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때 다음과 같은 명도 같이 내려 주세요. 가게는 문을 닫되, 일문과 성문에서 원하는 이들은 가게에 가서 즐길 수 있게 하겠다고요. 물론 그 재정적 부담은 우리 월문에서 지는 것으로 하고요.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분명 일문과 성문은 문주의 위를 두고 경쟁하는 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할 거예요.”
“알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잔치를 벌이도록 하마.”
일월문주가 여는 잔치에 초대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일문과 성문에서 요직을 담당하는 이들일 터이니, 그들이 일시에 죽어 버린다면 거사는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일월문주가 실패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그날 초대된 이들이 무사하다면 월문이 패배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염려 말거라.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마무리는 제가…….”
“아니, 내가 하마.”
“알겠어요.”
대답을 한 유옥접이 일월문주의 손을 꼭 잡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하다니.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해 네게 짐을 지워 준 것 같구나.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그럼 전 다른 자매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어요.”
“그러도록 해라.”
유옥접이 석실을 나선 후, 일월문주는 그곳에서 한동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지아비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들도 자신의 뜻을 이해해 주고 고통 받는 여인들을 가련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배신감뿐이었다.
성문의 요직에 앉아 호시탐탐 문주의 위를 노리는 이들 중에는 아들도 있었으니까.
***
“서쪽으로는 이동을 삼가 주십시오. 그리고 놈들이 만산에 진입하면 저희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시고요. 그쪽에 작은 장난을 쳐 놨으니 잘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평의 말을 들으며 일행은 당평과 당혜미가 괜히 주위를 둘러본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서쪽? 설마 그곳에 독을 풀어 놓았나?’
정호기가 냉백을 따로 유인하려고 생각해 둔 곳도 서쪽에 있었다.
“저기 보이는 능선이 바로 그곳입니다.”
당평이 가리키는 곳을 본 정호기가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그곳이군.’
자신이 예상한 곳에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냉백만 따로 유인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거기다 독까지.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현정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당 대협,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현정훈의 말에 따르면 짧은 시간 동안 정호기에 대한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예? 제가 뭘 했다고요?”
“자네가 했다는 것이 아니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제가 장의 재산을 차지하고자 부모님을 죽이고 동생을 생매장했다니요? 그것도 모자라 그 광경을 목격한 적화방주의 아들들을 죽여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런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적화방주의 아들들이 시체로 발견되었고, 너는 황급히 장을 정리한 후에 모습을 감췄다. 그럼 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현정훈의 말에 당평이 의문을 표했다.
“그나저나 그런 소문을 퍼뜨리다니, 의외로군요. 우린 그들이 정 소협을 화산이나 종남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문은 오히려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뿐이니 아무래도 우리의 예측이 틀린 모양입니다.”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호기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작전을 수정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진청운의 말에 당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이제와 저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일까요?”
“호기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장주님 내외분은 모두 생존해 계시고, 그것을 소림이 알고 있으니까요.”
“아, 천수신의께서 소림으로 가셨다고 알고 있는데, 정가장주께서도 같이 계신 것입니까?”
현정훈의 말에 진청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디에 계시더라도 이런 소문을 듣지는 마셔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혹시라도 소문을 반박하고자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흑룡문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소문을 듣지는 못하실 겁니다. 워낙 깊은 곳에 계시고, 절대 나오지 말라고 당부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 현 대협. 제가 저쪽 능선에 장난을 좀 쳐 놨으니, 그곳에 가시는 것은 삼가 주십시오.”
당평의 말에 현정훈이 서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놈들을 저곳으로 유인할 것입니까?”
“예. 제 계획대로 된다면 놈들의 상당 부분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 대협이 계시단 것을 알고 있는데 대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대비한다고 해도 잠시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고, 그 정도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평은 자신이 쳐 놓은 함정에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현 대협, 놈들은 어디까지 온 것입니까?”
당평의 질문에 현정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이상합니다. 분명 섬서에 들어온 흔적도 없는데, 중경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예?”
“아마도 놈들이 흩어져서 이미 섬서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지만, 어디로 갔는지도 알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허어… 그렇다면 놈들이 벌써 근처에 왔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일대에 방도들이 쫙 깔렸으니, 수상한 인물들이나 이곳을 목표로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면 반드시 걸려들었을 것이니까요.”
