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놈이다!”
시체들이 즐비한 곳에서 뭔가를 줍고 있던 마적이 정호기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그런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친 정호기가 그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그러는 와중에 그를 포위하면서 마적들이 몰려들었지만, 정호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마나 받기로 했지?”
정호기의 질문에 모가지를 잡힌 마적이 숨이 막힌 듯 떠듬떠듬 말했다.
“그, 금자 배, 백 냥입니다.”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금자 백 냥이라니.
“내 목에 그렇게나 많은 금액을 걸다니, 흑룡문이 무척이나 날 잡고 싶은 모양이구나.”
“케, 켁… 대, 대협, 사, 살려 주십시오.”
그때 무언가가 정호기를 향해 날아왔는데, 그쪽을 향해 돌아선 정호기가 모가지를 잡은 마적을 방패 삼아 그것을 막았다.
“끄윽…….”
작은 침이었는데, 독이라도 묻었는지 침을 맞자마자 마적이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이키더니 입가에 게거품을 물었다.
“백 냥이라… 날 완전히 보물로 만들어 놓았군.”
금자 백 냥이라면 사파가 아니라고 해도 달려들 정도의 금액이었다.
정호기가 싸늘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자 찔끔한 이들이 한발 물러서거나 고개를 모로 돌렸지만, 적의를 거두지는 않았다.
시체들이 즐비하였고, 그것을 만든 이가 정호기임에도 금자 백 냥은 그 모든 것들을 가려 줄 만큼 유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슉!
누가 던졌는지 모를 창 하나가 빠르게 정호기에게로 향하자 그 뒤를 한 사람이 바짝 따르며 정호기를 공격해 들어갔고, 그것이 시발이었다.
한 사람의 공격으로 인해 다른 모든 이들의 공격을 이끌어 낸 것이다.
챙!
날아온 창을 막아 냈을 때, 그 뒤를 따르던 이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그에게 자극받아 몸을 날린 다른 이들이 정호기에게 각자의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뭘 바라는 것이지? 이따위 놈들로는 나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쫘악!
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정호기의 칼질 한 번에 대여섯 명의 몸이 반으로 잘렸다.
치밀어 오르던 울화는 이미 충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슬쩍 산서 쪽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느닷없이 몸을 날렸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섬서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놈이 도망간다! 잡아라!”
귀찮아서 피하는 것을 도망가는 것이라 오해한 마적들이 그의 뒤를 따라서 신형을 날렸다.
‘자, 어떻게 나오는지 볼까?’
숨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호기는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그것도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과 거리를 조율해 가면서 섬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
“놈은?”
“섬서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냉백이 탁자를 후려쳤다.
쾅!
산산이 부서지는 탁자의 파편이 날아왔지만, 보고를 했던 이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놈에게 걸린 현상금이 금자 백 냥입니다. 위치를 제보하는 이에게도 은자 열 냥을 지급한다는 방을 붙였으니, 조만간 놈이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 보물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방이었다.
“알았다. 나가 봐라.”
“예.”
수하가 방을 나서자 냉백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놈! 네놈의 사형제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날, 이 빚은 천 배 만 배로 돌려주겠다.”
냉적의 죽음을 보고받은 후에 정호기를 죽여 버릴 생각까지 했던 냉백이었지만, 문주의 엄명이 있었기에 죽일 수 없었다.
“어중이떠중이에게 죽을 정도는 아니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냉획이 정호기가 만만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라고 말을 했을 때 흘려들은 것이 냉적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상대할 것을.”
갑작스레 내려온 지령은 정호기를 최대한 붙잡아 두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누구이기에 문주님의 신패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산에서 흑룡문도들을 모두 물린 것도 신패를 가진 이의 명령 때문이었는데, 냉백은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음…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내 계획을 방해한다면 일이 의외로 어려워질 수도 있겠구나.”
문주에게 서신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령권자가 누가 될 것인지를 확실히 해야겠어.”
***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을 비롯한 일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금자 백 냥은 사람의 사리를 어둡게 만들 테니, 주변의 모두가 적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놈들이 무리수를 두었구나.”
현정훈의 말마따나 이런 방법은 상당히 비열한 짓이었고, 오히려 정파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자파의 누군가가 돈에 눈이 멀어 정호기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테니까.
“처음 내가 말한 대로 안전한 곳에서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떻겠느냐?”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소림은 어떠냐? 설마하니 소림까지 쳐들어오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놈들의 의중을 모르는 상태에서 소림에 간다는 것은 피해야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현정훈이 인상을 썼다.
