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자연 정호기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태력문? 그런 문파도 있었나?”
“아, 산서에 있는데, 거기 문도들이 하나같이 정호기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고들 하네.”
“산서? 산서면 파천궁의 영역이 아닌가?”
“그렇지.”
“그럼 태력문이 사파인가?”
“정사지간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 파천궁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굴복한 것은 아니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니 말이네.”
“아무튼 그래서? 그곳이 왜?”
“아마도 파천궁하고 대판 붙으려는 것 같네."
“파천궁하고? 상대가 되나? 그나저나 왜 그러는데?”
“말했잖은가, 태력문도들이 모두 정호기란 놈과 비슷한 덩치라고 말이네.”
“설마 파천궁의 누군가가 흑룡문에 가져가려고 태력문도를 베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중원의 사파를 양분하고 있다고 알려진 흑룡문과 파천궁이었다.
그런데 흑룡문의 행사에 파천궁도가 나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네. 파천궁에 구절도란 놈이 있는데, 이놈이 그럴 속셈으로 태력문도를 죽였다고 하더군. 아무튼 그 일로 태력문이 파천궁에 항의를 했고, 그것이 일파만파 퍼져서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갔다고 하네.”
“허… 그럼 파천궁은 횡재를 한 셈이네. 이참에 태력문을 몰살시키면 두당 은자 삼십 냥은 떨어질 테니 말이네.”
“그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
“만만치 않다니?”
“태력문이 그동안 친분을 유지했던 파천궁에 굴복하지 않은 문파들과 연수를 한 모양이야. 파천궁으로서도 섣불리 달려들기 힘들 만큼 말이네. 어쨌거나 지금 산서는 그 일로 난리라더군.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낭인을 대대적으로 끌어 모으고 있는 모양인데, 낭인들이 대부분 정호기란 놈을 잡으려고 호북과 섬서, 사천으로 몰려들어 품삯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 흠…….”
“왜? 입맛이 당기나?”
“솔직히 그렇지 않나. 정호기란 놈을 잡을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판국이고, 또 설사 잡는다고 해도 문제이니.”
“그렇긴 하지.”
“자네, 나랑 산서나 가지 않겠나?”
“그럴까?”
“그렇게 하세. 아무래도 이 길이 북망산으로 가는 것 같아서 내내 찜찜하던 참이었네. 자네나 나 같은 이들에게 정호기란 놈이 보물이겠나? 재앙이 아니면 다행이지.”
말을 마친 중년인이 아까부터 자신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청년에게도 같이 갈 것을 종용했다.
***
그들의 얘기를 전부 들은 정호기가 갈등에 휩싸였다.
‘태력문이 위기에 처했구나.’
이대로 모른 체해도 되겠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산서로 갔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정호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현정훈이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왜 그러느냐?”
정호기의 물음에 현정훈이 잠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추스르더니 입을 열었다.
“저, 도련님.”
“응?”
“계속 뱃길로 이동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마침 선착장이 가까운데, 잠시 내려서 요기라도 하시지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벌써 두 개의 선착장을 그냥 지나친 정호기였다.
현정훈이 아무리 내리자고 말을 해도 듣지를 않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없다. 내가 식욕이 없는데 감히 네가 혼자 먹겠다는 소리냐?”
“소인은 너무 배가 고파서 혼자라도 먹어야겠습니다. 늙어 꼬부라진 제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로 먹는 것인데, 어찌 그것마저도 빼앗으려 하십니까?”
어찌나 서글프게 말을 했는지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정호기를 보면서 자신들끼리 수군거렸는데, 대부분이 욕이었다.
“이보게 공자, 어지간하면 음식 좀 사 드리게. 얼마나 굶었으면 얼굴이 저렇듯 해쓱하겠나?”
태력문으로 가기를 종용하던 중년인이 정호기에게 말을 하였다.
그 말에 정호기가 현정훈을 바라보았는데, 언제 그렇게 꾸몄는지 한 열흘은 족히 굶은 사람처럼 볼은 쏙 들어가 있고 눈 밑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마치 시체와 같았다.
거기다 살짝살짝 떨리는 손까지 더해지자, 누가 보더라도 동정심이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어떠냐, 요놈아. 이것이 바로 개방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의 구걸신공이다.
그런 현정훈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호기가 그가 반항할 새도 없이 혈도를 찍었다.
“현 노! 현 노! 왜 그래?”
갑자기 정호기가 혈도를 찍을 때만 해도 현정훈은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알지 못했었다.
“이런, 숨을 안 쉬잖아? 설마 이렇게 가는 거야?”
정호기의 호들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보시오, 공자, 왜 그러시오?”
“어디, 내가 좀 봅시다.”
그렇게 다가오려던 이들을 정호기가 제지했다.
“그만! 모두 다가오지 마십시오!”
그들을 막은 정호기가 현정훈을 안고는 일어섰다.
“이 여행은 사실 현 노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알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음식도 가려 먹어야 했기에 현 노가 먹는 것을 좋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지 않은 것이고요.”
