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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97화 (98/137)

97화

“으음, 시원하다.”

옷을 모두 벗고 허리 어름에 오는 깊이의 물속에 들어간 정호기가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평평한 바위를 골라 앉으니 목만 물 바깥으로 나왔는데,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고 찰랑거리는 물결이 턱을 쓰다듬으며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야제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군. 조당이 이렇듯 저돌적인 성격이었나?’

예상치 못한 공손우의 등장에 사로잡혔던 정호기였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야제까지 중원으로 보낸 조당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조당은 안전을 위주로 하였고,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쩌면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숨겨 두고 있던 거침없는 성격이 드러난 것일지도 몰랐다.

‘분명 나를 감시하고 있을 거야. 본격적인 압박은 냉백이 섬서에 들어오고 나서야 시작되겠지.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소림이 있는 하남으로 가는 것이었다.

천수신의가 소림에 들렀다고 했으니, 분명 소림에서는 어느 정도 지지를 이끌어 냈을 테고, 그들에게 흑룡문의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려 줬을 것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냉백이라고 해도 함부로 하남으로 오지는 않겠지.’

그리고 하남으로 향해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할 거야.’

하지만 위험부담이 있는 것이, 만약 조당이 정호기가 소림을 안전하다 생각해 움직였다고 판단한다면 가족들을 하남으로 보냈으리란 추측을 할 수도 있었다.

‘어떤 패를 꺼내 드느냐에 따라서 놈들의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그 패를 놈들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변하기도 하겠지.’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거지? 아무리 날 미끼로 쓴다지만, 내가 화산이나 종남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당장이라도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이끌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해 버릴까?’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작전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호기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놈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거였어!’

그때, 급하게 숨을 참는 기척이 멀리서 느껴졌다.

‘이런…….’

가쁜 숨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몰라도 둘 중 하나이리라.

‘당혜미, 아니면 유옥접이겠… 응?’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정 가가…….”

유옥접이었다.

느릿하게 물속으로 몸을 밀어 넣은 정호기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이오?”

“옷을…….”

그녀의 손에는 곱게 접힌 옷이 들려 있었는데, 아마도 여유분으로 챙긴 것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짓궂군.’

영초린이나 나상진이 가지고 와도 될 일이었는데, 굳이 유옥접을 시킨 것은 정호기를 놀리려는 심보이리라.

“고맙구려. 그나저나 기왕 오신 김에 같이 멱이라도 감겠소? 물이 시원한데.”

정호기의 말에 유옥접의 얼굴이 활활 불타올랐다.

“돼, 됐어요!”

부끄러운지 소리를 지른 유옥접이 후다닥 달려가 버렸는데, 문제는 주려고 가지고 온 옷을 들고 뛰어갔다는 것이었다.

“흠, 이런 기분도 나쁘지는 않구나.”

그렇다고 색을 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교류를 말함이었다.

‘놈들이 뭐를 노리는 것인지는 알았는데,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결국 다시 돌아온 유옥접이 옷을 놔두고는 정호기가 뭐라 하기도 전에 쏜 살 같이 사라져 갔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정호기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하자 당평이 고개를 끄덕했다.

“우리도 그것을 염려하였소이다. 그리고 그것도 이유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파악된 바가 없고, 본산이나 본가에서 결정 난 사항이 없기에 정 소협을 두고 떠난 것이외다.”

만일 화산이나 종남에서 정호기를 보호하고자 했다면 기다렸다 그를 데리고 본산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사비연이 떠나면서 정호기에게 전음으로 시간을 끌어 달라는 것은 화산이나 종남의 본산으로 찾아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정호기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제가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호기가 한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냉백은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정호기가 어딘가로 몸을 의탁할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는 화산과 종남, 소림을 지목했는데 솔직히 어디가 되었든 냉벡에게는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정호기를 내놓으란 압박으로 그곳을 치면 그만일 테니까.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당평의 시선이 현정훈에게로 향했다.

“개방에서는 아직 다른 말이 없으신지요?”

“일단 추풍검은 아직 섬서로 발을 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 소협의 말처럼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고 다른 이들이 흑룡문을 떠나 하남이나 섬서, 사천으로 잠입을 시도하였다면 어떤 언질이라도 있을 터인데, 아직까지 총타에서 내려온 전갈은 없었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그들이 정 소협의 행보에 맞춰 필요한 인원을 보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때, 나상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저들이 일부러 늑장을 부려 대형께 기회를 준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왜 그런 것입니까?”

“지금에야 아직까지 추풍검과 직접적인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화산이나 종남, 소림과 같은 곳에 몸을 의탁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대놓고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추풍검이 정 소협을 압박하는 와중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정 소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 그럼 화산이나 종남은 이미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미리 떠났단 말씀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본산이나 본가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확인된 사실이 없기에 간 것뿐입니다.”