“어차피 놈들이 정사대전을 원한다면 소림이 아니라 더한 곳에 있어도 쳐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곳에 가지 않는다 하여도 일어날 일이고 말이다. 또한 지금은 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르신도 소림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네 모가지가 금자 백 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느냐. 너 자체로도 무림에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다.”
가만히 현정훈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림으로 가는 것으로 하지요.”
말을 마친 정호기가 당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도 함께 가겠네.”
결국 모두가 소림으로 향하는 것으로 결정을 본 가운데, 이제는 가는 방법을 논의할 차례였다.
“초린이와 상진이는 당 대협, 당 소저와 함께 이동하도록 해라.”
“대형!”
정호기의 말에 영초린이 바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저라도 대형의 곁에 있겠습니다.”
“아니다. 지금 너를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당 소저와 당 대협이시다. 어쩌면 네게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책임지고 그분들을 소림으로 모셔 주기 바란다.”
이번엔 정호기가 현정훈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은 저하고 같이 놈들의 시선을 흐리게 한 연후에 같이 가시죠.”
“왜 하필 나냐?”
“그럼 어르신이 당 대협과 당 소저를 모시고 가시겠습니까?”
현정훈의 고개가 대번에 좌우로 흔들렸다.
“너랑 가마.”
***
“불편하지 않으냐?”
현정훈의 말에 정호기가 인상을 쓰면서 대꾸했다.
“그런대로 버틸 만합니다.”
축골공을 이용해 몸을 작게 만들긴 했지만, 워낙에 기골이 장대한 까닭에 줄인다고 줄였음에도 일반 성인보다 주먹 하나는 더 큰 덩치였다.
그래도 그 정도라도 줄인 덕분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무사히 산서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저보다는 어르신이 더 불편해 보이는데요?”
정호기의 말마따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평복을 입은 현정훈은 옷이 불편한지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긁고 있었다.
“그토록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계셨을 때는 한 번도 몸을 긁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왜 깨끗한 새 옷을 입은 후부터 그리 긁어 대십니까?”
“흥! 사람마다 편하게 느끼는 것은 다른 법이다. 그나저나 진짜 소림으로 가지 않을 생각이냐?”
“예. 그리고 들를 곳도 있고 말입니다.”
“들를 곳이라니?”
“등하불명이란 말을 조금 이용했지요.”
“등하불명?”
“뭐,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놈들이 소란을 원하면 소란스럽게 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이번엔 인지상정이라.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뜻이나 알고 하는 말인지 의심스럽구나.”
“이래 봬도 배울 만큼 배운 놈입니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이거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보시면 되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사과를 다 하십니까?”
“에잉!”
정호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현정훈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버지, 다리가 아픈데 마차를 빌려서 타고 가면 안 될까요?”
갑자기 정호기가 현정훈을 향해 아버지라 불렀는데, 앞쪽에서 무인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
“아악!”
현정훈의 주먹이 머리를 때리자 정호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녀석아! 다 늙은 아비도 이렇게 멀쩡히 걸어가거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다리가 아프단 말이냐?”
-주먹질에 감정이 깃든 것 같은데요?
정호기의 전음을 가볍게 씹은 현정훈이 탄식을 터뜨렸다.
“아비 돈 없는 거 뻔히 알면서, 늙은 아비를 업고 가겠다는 말은 못할망정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너무 연기에 심취하시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는데요.
-저런 시선이 금방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사건은 계속 일어나니까. 그리고 설마 우리가 일부러 주목을 받으려 한다고 생각이나 하겠느냐? 그나저나 아주 똑같이 그려졌구나.
그들이 지나는 길에도 정호기의 초상이 금자 백 냥이란 현상금을 달고 벽에 붙어 있었다.
“잘못했어요. 그러니 그 손 좀 내리세요, 예?”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멀어질 때,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
산서를 지나 하남에 들어서서도 정호기는 축골공을 풀지 않았고, 가끔 이삼 일에 한 번씩 축골공을 풀고 운공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것이 호북에 도착하고는 상황이 변했다.
호북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축골공을 풀고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난리가 났다.
“달려요!”
정호기의 말에 뒤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아 대는 현정훈이었다.
“이놈아! 게 서지 못해!”
“하하하하, 어서 오세요! 뭐하시는 겁니까? 천하의 조개가 벌써 지치신 건가요?”
넉살 좋게 말을 받는 정호기의 모습을 본 현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오냐! 퉤! 너, 잡히면 죽는다!”
손바닥에 침을 뱉은 현정훈이 막 작심을 하고 경공을 시전하려 할 때, 정호기의 전음이 들렸다.
-잡히면 죽는 것은 어르신입니다. 뒤를 보세요.
그 말에 현정훈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추격자들이 오십 장 거리까지 쫓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