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99화 (100/137)
  • 99화

    당평과 당혜미가 떠나고 나자 그 자리에는 정호기와 영초린, 나상진, 진청운만이 남았다.

    -사부님, 저는 이곳에서 할 수만 있다면 냉백을 죽이고자 합니다.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진청운이 고개를 저었다.

    -무모한 일이다. 수라파천대만 해도 그 무력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거기다 나찰십팔도객까지 더해졌으니 그들만으로도 어지간한 문파는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뚫고 냉백을 죽일 수 있다고 보느냐? 만산의 지형을 이용해 최대한 놈들을 깊숙이 끌어들여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역시나 진청운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깨달음을 얻어 일대 일로 싸울 수만 있다면 냉백에게 지지 않을 자신도 있습니다.

    -무모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만일 네가 잘못되면 내가 무슨 낯으로 장주님을 뵐 수 있단 말이냐? 네 목숨에 내 목숨도 걸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이거 괜히 말했나 보군.’

    냉백을 유인하려면 진청운의 도움도 필요했기에 말을 꺼낸 것인데,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정호기는 말한 것을 후회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러나 정호기는 절대 자신의 계획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초린이와 상진이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구나.’

    냉백만 따로 떨어지게 한다면 분명 방법이 있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도 알고 있었다.

    ‘내가 당했던 그대로 하면 분명 걸려들 것이다.’

    이곳에서 정호기는 화산 문도들의 함정에 걸려 수하들과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화산 문도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었는데, 정호기를 따로 떨어뜨리면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냉백, 기다려라!’

    ***

    정호기가 만산에 도착할 무렵, 유옥접도 자신이 목적한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유옥접의 인사를 받은 일월문주가 주위를 물렸다.

    “어쩐 일이냐?”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

    굳은 유옥접의 표정을 본 일월문주가 그녀를 데리고 비밀 통로를 통해 작은 석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듯 연락도 없이 온 것이냐? 일문과 성문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그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어머니, 이제 그만 우리 일월문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의 일월문은 일월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머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뒤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그 결과로 불행에 빠진 여인들이 어쩔 수 없이 월문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디 우리 일월문은 그런 여인들을 지키고자 만들어졌지, 그런 여인들을 양산해 품고자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일문과 성문이 힘을 합치면 월문보다 강하였기에 섣불리 일을 추진하다가는 월문은 사라지고 그저 힘없는 기녀만 남게 될 수도 있었다.

    “그만! 너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고 하는 것이냐?”

    “왜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일문이나 성문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어서 떠나도록 하여라. 네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마.”

    “어머니!”

    “문주라 불러라!”

    일월문주의 태도는 강경했다.

    “정 바꾸고 싶으면 네가 문주의 자리에 올라 시도해 보도록 해라. 하지만 내가 문주로 있는 한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일월문주의 뒤에서 유옥접이 절규했다.

    “언제까지 일문과 성문의 행패를 눈감아 주실 겁니까! 그들이 우리 월문을 뭐라 부르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노리개가 아닙니다! 일월문의 주인은 바로 우리, 월문의 여인들이란 말입니다!”

    성노(性奴).

    월문의 기녀들은 일문과 성문의 사내들이 원하면 치마를 벗어야 했다.

    물론 지위가 낮은 기녀들에 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월문에 있어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일월문이 만들어진 목적이 그런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내부에서마저 그녀들을 학대하고 있었기에 유옥접은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잔 말이냐? 지금 일문·성문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예 월문의 자매들을 모두 죽일 셈이냐? 진정 성노가 되어 그들에게 돈을 벌어 주는 비참한 삶을 안겨 주겠다는 것이냐?”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긴단 말이냐?”

    “정을 끊으면 됩니다! 일문과 성문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매들을 버리면 됩니다! 마음을 버리면 됩니다! 몸을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독기가 철철 흐르는 유옥접의 눈빛을 보면서 일월문주는 그녀가 작심을 하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문에는 네 아버지도 있다.”

    “제가 하겠습니다!”

    “성문에는 네 동생도 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유옥접의 눈을 바라보며 일월문주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들에게 마음을 준 월문의 자매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지아비가 있고 아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일문이고 성문이었다.

    그것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일월문주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제가… 제가 하겠어요!”

    대답하는 유옥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일월문주의 눈에서도 마찬가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준비를 마친 모양이구나.”

    “같은 뜻을 지닌 자매들이 있습니다.”

