬소문처럼 고수들이 하수의 검에 죽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하수들의 바람인 것이다.

현정훈의 말을 들으며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는 일단의 흑의인들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뭐를 생각했는지 갑자기 호아를 손에 쥐더니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아!”

느닷없는 정호기의 행동에 현정훈이 급히 그를 불렀지만, 어느새 쏜살같이 달려간 정호기는 이미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던 흑의인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무슨 놈이… 적인지 아닌지부터 알아보고 싸워야 하거늘…….”

사실 흑의인들이 정호기와 현정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기는 했지만, 딱히 살기를 뿌린다거나 공격을 하기 위해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기는 마치 그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달려 나갔던 것이다.

‘혹시 주화입마가?’

깨달음을 얻어 약간의 성취를 보았다던 정호기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구나.’

주화입마라면 정호기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말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없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만일 이상을 느꼈다면 소림으로 가야지, 어째서 중경으로 간단 말인가?’

천수신의는 현재 소림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주화입마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그를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주화입마에 걸린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마치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철천지원수를 상대하듯 호아를 놀리는 정호기를 보면서 현정훈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

“하압!”

내리찍는 호아의 궤적에 있던 흑의인의 몸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선혈과 내장 부스러기들이 후드득 주변에 흩뿌려졌다.

“죽여!”

격정적으로 외치는 중년인의 음성엔 다급함과 동시에 분노, 그리고 절망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중년인, 독안철조 구달성은 정호기의 칼질 한 번에 한 명씩 자신의 부하들이 찢겨 나가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파천궁의 외당 염마대 소속이면서 무수히 많은 싸움을 거치며 단련된 부하들이었다.

이렇듯 허무하게 죽을 이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정호기의 칼질 한 번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이놈!”

수십 개의 환영을 그리며 구달성의 검이 정호기를 찔러 갔지만, 이미 그 자리엔 허리 어름에서 반으로 잘린 수하의 시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이, 팔로 막으면 팔이, 몸으로 막으면 몸이 잘리는 상황이었기에 추혼대는 정호기의 호아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

“도망쳐!”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구달성이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남아 있는 숫자는 겨우 열둘이었다.

순식간에 반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수하들에게는 도망치라고 했지만 구달성은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정호기에게 신형을 날렸다.

수하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고자 함이었다.

“나하고 싸우자!”

자신의 공격을 슬쩍슬쩍 흘리면서 오로지 수하들의 뒤만 쫓아다니는 정호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지만, 정호기는 마치 그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다른 이들을 뒤쫓기 바빴다.

“도망치란 말이다! 이 병신 새끼들아!”

구달성의 도망치란 말에 신형을 날리던 염마당 소속 무인들은 구달성이 정호기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그들도 발길을 돌려 정호기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들을 향해 구달성이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사파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그들이었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십일 명의 염마대원이, 구달성의 공격을 피해 다른 염마대원의 목을 날린 정호기를 사방에서 포위하며 검과 한 몸이 되어 날았다.

땅을 미끄러지는 네 명과 정호기의 허리 어름에서 수평으로 날아가는 네 명,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허공에서 정호기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고 있었다.

‘기회다!’

구달성은, 자신의 명을 거역한 수하들이었지만 그들이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하기 어려운 이들을 만났을 때 늘 사용하던 진이었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수하들의 공격에 정신이 팔린 상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면 되었으니까.

“흡!”

잠깐의 틈을 이용해 가진 내공과 함께 잠력까지 끌어 올린 구달성의 입가로 피가 흘렀다.

무리를 한 결과였지만, 그 대가로 그의 검에서는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협공을 취하는 듯한 수하들의 행동은 허수였다.

서로의 몸과 무기를 지지대 삼아 순식간에 뒤로 물러설 것이고, 그사이에 구달성이 혼신의 힘을 깃들인 공격을 퍼부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로 물러났던 수하들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잠력을 격발시켜 정호기에게 쏘아질 것이다.

정호기에게 쇄도하기 위해 발로 땅을 박찰 때 구달성은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신형을 날렸다.

쨍!

수하들의 검이 부딪치며 마치 종이 깨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린 것은 구달성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서로의 무기를 지지대 삼아 뒤로 튕겨 나올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의 시발점이 정호기의 손에 들린 호아라는 것이 문제였다.

서걱!

밝은 빛무리와 함께 들려온 단 한 번의 소리에 구달성의 눈앞이 붉게 변했고, 공간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호기의 얼굴이 보였다.

“이……!”

사방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도의 형상이 지나간 자리엔 잘게 잘려진 구달성의 잔해만이 남았다.

***

“너무 과한 것 아니냐?”

현정훈이 멀리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이들을 의식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학살의 현장.

잘려진 팔다리와 몸뚱이들이 널려진 가운데, 선혈과 장기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저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준 것뿐입니다.”

너무도 담담한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의 얼굴이 굳었다.

‘이거야 마치 사파의 종주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아무리 독하다고 해도 사람을 이렇게 토막 쳐 놓고 멀쩡한 인간은 별로 없었다.

살인을 즐기는 살인광이나 보일 법한 행동인 것이다.

거기다 입술 끝에 매달려 있는 조소는 현정훈의 가슴마저 저릿하게 만들 정도였다.

정파의 기재인 정호기가 보여줄 모습은 아니었다.

“이놈들이 누군지 알고 이렇게 한 것이냐?”

“모릅니다.”

대답을 들은 현정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호기는 대답과 달리 구달성과 그의 부하들을 알고 있었다.

[결코 너를 살려서 보내지 않으리라!]

정호기가 정파를 산산조각 내고 눈을 돌린 곳이 바로 파천궁이었다.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일 수는 없는 법.

그런 정호기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 바로 구달성과 그의 수하들이었고, 목숨을 사리지 않는 그들의 공격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특히나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잠력을 순식간에 폭발시켜 공격하는 동귀어진의 수법은 노회한 그를 당황하게까지 했었다.

모르고 싸웠다면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역시 속전속결이 정답이었어.’

구달성을 먼저 치지 않은 것은 그의 수하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노리던 순간은 빨리 찾아왔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꾸나.”

비릿한 피 냄새가 풀풀 퍼지는 곳에서 시체 조각들을 밟고 있는 모습이 좋을 리 없었기에 현정훈이 정호기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떴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정호기의 손속에 질렸는지 쫓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아무래도 내가 보기에 네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산중에 자리한 폭포 앞에서 달리던 것을 멈춘 현정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정호기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넌 지금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구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화를 더욱 키울 뿐이다. 그러니 중경에 가는 것은 뒤로하고 나와 그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해 보자꾸나.”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허! 어찌 아무렇지 않단 말이냐. 나까지 속일 생각이냐?”

현정훈의 말에 정호기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래, 어서 말을 해 보거라.”

말을 할 듯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자 현정훈이 채근했다.

“…제가 주화입마에 걸린 것 같습니다.”

머뭇머뭇하다 결국 정호기가 입을 열었다.

‘역시!’

현정훈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을 왜 숨겼느냐? 진즉에 말을 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어째서 소림으로 가지 않고 중경으로 가는 것이냐?”

한번 입을 열자 정호기는 막힘이 없었다.

“사실 중경에 외조부님의 안가가 있습니다. 그곳에 그분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지요.”

그 말에 현정훈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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