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저곳!’
두 번의 독장으로 인해서 그곳에는 수라파천대원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당평은 그곳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 소협, 내가 신호를 하면 우측의 공간을 향해 뛰도록 하게. 알았나?
-알겠습니다.
나상진도 아까 무리를 한 탓에 슬슬 내력이 부족한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이 마지막이란 각오로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 하고 있었다.
-지금이네!
당평의 말이 들리자마자 나상진이 독장이 뿌려진 곳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됐다!’
그의 앞에는 뻥 뚫린 공간이 존재했고, 앞을 막아서는 이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그만 따돌리거나 제거할 수 있으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앞에 있는 적을 향해 독문절기인 귀령보법을 펼치려는 찰나, 뒤쪽에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운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을 했다.
“당 대협!”
절규에 가까운 외침.
그도 그럴 것이, 당평이 가슴을 길게 베인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서 십여 명의 수라파천대원이 일제히 도를 내리찍고 있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상진은 딛고 있는 발이 아니라 앞으로 뻗었던 다리에 내력을 실었다.
늦었을지 몰라도 당평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는 것이었다.
***
쾅!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일까?
당평을 공격하려던 수라파천대원들이 일제히 뒤로 튕겨져 나갔는데, 그들의 몸은 마치 잘 드는 작두로 썰어 놓은 것처럼 예리하게 잘려져 있었다.
“대형!”
나상진은 거대한 도를 들고 천신처럼 주위를 훑어보고 있는 정호기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짝짝짝.
어울리지 않는 박수 소리에 나상진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까 자신이 뚫고자 했던 길을 막고 있던 복면인이 박수를 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놀라운 한 수로구나. 네놈이 정호기가 맞느냐?”
복면인의 질문을 받았지만, 정호기는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 대협의 상세는?”
“나, 난 괜찮네.”
나상진이 지혈을 한 후에 어깨를 부축해 일으켰는데 가슴뿐만이 아니라 다리와 옆구리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이, 혼자 힘으로는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았다.
“얌전히 잡힌다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물론 네놈의 동료들의 안전도 책…….”
“아가리 다물어라, 냉적.”
냉적.
수라파천대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자 냉백의 사촌 형이었다.
그가 냉적이라는 말에 나상진이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만일 아까 그대로 몸을 날렸다면 자신이 오히려 죽음을 당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냉백은 어디 있지?”
“싸가지가 없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뭐, 그거야 사지를 잘라 내고 천천히 길들이면 될 일이니 상관없겠지.”
말을 마친 냉적이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흥!”
콧방귀를 뀐 정호기가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도를 향해 호아를 휘둘렀다.
쨍!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수라파천대원의 도가 공격하던 이의 몸과 함께 사선으로 잘렸다.
-좌측으로 뛰어!
나상진에게 전음을 보낸 정호기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도를 발로 차 냉적에게 보내고는, 자신은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하압!”
호아가 머리 위로 들렸다 떨어지는 한 수에 수십 개의 경력이 앞으로 쏘아지더니, 그 자리를 미처 피하지 못한 수라파천대원들의 몸을 난자했다.
마치 당평이 유성우를 시전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잘린 시신들의 단면이 매끄러울 정도로 정호기의 공격은 파괴력과 함께 예리함도 갖추고 있어, 더욱 무섭다고 할 수 있었다.
-당 대협의 목숨은 네게 달려 있으니 절대 멈추지 마라.
나상진을 쫓아 포위망을 벗어난 정호기가 전음을 보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달려오는 수라파천대원들을 기다렸다.
“와라!”
도를 내려뜨리고 그들을 기다리던 정호기를 향해 하늘에서 떨어지며 공격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냉적이었다.
그리고 수라파천대원들은 좌우로 갈라지며 정호기를 그냥 지나쳐 당평과 나상진을 쫓으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정호기가 다리에 내공을 모으더니 강하게 내리찍었다.
쾅!
정호기의 다리에서 뿜어져 나온 경력이 땅을 터뜨리며 좌우로 파도처럼 쏘아졌다.
채채채챙!
냉적의 도와 호아가 어울리는 사이 정호기의 공격으로 인해 잠시 멈칫했던 수라파천대원들이 나상진을 다시 쫓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추격을 포기할 법도 하련만, 수라파천대원들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는 듯이 나상진이 도망친 방향으로 정확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냉적의 도를 강하게 후려친 연후에 짧은 시간 동안 뒤를 바라본 정호기는, 망설임도 없이 우측으로 신형을 꺾는 수라파천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저렇게 빨리 흔적을 찾아냈나?’