    일월문주가 손을 내밀어 유옥접의 얼굴을 만졌다.

    “접아.”

    “…….”

    “내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느냐?”

    드디어 일월문주의 입에서 유옥접이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옥접에게 패륜의 굴레를 씌우지 않기 위한 일월문주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나 확고한 유옥접이 문주가 된다면, 그녀가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인 자신을 죽여야 했으니까.

    “어머니께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으로 일문과 성문에 휴식을 주세요. 최대한 사람들을 모두 모으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외부로 나간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중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여파가 작아지겠죠.”

    굳이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일월문주는 유옥접이 어떻게 일을 진행시키려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명이나 포섭을 했느냐?”

    “삼 할이에요.”

    “삼 할… 적은 숫자구나.”

    “그래요. 그렇지만 어떤 누구보다도 많은 숫자이기도 하지요. 그 안에는 사봉(四鳳)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사봉은 일월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녀들이?”

    “예. 일문과 성문의 인물들 중에서 그녀들의 초대를 누가 있어 거부할까요?”

    “그래, 그렇겠지.”

    “삼 할이지만 능히 십 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매들만 포섭을 했으니, 남은 것은 일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승산이 있다고 봐요.”

    “다른 자매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녀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일월문주 자신처럼 일문과 성문에 지아비나 자식, 정인을 둔 여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썩은 가지는 쳐 내야지요. 말씀드렸잖아요. 전부를 버릴 수 있어야 전부를 얻을 수 있다고요.”

    “…….”

    “내부적으로 빨리 안정을 찾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이었고, 커다란 혼란이 일월문을 덮칠 것이었다.

    만일 빠르게 안정을 찾지 못한다면 자칫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일월문이 휘청거릴 수 있었다.

    기루나 객점, 주점과 같은 곳은 노리는 곳이 많았으니까.

    “제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일이 끝났을 때 우리 문의 전체 세력 중에서 사 할은 줄어들게 될 테지만, 그만큼 강한 결속력이 생길 것이고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가만히 유옥접을 바라보던 일월문주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분명 너는 그 계획을 문주가 된 이후에 행하려 했을 것인데… 혹시 문주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는 것이냐?”

    “문주가 되 든 안 되든 결행하려던 계획이었어요. 다만 지금이 시기적으로 적절한 것 같아 서두르려는 것뿐이지요.”

    “시기적으로 적절하다니?”

    “지금 무림은 폭풍전야라고 할 수 있어요. 곧 거대한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지요. 그 전에 미리 내실을 다져 두지 않으면 외풍에 쓰러질 수도 있어요.”

    “정 소협 때문은 아니고? 그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더냐?”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제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들이 절정에 달했다는 생각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에요.”

    “그러나 네가 정 소협을 돕게 된다면, 일을 성공한다고 해도 문도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라.”

    “당연히 생각하고 있어요. 오히려 제가 내린 이 결정으로 인해서 정 가가와 맺어지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겠어요.”

    “정 가가라…….”

    일월문주의 말을 듣고 유옥접이 흠칫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맺어지기 위해선 문도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잔인한 선택을 강요한 제가, 저 하나만의 행복을 좇을 생각은 없어요.”

    일월문주는 세상살이가 돌고 도는 수레바퀴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일월문을 만든 사조님도 고통 받는 여인들을 남자들에게서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분은 그 대가로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지.’

    지금의 유옥접도 비슷한 맥락의 일념으로 일월문을 재정비하려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사랑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닷새 후가 우리 문에 있어서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란 것을 알고 지금 찾아온 것이겠지?”

    “…….”

    “그렇겠지. 그때가 아니면 문도들을 쉬게 할 명분을 찾기란 쉽지 않으니까. 알았다.”

    닷새 후는 일월문이 만들어진 날이었고, 그날을 기점으로 사흘간 모두가 일을 멈추고 초대 문주였던 봉황신녀를 기렸었다.

    그러던 것이 일문과 성문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일을 쉬는 대신에 아침과 저녁, 두 번에 걸쳐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선조를 기리는 것도 좋지만, 사흘을 쉬면 문이 입는 손실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맞습니다. 그런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쉬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날 모두 휴식을 취하고자 한 것은 남자들에게 웃음과 몸을 파는 문도들에게 몸을 추스를 시간을 주고자 만든 것이었다.

    일 년에 단 사흘만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라는 배려였는데, 그것이 일문과 성문에 의해서 변질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