당평의 말에 현정훈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당연한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시라도 빌붙을까 봐 앗 뜨거 하면서 떠나간 것이지요.”

말을 마친 현정훈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이제 알 것 다 알았으니, 어디로 갈 생각이냐? 놈들이 하는 짓이 괘씸한데, 이참에 둘 중의 하나를 골라 들어가는 것은 어떻겠느냐?”

현정훈의 말에 정호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있는데, 왜 그곳으로 가겠습니까?”

“안전한 곳?”

“예. 전 개봉으로 갈까 생각 중입니다.”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입을 딱 벌렸다.

“뭐?”

“개봉만큼 안전한 곳이 또 있겠습니까? 설마하니 그곳에서 분탕질을 치지는 않겠지요. 아, 혹시 모르겠군요. 왕진을 구워삶아서 군이 출동하게 하지 않을지도.”

개봉은 시인묵객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벼슬아치들의 자제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기도 했다.

만일 그런 곳에서 무림인들이 집단으로 무기를 차고 돌아다닌다면 대번에 사달이 벌어질 것이었다.

거기다 만약 대판 싸우기라도 한다면 군대가 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 네놈은 도대체 우리 개방과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놈들을 개봉까지 끌어들이고자 한단 말이냐! 얼마나 더 거지새끼들의 곡소리를 듣고 싶은 게야!”

“그럼 화산과 종남에게 제가 무슨 원한이 있어 그들을 찾아가야겠습니까?”

“소림은? 소림은 어째서 빼 놓은 건데?”

“그러는 어르신은 어째서 소림은 언급하지 않으신 겁니까?”

소림은 정파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흑룡문의 침입을 받아 멸문하기라도 한다면 정파는 크나큰 타격을 받는 것이었기에 무의식중에 제외시켰을 것이었다.

“아예 우리 모두 소림으로 가자. 아무리 추풍검이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설마 소림까지 치고 들어오겠느냐?”

“어디에도 가지 않을 테니, 그렇게 막 나가지 마십시오.”

“뭐? 막 나가? 이놈이!”

발작하는 현정훈에게서 시선을 거둔 정호기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께도 이참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파에서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 전까지는 어느 곳에도 몸을 의탁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만일 우리의 추측이 옳다면 추풍검은 그런 나를 압박할 것이니, 여러분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떠나고자 하신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정호기가 말을 하면서 현정훈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보는 거냐? 난 절대 떠날 생각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나 물어봐라.”

방주의 명이라고는 하지만, 추풍객이 이끄는 전투부대의 추격을 받을 것이라는데도 현정훈이 떠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었다.

“나와 혜미도 마찬가지일세.”

당평이 당혜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했다.

“전 떠나겠어요.”

그때 전혀 의외의 인물이 떠난다는 말을 했는데, 바로 유옥접이었다.

“알겠소. 다만 놈들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날이 어두워지면 내가 직접 유 매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겠소.”

떠난다는 유옥접이나 데려다 준다는 정호기나 표정은 담담했다.

***

“유 매.”

“정 가가.”

어둠을 틈타 산을 내려온 정호기가 그녀를 안고 최대한 내력을 쥐어짜서 경공을 펼쳐 달려온 곳이었고, 조금만 더 가면 하남으로 가는 경계였다.

“묻지 않으시나요? 왜 떠나는지?”

“돌아오기 위해 간다고 생각하오.”

정호기의 말에 유옥접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전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제가 올 때까지 부디 무사하시길 바랄게요.”

“알겠소.”

말을 마친 정호기가 살짝 고개를 숙였고, 유옥접은 까치발을 섰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

그 순간 정호기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어둠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짧은 입맞춤을 나눈 후 정호기의 배웅을 받으며 유옥접이 멀어졌는데,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기는 그녀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당신은 포기를 모르는 여자지. 분명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구려.’

단순히 추풍검이나 그가 거느린 전투부대가 무서워 떠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떠날 것이라면 애초에 영웅회에서 떠나면 그만이었으니까.

***

“정 소협, 어디로 가는 것인가?”

당평의 물음에 앞서 달리던 정호기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일단 냉백을 깊숙이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산서이네. 그건 알고 있는가?”

정호기가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맞습니다. 전 산서로 가려 합니다.”

산서는 파천궁의 영역이었다.

“하긴, 그것도 답이 되겠군. 그렇지만 파천궁이 흑룡문과 손을 잡으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 것일세.”

“산서로 들어간다면 그렇겠지요.”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뭔가 떠오른 듯 허벅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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