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정 소협?”
정신이 든 당혜미가 정호기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진 대협, 진 대협께서는 어디 계시죠? 무사하신 거지요?”
정호기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서글피 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현 대협께서 소저를 구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부상도 당하시고. 지금은 잠시 주변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나가셨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혀, 현 대협이요?”
“그렇습니다.”
겨우 울음을 그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진 대협과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는데, 갑자기 복면인이 우리를 공격했어요. 진 대협이 저를 밀치느라 부상을 입으셨는데, 전 그 순간 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어찌 된 일인지는 알지 못해요.”
“그렇습니까?”
“죄송해요.”
그녀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소저라도 무사하시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는지 당혜미가 물었다.
“숙부님은 어떻게 되셨지요? 혹시 아시나요?”
“아직까지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당 대협도, 나 제나 영 제에 대한 소식도 없다 하시더군요.”
그때 현정훈이 돌아왔다.
그런 그의 몰골은 누가 봐도 거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질끈 묶고 다니던 백발은 풀어 헤쳐져 있고, 얼굴에는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주웠는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으니, 오늘내일하는 늙은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덕누덕 기운 옷이 아니어도 말이다.
“오, 정신을 차렸느냐?”
“어르신, 숙부님에 대한 소식이 있나요?”
몸을 일으키려다 비틀거린 당혜미를 정호기가 부축했는데, 그녀의 시선은 현정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애석하게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구나. 하지만 잡혔다는 소식도 없으니, 일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꾸나.”
현정훈의 말을 들은 당혜미가 다시 눈물을 보였고, 그런 그녀의 어깨를 정호기가 안아 주자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안정이 됐느냐?”
동굴 밖에서 주변을 살피던 현정훈이 동굴을 나서는 정호기에게 물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에구, 불쌍한 것. 쯧쯧!”
혀를 차면서 동굴을 바라보던 현정훈이 정호기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놈들은 아직까지 만산에 있다고 합니까?”
“그래, 아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모양이다. 물론 이쪽으로도 넘어왔겠지만, 파천궁의 눈치를 보는지 대놓고 돌아다니지는 않는 것 같구나.”
정호기가 멀리 떨어진 만산을 바라보았다.
“아서라. 지금 너 혼자 그곳에 가서 무얼 한단 말이냐? 이대로 놈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정파에서 조치를 취하길 기다리자꾸나.”
“기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
“냉백을 죽이겠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실력으로 말이냐?”
그 말에 정호기가 현정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냉적을 죽였습니다. 냉백이라고 못 죽일 것은 없지요.”
“뭐? 냉적을?”
현정훈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예.”
“허어… 네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구나.”
“멍청한 놈이 방심한 덕이지요. 어쨌거나 당 대협의 생사도 궁금하고, 영 제와 나 제의 소식도 알아보려면 만산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냉백을 찾아, 그가 있다면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어르신께서는 당 소저와 함께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한자리에 있는 것은 좀 그렇지 않으냐?”
“하면 이동하실 때 개방에 전갈을 남겨 두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알았다, 그리하마. 그런데 꼭 가야겠느냐?”
“의제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신형을 날려 멀어지자, 현정훈이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
‘역시…….’
정호기는 숲에 들어와 누구와도 마주친 적이 없건만, 주변의 움직임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 사부가 없으니 남은 것은 나와 외조부님뿐. 그렇다고 소림에 계신 외조부님을 이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정호기는 흑룡문이 천수신의가 소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멍청한 나 때문에 사부가 죽었구나.’
울분이 치밀었다.
그리고 더 이상 숨어 다닐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얻었으니.
이제는 살육의 시간인 것이다.
“여기다!”
정호기를 발견한 마적이 목청껏 정호기의 등장을 알렸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곧이어 그의 비명이 만산에 울려 퍼졌으니까.
“아아악!”
한 번의 칼질로 팔이 날아갔다.
엉덩방아를 찧고 기다시피 뒤로 물러서려는 이의 다리를 발로 밟아 부러뜨려 버렸다.