당평이 피를 흘리고 있었기에 그것을 단서로 움직인다고 해도 최소한 누군가는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확인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련만, 그런 것도 없었다.
‘뭔가 잘못됐어.’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이 자신과 일행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놈만 해도 그래.’
냉적의 공격은 매섭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결정적인 것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끌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가?’
원군을 기다릴 것이라면 차라리 수라파천대원들이 남아 있는 것이 더 좋았으리라.
‘냉백을 기다린다고 해도 이런 여유 있는 표정은 뭐지?’
뭐가 되었든 지금의 상황이 적이 바라던 것이라면, 그것을 깨부수기로 했다.
‘그 첫 시작으로 네놈의 목숨을 가져가 주겠다.’
호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으며 경기를 발산했지만, 냉적은 거리를 두면서 정호기를 상대했기에 유유히 그것을 피하고는 옆에서 정호기의 몸을 찔러 왔다.
그런 냉적의 도를 향해 손을 뻗는 정호기의 행동은 어찌 보면 무모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히 냉적의 도에는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석도 잘라 버릴 예기가 느껴지는 도에 맨손을 뻗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냉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찔러 가는 도에 더욱 내공을 집어넣었다.
그때 정호기의 손이 갑자기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물들었는데, 일렁이는 아지랑이로 인해 진짜 불이라도 난 것 같은 그 모습은 용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설마… 화룡아(火龍牙)!”
냉적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어찌 저 무공을 모르겠는가?
바로 냉가의 대표적인 수공이었고, 대성을 이루면 저처럼 아지랑이와 함께 손에서 화룡의 형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효능은…….
카칵!
냉적의 도와 정호기의 손이 만난 곳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화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냉적의 도를 물고 있는 것처럼 정호기의 손이 도를 붙들고 있었다.
“크아악!”
이제까지 그 누가 지른 비명보다 커다란 비명이 냉적의 입에서 터져 나왔는데, 정호기가 도로 그의 팔을 팔꿈치 부근에서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잘 가라.”
[문주님, 보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냉적이 자신의 딸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었다.
과거 혈신이었을 당시, 부인들 중의 한 명이 냉적의 딸이었고 그는 장인이었다.
서걱!
다시 호아가 휘둘러지자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린 그대로 냉적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어느새 정호기의 손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막대한 내력을 소모하는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내내 펼칠 수만 있다면 도산검림에서도 무서울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최대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펼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펼칠 수도 없었을 정도로 난해한 무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화룡아였다.
‘믿는다.’
정호기는 나상진이 도망친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불안한 느낌은 어서 진청운을 찾으라고 외치고 있었기에 자신의 감을 따르기로 했다.
나상진이 간 곳을 한 번 바라보고 땅을 구른 정호기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
정호기가 은밀히 진청운과 당혜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역시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산세를 살피던 정호기는 어느새 만산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완전히 적막에 휩싸인 것은 아니고,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기척은 있었지만 싸움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들릴 비명이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당했단 말인가?’
만수지왕과 마적들을 처리하겠다던 현정훈도, 살수들을 맡은 영초린도, 부상을 당해 도망친 나상진과 당평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무사히 도망쳤을 수도 있다. 분주한 저들의 움직임이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행태로 봐서 저들은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빽빽한 포위망을 형성하듯이 매우 규칙적으로 움지이고 있었기에, 정호기도 자신의 생각이 그저 바람일 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내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지?’
다른 무공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야행술도 영초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정호기였다.
그런데도 저들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행적을 따라오고 있었다.
‘추종향을 묻혔나?’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정호기는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추종향을 묻힌 기억이 없었다.
‘넓게 살포했다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을 테니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어떻게 추종향을 뿌렸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자신과 일행을 추적할 방법이 있는 셈이었고, 그렇다면 모두들 목숨을 잃었거나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할까?’
진청운이 잡혔다는 가정을 한다면 서둘러 천추산으로 달려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저들이 진청운에게서 가족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전에 대피를 시켜야 하니까.
‘일단 주위를 돌아보며 확인을 해 보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본 정호기가 한 곳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
***
‘함정인가?’
피범벅이 된 진청운과 당혜미, 그리고 현정훈이 바위 뒤에 앉아 있었는데, 현정훈만이 가끔 신음 소리를 낼 뿐 나머지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
움직임이 있는 현정훈과 심장 소리가 들리는 당혜미는 무사한 것 같았지만, 진청운에게서는 어떤 생명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