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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98화 (99/137)

98화

“만산(萬山)! 만산으로 들어가려는구나!”

만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하여 만산으로 불리는 그곳은 산서와 섬서의 경계에 자리하였는데, 산세가 험하고 산맥이 길게 뻗어 있어 전문적인 약초꾼들조차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예. 그곳만큼 시간을 때우기 좋은 곳이 없지 않습니까?”

만산은 정호기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곳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화산의 종자들이 그곳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근 오십여 일을 그곳에서 헤매고 다녔었지.’

방은진에게 농락당했다 생각한 정호기는 화산에 대한 살기가 하늘을 찔렀기에 씨를 말려 버린단 생각으로 근 두 달여를 그들만 쫓았었다.

그리고 그중 오십여 일을 보낸 곳이 바로 만산이었다.

“놈들이 다른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우리를 쫓아 만산으로 오게 될 것이고, 동선이 길어진 만큼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그럼 개방에서도 정보를 알아내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밀히 움직여서야 놈들이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겠느냐?”

“미행하는 놈들이 있을 것이지만, 정 미덥지 않으면 확실한 족적을 남겨 주면 되겠지요.”

“족적?”

“예. 영웅회의 결성 취지에 맞는 족적을 말입니다.”

***

객점의 별원을 빌린 정호기 일행은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그중 단 한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어르신은 도대체 어디까지 정보를 얻으러 가셨기에 아직도 오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정호기의 말에 당평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오자마자 분타에 다녀오시라고 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모양이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행길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몸을 씻으며 휴식을 취했지만, 현정훈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만산이 코앞입니다. 더 이상 정보도 얻을 수 없으니 수고하실 일도 없겠지요. 그런저런 사정을 알리고 추풍검의 동향을 확실하게 알아 오려면 현 대협이 갈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분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마도 늦으시는 이유는 뭔가 중요한 정보가 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청운이 현정훈을 두둔하는 말을 했지만, 이내 그는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야 했다.

“에라이, 염병할 세상!”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는 대번에 현정훈의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엔 개 다리 한 쪽을 든 현정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봐라! 내 이럴 줄 알았다! 늙은이는 정보나 캐 오라고 보내 놓고는 지들끼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먹어! 딸꾹. 에라이, 빌어먹을 것들아!”

현정훈의 말마따나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손을 댄 이는 없었다.

현정훈을 기다리느라 그러한 것인데, 정작 당사자인 현정훈은 고주망태가 되어 나타났으니 일행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허허, 현 대협, 술이 좀 과하셨나 봅니다.”

당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현정훈에게로 다가가며 말을 했다.

“닥쳐!”

그 말에 당평의 몸이 정지했다.

“내가 당가가 무서워서 당신에게 설설 긴 줄 알았어? 흥! 웃기지 말란 말이야. 내 말 한마디면 당 가주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고. 알아? 설설 기어야 할 것은 당평 당신이야!”

당평에게 한바탕 쏟아 부은 현정훈이 이번에는 당혜미를 바라보았다.

“너! 그까짓 개새끼 한 마리 때문에 감히 이 어르신의 똥구멍을 찢어 놓으려고 들어? 딱 두 번 깨물었다. 그랬더니 달랑 뼈다귀밖에 안 남더라. 딸꾹! 입맛만 버리게 한 개새끼보다 내 똥구멍이 백배는 더 소중해! 알았냐? 응? 알아들었냐고!”

당혜미에게 맺힌 것을 푼 현정훈이 다음 먹잇감을 물색하려고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 이것들이 모두 어디로 튄 거야? 나와! 나오지 못해!”

소리소리 지른 현정훈이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직접 찾아가려는 듯 한 걸음을 뗐을 때 일이 벌어졌다.

“응? 왜 이러지?”

살살 아파 오는 아랫배.

두 번째 걸음을 떼려고 할 때 항문에 힘이 풀렸고, 발바닥이 떨어지는 찰나 배 속에 든 걸쭉한 것들이 고약한 냄새와 함께 쏟아졌다.

“어? 어?”

쨍그랑!

현정훈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이 바닥에 부딪치며 깨졌는데, 그는 여전히 ‘어’ 소리만 내며 눈을 뒤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드르렁, 피유~”

코를 골며 잠에 빠진 현정훈이었고, 그런 그의 엉덩이에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와 그의 바지와 바닥을 요상한 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꺄악!”

다음 날 아침, 고요하던 평화는 당혜미의 높고 고운 비명 소리와 함께 깨졌는데, 내공이라도 실었는지 비명 소리 한 번에 전각이 흔들릴 정도였다.

가히 음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비명이었고, 당연히 그 비명 소리를 지척에서 들은 현정훈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응? 뭐야? 아침부터 왜 이리 시끄러워?”

눈을 뜬 현정훈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혜미와 그녀의 뒤에서 마찬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일행이었다.

“왜…….”

말을 하려던 현정훈은 자신의 엉덩이 쪽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과 기분 나쁜 느낌에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연기가 꺼지듯 그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젖은 바닥과 불쾌한 냄새만이 공중을 떠돌며 그가 머물렀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

“어르신, 좀 천천히 가시지요!”

