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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03화 (104/137)
  • 103화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그들의 움직임은 나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우연히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었던 것이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란 것을 이미 확인한 정호기였다.

    그가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마치 거대한 진이 움직이듯 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을 만들었으니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거대한 그물.’

    사람으로 만들어진 천라지망이라는 장벽을 정호기 자신의 눈으로 봤기에 저렇듯 무방비 상태로 있는 세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추종향을 나에게만 쓴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이곳에 있는 자체가 위험이 된다.’

    그렇다고 저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쉿!

    정호기가 빠르게 현정훈에게 다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조용히 하라는 전음을 보냈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저간의 사정이야 이곳을 벗어난 후에 들으면 그만이었다.

    정호기의 전음에 현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주위를 빠르게 살핀 정호기가 현정훈을 등에 업고 옷으로 묶은 후에 양팔로 진청운과 당혜미를 들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추종향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지만, 중간에 폭포라도 만나면 한 번 씻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추종향이라고 하여도 물에 닿으면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니까.

    ***

    ‘추종향은 사라졌을 것이다.’

    만산을 넘으면서 벌써 세 번이나 폭포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추종향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진청운의 시체를 더 이상 가지고 가는 것은 무리다.’

    당혜미의 상세도 심상치 않았기에 빨리 의원을 찾아봐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진청운의 시체를 메고 다닌다는 것은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와 시신을 수습해야겠지.’

    그의 머릿속으로 진수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호아를 이용해 땅을 판 정호기가 그곳에 진청운을 눕히고는 차갑게 식어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처음으로 그를 진정한 사부라 생각하여 부른 것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처음 정가장에 온 이후로 진청운은 그에게 많은 것을 베풀기만 하다 죽음을 맞았다.

    진청운의 시체에 큰절을 올린 정호기가 돌들을 주워서 시체 위에 놓고 흙을 덮은 다음, 다시 커다란 바위를 들어다 그 위에 얹었다. 혹시라도 야생동물이 파헤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꼭 당신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겠습니다.”

    다시 절을 한 정호기가 현정훈에게로 다가갔다.

    “견딜 만하십니까?”

    “아직은 견딜 만하구나. 그나저나 혜미의 상세가 심상치 않으니 어서 의원에게 보여야겠다.”

    가슴과 배에 깊은 상처를 입은 당혜미는 벌써 만 하루가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단전에 손을 가져다 댄 정호기가 자신의 내공을 그녀의 몸 안에 집어넣어 한 바퀴 돌리고는 현정훈을 업었다.

    “이제 어찌 된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금수 새끼의 멱을 딴 다음에…….”

    현정훈의 말을 요약하면, 만수지왕을 비롯한 마적들을 죽인 그가 정호기 등과 헤어졌던 곳으로 이동할 때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게 혜미의 비명 소리였지. 서둔다고 서둘렀지만, 진 대협은 구할 수가 없었다. 복면을 쓴 자에 의해서 이미 숨을 거둔 뒤였거든. 아무튼 그자가 혜미마저 죽이려는 찰나 내가 기습을 했다. 하지만 그자의 무공이 녹록치 않더구나. 기습을 통해 일장을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난 이 꼴이 되고, 놈을 죽일 수도 없었다. 놈이 부상을 입고 도망칠 때 겨우 진 대협의 시신과 혜미를 들쳐 안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단다.”

    “그자가 어떤 무기를 사용했습니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더구나. 한쪽은 날카로운 톱니가, 반대쪽에는 도신이 있는 짧은 무기였다.”

    ‘냉백은 아니다. 그럼 누굴까? 누가 있어 일장을 먹은 상태에서 개방의 장로인 이 늙은이를 패퇴시킬 수 있었을까?’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야제!’

    아마도 그이리라.

    ‘내가 아닌 사부님을 노린 것이구나.’

    속으로도 진청운이 아닌 사부라고 칭한 것은 그가 충분히 그런 자격이 있다는 마음에서였다.

    ‘사부님을 통해 가족의 행방을 알아내려 한 것일까?’

    정호기의 가족과 동시에 사라졌다 나타난 진청운은 그들에게 있어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었다.

    그를 잡는다면 정호기의 가족의 행방을 알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이번 일 전부가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냉적의 행동도 이해가 가는구나. 그놈은 그저 나를 붙들어 두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것이었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은 죽이면 안 되는 존재일 테니까.

    죽이려고 했다면 사로잡혔을 때 이미 죽일 기회가 넘치고도 넘쳤었다.

    ‘흑룡문을 탈출할 때 일부러 놓아준 것 같다는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아. 나를 확실하게 압박할 수단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내 주위사람을 이용하려 하겠지?’

    “어디로 갈 생각이냐?”