말을 마친 정호기가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 눈빛에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현정훈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뱃사람이었다고 그리 자랑을 하면서 꼭 수장을 해 달라고 했지? 현 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게.”
말을 마치자마자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현정훈을 배 밖으로 던진 정호기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풍덩!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가라앉는 현정훈을 뒤로하고 배는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
촤악!
물기둥을 만들며 허공으로 치솟은 현정훈이 등평도수를 펼치면서 물 위를 뛰더니, 물을 박차고 멋들어진 경공을 뽐내며 뱃전에 착지했다.
“캑, 캑……. 이 오뉴월에 얼어 죽을 놈아! 죽이려고 작정했냐!”
젖은 몸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현정훈이 정호기에게 악을 썼다.
“멀쩡하시네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 정호기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어렸다.
“그게 할 소리냐?”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 올려서 혈을 뚫느라, 이번엔 꾸민 것이 아닌 진정한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에 가득했다.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누구 하나 가까이 오진 않았는데, 현정훈이 물에서 나와 뱃전에 오르는 경공을 보고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쿨럭!”
현정훈이 울컥하면서 물을 뱉자 그 속에 피가 섞였는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이런… 쯧쯧. 내상이라도 입으셨나요?”
능글거리는 말투로 봐서 미안한 감정은 없는 듯하다.
“너……!”
“그러게 왜 먼저 사람을 건드리세요. 하인 역할을 하기로 하셨으면 제대로 하셨어야지요.”
정호기의 말을 들은 현정훈이 뭐라 하려는 찰나, 선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물에 빠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니 안 와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외다. 이 녀석과 내가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오해를 한 모양이오.”
현정훈이 선장을 돌려보낸 뒤 정호기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덜덜 떨리는 몸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정말 다치신 겁니까?
“그럼 너는 내가 혀라도 깨물어서 핏물을 뱉은 줄 알았냐?”
싸늘한 현정훈의 말에 정호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쯤 되면 그 정도는 가볍게 푸실 줄 알았죠.
“가~ 볍게? 너는 전음을 펼칠 여력도 되지 못해서 주둥아리 나불대는 내가 안 보이냐?”
“죄송합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저도 물에 빠지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혈도를 찍으십시오. 물론 그 혈도를 제가 풀지 못해 죽는다 해도 절대 원망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정호기를 현정훈이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아무리 내가 철이 없기로서니 너와 같은 수준이 될 순 없지.”
“정말입니까?”
“그래.”
현정훈의 말을 들은 정호기가 ‘뭐,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요’란 표정을 짓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동안 현정훈은 계속해서 몸을 떨었는데, 어디 적당한 곳을 찾아 한시라도 빨리 운기조식을 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 선착장에서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야, 뭔가 있는 거 같지?”
옆에서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현 노라고 했잖아.”
지금 정호기가 개방의 장로인 현정훈과 같이 다닌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몸이야 축골공으로 바꿀 수도 있고. 저 정도의 고수가 일부러 몸을 숨기고 다닐 이유도 없고 말이야. 아무래도 맞는 거 같지?”
자신들은 조용한 소리로 말한다고 하겠지만, 정호기나 현정훈 같은 고수들에게는 천둥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릴 뿐이었다.
“이보시오.”
“네, 넵!”
정호기가 부르자 나이가 훨씬 많을진대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해 버린 중년인이었다.
“내가 정호기인 것은 맞지만, 전음을 쓸 능력도 안 되면 그냥 고향에나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
순간 정호기를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리고 모두들 잘 생각해 보시오. 과연 흑룡문이 어째서 내게 그토록 많은 현상금을 걸었는지 말이오.”
말을 하면서 일어선 정호기가 천천히 내공을 개방하더니 축골공을 풀었다.
뚜둑, 우두둑!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겨우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쉴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축골공을 푸는 데 짧은 시간이 걸리고 또한 푼 다음에도 후유증을 겪지 않는 것은, 그간 틈틈이 몸을 풀어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틈을 내줬으리라.
“그대들은 모두 내 목숨을 취하고자 왔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흑룡문이 진즉에 날 없애고 머리를 그들의 현판에 매달았을 것이오.”
정호기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디나 제 분수를 모르고 까부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놈은 방금 축골공을 풀었소이다! 놈이 지금 떠벌리는 것은 몸을 추스르기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오!”
한 중년인의 말에, 사람들의 눈에 다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고수라고 항상 센 법은 아니고, 약점이 있을 때 공격하면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높을 테니까.
“자, 모두 놈을 고… 컥!”
사람들을 선동하려던 중년인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더니 괴로워했다.
“역시나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있단 말이지.”
중년인을 향해 손을 뻗은 정호기가 싸늘한 눈초리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내가 네까짓 놈들이 무서워서 주절거린 거라고 생각하느냐?”
정호기가 말을 하는 와중에 중년인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붙잡힌 것처럼 공중에 떠오르더니, 정호기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