뒤에서 정호기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현정훈은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만산 아래에 있는 사파인 불한당을 궤멸시키자는 것이었지만, 현정훈이 워낙 독특한 족적을 남겼고 그것을 치우기 위해 동원된 객점의 점소이들에게 확실한 기억을 심어 주었기에 더 이상의 행동은 불필요하다는 결론 하에 만산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요기나 하고 가겠습니다. 어르신, 이리 오시지요.”

밥을 먹고 가겠단 말에도 현정훈은 일행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르신,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너무한 것도 있었고, 거기다 술 드시고 하신 실수일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저희만 입 꾹 다물면 누가 알겠습니까?”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아, 혹시 제 말이 협박으로 들리셨습니까?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개방 장로이신 어르신이 술 드시고 똥을 한 무더기 싼 채 잠이 들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어르신 같은 고수가 말입니다. 당 대협께서 말씀을 하신다면 몰라도.”

마지막 말이 비수가 되어 현정훈의 가슴을 찔렀을 것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황.

당평과 당혜미가 의심스럽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어르신, 그만 오시라니까요. 어제 당가가 어르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말 한마디면 당가 따위는 끝장이 난다고 당 대협께 말씀하신 것도 기억 속에서 지우겠습니다.”

정호기의 목소리에는 장난끼가 다분했다.

현정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당 소저께 개새끼, 소새끼 욕하신 것과 언젠간 잡아먹겠다느니 하는 협박을 한 것도 저와 일행의 기억 속에는 벌써 지워지고 없답니다.”

지워졌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언제! 흠흠…….”

결국 듣다 못한 현정훈이 폭발을 했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당 대협과 혜미에게 뭔가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분명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너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으면서 어찌 그리 함부로 말을 하는 거냐?”

말을 마친 현정훈이 당평과 당혜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간중간 떠오르는 것을 종합해 보면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늦게나마 사죄드립니다.”

“아닙니다. 전 벌써 잊었으니, 이리 와서 같이 요기나 하시지요. 현 대협 것은 제가 특별히 오리 고기를 넣어 만들라 해서 챙겼습니다.”

객점에서 싸 준 전병을 건네는 당평의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풍모가 가히 대인 같았다.

“제 허물을 감싸 주신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말을 마친 현정훈이 향한 곳은 전병을 들고 있는 당평이 아니라 막 자신의 전병을 한 입 깨문 정호기가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과음을 한 탓인지 고기가 당기지 않는데, 네 것을 양보해 줄 수 있겠느냐?”

현정훈의 말에 정호기가 두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전병을 넘겼다.

“고맙다.”

어울리지 않게 고맙단 인사치레까지 한 현정훈이 전병을 들고 일행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전병을 먹었는데, 그곳은 그에게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부는 방향이었다.

아마도 바람에 독이라도 풀 것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허, 이곳에서 보니 경치가 좋군요. 전 여기서 경치를 구경하며 먹겠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는 자리에 앉아 전병을 야금야금 조금씩 깨물어 먹었는데, 한 입 먹고는 잠시 경치를 구경하고, 또 한 입 먹고 경치를 구경하고 하는 식이었다.

“당 대협, 과연 냉백이 우리를 쫓아 만산으로 들어올 것 같습니까?”

정호기의 물음에 당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네. 그들에게 있어 정 소협은 중원 어디에나 갈 수 있는 통행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니까. 아마 그들은 파천궁에 전갈을 넣어 반대쪽에서도 우리를 압박하려 할 것이네.”

“하지만 파천궁이 그들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장화표국의 일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 소협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기에, 어쩌면 파천궁이 정 소협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음이네.”

“어쨌거나 냉백은 분명 우리를 찾아 들어오겠군요. 그렇지요?”

“십중팔구는 그럴 확률이 높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을 테니.”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이지만 당평의 대답을 듣고 나니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냉백, 드디어 너를 보게 되는구나.’

기회가 된다면 죽일 테지만, 일행과 자신의 안전을 무시하면서까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것은 크나큰 변화인데, 우선순위에 있어 냉백의 목숨보다 동료의 목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전의 정호기였다면 냉백을 죽이는 데 있어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고 일을 벌였을 것이다.

***

“금방 다녀오마.”

정호기 일행이 만산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현정훈이 자진해서 정보를 알아 오겠다고 나섰다.

“상처를 많이 받으신 모양인데요?”

지금까지 현정훈은 큰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었고, 식탐도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말수도 줄어들어 지금 한 말이 만산에 들어서서 처음 한 말이었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네. 언제까지 개방에 누(累)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누가 아니라 수치였다.

“안 그래도 조 방주님이 특별히 부탁을 하셔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잘되었지 뭔가. 이참에 현 대협도 변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슬슬 개방 내에서도 현 대협의 징계를 논의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말을 마친 당평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근방을 한번 둘러보고 오겠네. 미리 도주로를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네.”

“제가…….”

“아니네. 쉬고 계시게나. 산속을 거닐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까. 혜미야, 같이 가겠느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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