    “어차피 산을 넘었으니 산서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게 나을 것이다. 섬서로 통하는 길목은 놈들이 모두 지키고 있을 테니까.”

    ***

    “어떻습니까?”

    정호기의 물음에 늙수레한 의원이 혀를 찼다.

    “아니,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어찌 방치했단 말인가?”

    “사정이 있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몰래 납치해 온 것을 보면 당연히 사정이 있었겠지. 어디 보자, 침을 가져오긴 했을 텐데…….”

    자신의 보따리를 뒤적거리던 의원이 침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당혜미에게 놓았다.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으니, 몸을 보하는 약재도 같이 먹여야 하네. 내가 불러 주는 것들을 사다가 먹이도록 하시게.”

    그러면서 약재들의 이름을 읊어 주는 의원은 납치를 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침착했다.

    약재의 이름을 모두 들은 정호기가 의원의 마혈을 찍으려 할 때, 의원이 입을 열었다.

    “소저의 상태를 살펴야 하니, 될 수 있으면 목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게나.”

    그 말을 들은 정호기가 혈도를 조정해 목 아래만 움직일 수 없게 하고는 동굴을 떠났다.

    “익숙하신가 보오?”

    현정훈이 묻자 의원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바로 산서외다. 파천궁의 세력권이지요. 이놈들이 치료비를 주면 벼락이라도 맞는지 하나같이 데려다 치료만 하라 하고는 고맙단 말도 없이 쫓아 버리더이다. 그나마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요.”

    “우리에게 그런 얘기를 해도 되오?”

    “척 보니 파천궁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맞소이다.”

    “요 며칠 만산이 시끄러웠다고 하던데, 댁들을 잡으려고 그런 모양이었군요.”

    “…….”

    “뭐,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댁들을 찾으려면 의원을 찾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제가 사라진 것도 알게 될 테지요. 그럼 전 그놈들에게 친절히 여러분을 어디서 봤고 어떤 치료를 했는지 술술 말할 생각이니까요.”

    의원의 말을 들은 현정훈이 고소를 지었다.

    “댁의 입장에서는 비밀을 지킨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서너 번 납치를 당했을 때는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비밀을 지키려다 보니 내 몸만 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납치한 놈들은 어차피 내가 비밀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더군요. 그래서 대놓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죽일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가 보오?”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이제 구차한 구걸 따위는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럼 차라리 산서를 떠나지, 왜 아직까지 이곳에 붙어 있는 것이오?”

    “고향이니 그렇지요. 늘그막에 떠나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인데, 비명횡사를 하더라도 고향에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고향이라…….”

    의원의 말을 들은 현정훈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지요, 수구초심이라. 나도 이 나이가 되니 고향이 그립긴 하더군요.”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객지가 아무리 좋아도 나고 자란 곳만큼은 아니니까요.”

    말을 마친 의원이 당혜미를 바라보았는데, 상세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어떨 것 같소?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노인장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입니까?”

    “나도 저 아이를 공격한 놈에게 당했소.”

    그 말을 들은 의원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보아하니 상당한 고수일 것 같은데, 상대가 무슨 괴물이라도 된 것입니까?”

    “내가 고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오?”

    “이래 봬도 산서에서 이십여 년을 굴러먹은 놈입니다. 게다가 무림인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치고 고수가 아닌 이들을 본 적이 없었지요. 게다가 노인장의 상처도 이 소저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것인데 그리 멀쩡하시니, 고수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의원이 다시 당혜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이리저리 한참을 살피는 것이 직업 정신이 무척이나 투철한 것 같았다.

    “허허허, 환자에게는 철저하시군요.”

    “환자에게 집중할수록 멀쩡하게 풀려날 확률이 높더군요. 그래서 납치당하면 내 가족이라 생각하며 환자를 살핀답니다.”

    그때 정호기가 약재를 사서 돌아왔고, 의원이 그것을 이용해 약을 만들어 당혜미에게 먹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같소이다.”

    그 말에 정호기가 마혈을 찍으려 하자 의원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지간하면 내 의원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 데려다 주구려. 나이가 나인지라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의원을 그가 있던 곳과 가까운 곳까지 데려간 정호기가 치료비를 주고 돌아서려 할 때, 의원이 잠시 망설이다가 정호기를 불렀다.

    “이보시게, 소협.”

    “예.”

    “내가 수십 년을 다친 사람을 치료하면서 상처를 좀 볼 줄 아는데,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것이 있어서 그러네.”

    “무엇이 말입니까?”

    “에… 그러니까…….”

    의원이 말을 할수록 정호기의 얼굴은 점점 굳어만 갔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는 것 같으이.”

    “어째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까?”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는 법이잖은가. 만약 소협이 치료비만 안 줬어도 말하지 않았을 거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목숨도 살려 주고 돈까지 준 자네에게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의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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