현정훈은 자신하고 있었지만, 냉백이나 그가 거느린 수하들의 수준을 감안해 볼 때 개방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고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개개인으로 흩어져 이동한다면 어찌 찾아낼 수 있겠는가?
“방도들에게 지시를 내려놨으니 지금은 뭔가를 찾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가 다시 한 번 갔다 오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수고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말을 마친 현정훈은 바로 몸을 날려 산 아래로 사라졌다.
“어르신이 아닌 것 같아요.”
너무도 진지한 태도와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그의 행동은 이제까지의 그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혜미, 네 말마따나 정말 사람이 너무도 변했구나.”
“그렇게 충격이었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고개를 흔든 당평이 진청운을 바라보았다.
“진 대협, 놈들이 흩어졌을 수도 있다니 경계를 보다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예, 조를 짜서 정기적으로 순찰을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결국 정호기는 당혜미와 한 조가 되었다.
***
-정 소협?
-예?
-정 소협께서는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당혜미의 질문을 받은 정호기는 난감했다.
-글쎄요… 그건 흑룡문에서 결정해야 할 상황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결론을 내리더라도 그쪽에서 반응하는 것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일단 사태의 주도권이 흑룡문에 있다는 말이었다.
-진짜 사부님이란 분은 어떤 분인가요?
천수신의가 소림에 말한 내용은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전서로 전달되었기에 사천당가와 개방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것에 관한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자 열심히 움직이는 실정이고.
-제게 있어 커다란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이시지요. 철없던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 주신 분이니까요.
전방을 주시하던 당혜미가 정호기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정 소협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바랐던 대로는 흘러가지 않는군요.
-어떤 것을 바라셨는데요?
-외조부님의 말씀을 듣고 각 문파에서 조사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제 말을 어느 정도는 믿는다는 것인데, 어째서 정파는 그것을 쉬쉬하면서 수면 위로 끄집어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러다가 흑룡문이 이빨을 드러낸 후에야 후회한다면 무슨 소용인가요?
그동안 묻고 싶었지만 참아 왔던 것을 기회가 오자 당혜미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 소협이나 천수신의 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니 그렇겠지요. 현허 대사께서 소림의 방장께 말을 했기에 그나마 각 문파로 전서가 날았다 알고 있어요.
천수신의의 친구이자 무학의 사부가 될 뻔했던 현허 대사가 이번 일에 손수 나선 모양이었다.
‘물론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도 미온한 반응들이 아닌가?’
정호기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증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더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미 정호기가 세웠던 모든 계획이 틀어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파에서 나서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정호기의 눈에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왔다!’
서서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기감을 넓혀 가자 어둠 속에서 은밀히 자신들에게로 접근하는 기운을 잡아낼 수 있었다.
‘십 장.’
어느새 십 장의 거리까지 다가온 불청객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당 소저, 아무래도 적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올 것이니 이 자리에서 꼼짝 말고 계십시오.
말을 한 정호기가 은밀한 움직임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더니 적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이놈뿐이군.’
주위를 살폈지만, 더 이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잡고 보자.’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정호기가 막 바닥에 누워 있는 적의 등을 찔러 갈 때, 그를 노리고 땅에서 불쑥 검이 솟구쳤다.
‘둘?’
분명 그가 느낀 것은 하나였다.
그런데 어찌 두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자신을 속일 정도의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은 대단한 위기라 할 수 있었다.
‘아니, 하나다!’
땅에서 공격하고 있음에도 엎드려 있는 이는 미동조차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 놓은 인형 같았다.
팅!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겨 낸 정호기가 적의 모가지를 움켜쥔 후, 재빠르게 마혈을 찍고 바닥에 있는 정체 모를 형체를 발로 밟았다.
퍽.
소음과 함께 푹 꺼지며 옷 속을 채운 솜이 그 모습을 보였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습격할 것을 대비해 인형을 준비하고 밑에 숨다니. 예사 놈이 아니구나.’
그 모든 것이 정호기가 눈치 못 챌 정도로 빠르게 이뤄졌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복면인의 실력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분명 마혈을 찍었음에도 늦었는지, 복면이 붉게 물들며 사지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독을 삼킨 것이리라.
‘내게 완전히 잡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그만큼 훈련이 잘되었다는 것이고 조직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다는 건데… 어디 소속일까?’
흑룡문에도 살수 집단은 있었지만, 그들인지는 확신이 없었다.
‘일단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