죽는다고 소리치는 그의 다른 쪽 다리도 부숴 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한 손으로 땅을 긁으며 멀어지려는 그의 희망도, 정호기의 칼질에 붉은 피를 뿌리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좋구나.”
사지를 잃고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러 대는 마적의 등에 앉은 정호기는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그의 내부는 온통 붉은 너울처럼 살기로 가득했다.
주위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는 적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정호기가 몸을 일으켰다.
“피를 그리워하는 나도 나이니, 지금의 모습을 부정할 순 없지.”
가둬 두었던 야수를 우리에서 풀어 놓은 지금의 정호기는 열호아가 아닌 혈신이었다.
“우아아아아악!”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 정호기가 땅을 박차며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걱!
또 한 사람의 목을 벤 정호기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의 산과 피의 강.
백여 구의 시신 틈에서 정호기는 마음껏 혈향을 흡입하고 있었다.
“냉백!”
내공을 가득 담은 정호기의 목소리가 만산을 휘돌았다.
“언제까지 하찮은 마적의 뒤에서 숨어 있을 셈이냐! 냉적을 죽인 것이 바로 나다! 너도 사내라면 당당히 나타나 원수를 갚아라!”
만산 구석구석으로 퍼질 만큼 우렁찬 소리였지만, 끝내 냉백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수라파천대도, 나찰지옥도객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은밀한 살기를 풍기는 살수들과 돈에 팔린 마적이 전부였다.
지금 이곳엔 흑룡문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형!”
대신 반가운 얼굴이 그를 찾았다.
“초린아! 살아 있었구나!”
사실 가장 염려되었던 이가 바로 영초린이었다.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수들과 싸우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었으니까.
영초린에게 다가간 정호기가 그를 힘껏 안은 후에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멀리서 몰려오는 수십 명의 사람을 보면서 영초린이 말했다.
“아니, 난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
“당 대협과 상진이가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뭐? 그럼 가야지.”
태산처럼 버티고 있을 것 같았던 정호기가 당평과 나상진이 살아 있다는 말에 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 전에 잠시만…….”
말을 한 영초린이 품에서 자기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 들어있는 하얀 가루를 정호기의 몸 여기저기에 뿌렸다.
“이제 됐습니다. 가시지요.”
영초린이 앞장서고 뒤를 정호기가 따랐다.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며 그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지만, 이내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이들이 사방을 수색했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처참한 시체들이 전부였다.
***
“아까 뿌린 것은 무엇이냐?”
“사문 비전의 추종향을 중화시키는 약입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모두의 몸에 추종향이 뿌려진 것 같더군요. 아마도 적과 싸우는 와중에 그런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어떻게 알아냈느냐? 난 그저 심증만 있던 참이었는데.”
“처음 만난 살수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분명 발견할 수 없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제가 숨은 곳을 공격하더군요. 놈을 죽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중화제를 몸에 뿌렸지요. 그 뒤로는 저를 발견하지 못하더군요.”
“그래, 잘했다. 상진이와 당 대협은?”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대형을 찾아가는 길에 부상을 입고 도망치는 그들을 만나 숨겨 두었습니다. 그런 연후에 대형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초린으로 인해 당평과 나상진이 목숨을 구함 받은 것이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거나 놈들에게 사로잡혔으리라.
“이곳입니다.”
나무와 나무가 만나 은밀히 가려진 곳이었는데 그곳에 움푹 파인 곳이 있었고, 두 사람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대형!”
나상진이 정호기를 보자마자 뛰쳐나오더니 그를 안았다.
“혜미는, 혜미는 무사하오?”
그리고 당평은 절룩거리며 걸어오더니 정호기에게 당혜미의 안부부터 물었다.
“예, 무사합니다. 그러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지요.”
말을 한 정호기가 영초린에게 당혜미가 숨은 곳을 알려 주고는 먼저 가도록 했다.
“대형, 같이 가시지요.”
“아니다. 분명 놈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니, 내가 놈들을 유인하는 사이에 돌아가도록 해라. 더 이상의 희생은 원치 않으니까.”
그 말에 다른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희생이라니?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평의 물음에 정호기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당평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정호기가 신형을 날려 멀어졌기에 더 이상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