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뭐냐?”
현정훈의 물음에 정호기가 짊어지고 온 시체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역시나 저를 돕는 것처럼 마라문을 공격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그래? 어디 보자. 이놈은 모르겠고, 이놈도 처음 보는 놈이고, 이놈은 낯이 많이 익은 것 같지만 역시 모르는 놈이고.”
시체들을 살피던 현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놈은 한 놈도 없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분타에 갔을 때 한 놈이라도 데리고 올 것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가서 모시고 오시지요.”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내가 네놈 심부름이나 하려고 이곳에 있는 줄 아느냐! 벌써 몇 번을 왔다 갔다 시키는 게야!”
현정훈의 호통에 정호기가 고개를 돌려 당혜미를 바라보았다.
“어머, 어르신, 어디 편찮으세요? 가까운 분타도 가지 못하실 정도로 아프신가 보네요.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하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
다가오는 당혜미를 본 현정훈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프긴. 방금 전에도 다녀왔지 않느냐. 나 멀쩡하다. 그러니 냉큼 갔다 오마.”
말을 마치자마자 현정훈의 신형이 쏜 살 같이 멀어졌다.
그런 현정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저분이 신비한 분인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당혜미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호호호, 신묘한 분이긴 하지요.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 만날 수 없고, 만난 사람들은 절대 만났단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요.”
“예?”
“들른 곳의 황구는 씨를 말리고, 손님이란 자격으로 근처 주루에서 외상을 하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면서 뭔가 하나라도 주워들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흠, 만난 분들이 만났단 얘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는 좀 부족한데요?”
“꼭 한 가지씩 약점을 쥐어야 떠나는 분이거든요. 우리 가주님도 어떤 약점을 잡히셨는지, 십 년간 애지중지한 황룡을 잡아먹었음에도 개방에 하소연도 못하고 계시지요. 그와 비슷한 이유로 여러분들이 은밀히 저분을 만나고자 하지만 한번 들른 곳에는 다시 찾아가시는 법이 없으시거든요.”
[그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리 없지.]
문득 음식을 보낸 곳에서 오리 다리의 개수를 틀리게 했을 거라던 질문에 대해 현정훈이 했던 답이 떠올랐다.
‘분명 그들의 어떤 약점을 잡았으니 음식을 바치는 것이겠지? 자신의 돈으로 그것들을 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
지금 영웅회의 인물들은 흑룡문과의 일전을 각오한 사람들 같지 않게 여유로웠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의 한 명인 유옥접은 당혜미와 대화하고 있는 정호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하면 일월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야. 가가께서 정의 구현을 목표로 내세운 만큼 암중에서 미약을 팔고 여인들을 납치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일문과 성문은 가가를 돕는 것에 반대할 게 분명해.’
유옥접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계획한 것을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월문의 주인은 원래 우리 여자들이었어. 그러던 것이 남자들이 이익을 좇아 우리를 지배하려 든 것뿐이지.’
여자들만의 문파였던 일월문에 파리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 해.’
손을 꼭 쥔 유옥접은 조만간 어머니인 문주를 만나서 이 얘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 대협은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분명 분타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 정호기 일행은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산 중턱에 있는 폐관제묘에 모여 있었는데, 그것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싸움에 말려드는 것을 방비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주위를 감시하기 쉽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디서 오리 다리라도 뜯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흥! 군침 삼키면서 황구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당혜미가 콧방귀를 뀌면서 정호기의 말을 받을 때, 현정훈이 중년 거지 한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흠흠, 나 왔다.”
“어머, 오셨어요? 근데 이번엔 황구를 데리고 오지 않으셨네요? 벌써 이 동네 황구를 모두 드신 건가요?”
당혜미가 마치 몰랐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티가 팍팍 났기에 현정훈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내가 황구에 환장한 놈도 아니고.”
“아니셨어요?”
“흠흠.”
현정훈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난처해하는 것을 옆에 있던 중년 거지가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당평을 알아보았는지 그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황덕구라고 합니다.”
“풋!”
중년 거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순간 정호기마저도 헛웃음을 터뜨렸고, 당평도 애써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크흐흠! 당평입니다. 크허허험!”
기침으로 무마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얼굴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거기다…
“캑캑! 콜록콜록. 나 죽… 캑, 캑.”
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나상진은 사레가 들렸는지 바닥을 구르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던 황덕구가 현정훈을 원망 서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안 가겠다는 것을 억지로 끌고 온 것이 그였으니까.
“어서 이놈들이나 살펴보아라. 아는 놈이 있는지.”
현정훈이 깔끔하게 황덕구의 눈빛을 무시하고는 바닥에 눕혀 있는 다섯 구의 시체를 가리켰다.
“어디 보자…….”
어차피 현정훈과 엮여서 좋은 꼴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황덕구였기에 맡은바 일을 빨리 처리하고 분타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
“왜 그러냐? 혹시 아는 놈이라도 있냐?”
현정훈의 말에 황덕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말고요. 현 장로님도 만나신 적이 있을 걸요? 적화방주의 아들놈 아닙니까? 천제영 공자라고 한 오륙 년 전에 만나셨지요. 문제는 나머지 시신들입니다.”
“왜?”
“여기 이 사람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적화방주의 첫째 아들인가 그럴 겁니다. 이쪽이 둘째. 천 공자가 막내였지요. 그리고 이들 나머지 두 명도 적화방에 적을 두고 있을 겁니다. 예전에 천 공자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줄초상을 당했단 말이었다.
현정훈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같이 움직이더군요. 뭉텅이로 모여 있기에 죽였는데. 그럼 적화방도 흑룡문과 연관이 있다고 봐야겠군요.”
정호기의 말에 황덕구의 눈이 빛났다.
“지금 흑룡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황덕구는 갑자기 흑룡문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들이 흑룡문과 관련이 있단 말씀입니까?”
질문을 받은 정호기가 현정훈을 바라보았다.
말을 해도 되느냐는 것이었는데, 현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 할 일 끝났으면 냉큼 사라질 일이지 뭐하러 뭉그적거리는 것이냐? 가는 길을 몰라서 이러는 것이냐?”
“예? 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네놈은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해. 그러니 내가 데려다 주마.”
“아악!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장로님, 그러니 이것 좀 놓고… 아악!”
***
황덕구의 귀를 잡고 끌고 가는 현정훈을 보면서 유옥접이 고개를 갸웃했다.
“개방은 아직 사태를 모르고 있나요?”
그 말에 당평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다 말해 줘도 되겠나?
-예, 상관없습니다.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당평이 천수신의가 소림에 전한 말들을 들려주었다.
“아직 아는 문파도 적고, 알고 있는 이들도 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당가만 해도 문주님과 몇몇 분들만 알고 계시니까요.”
“어째서요? 어째서 비밀로 하는 거지요?”
“일단 공론화가 되면 그때는 바로 전면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수뇌부들만 그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은밀히 조사를 진행 중이고.”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있잖아요.”
“증거?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당평의 말에 유옥접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 소협의 말도 있고 천수신의 님의 말씀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확증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추풍검이 뛰쳐나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정 소협이지요. 과연 사람들이 정 소협의 말을 믿겠습니까?”
“하지만.”
“흑룡문이 사파라서? 세인들에게는 정파, 사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나누기에는 평화가 너무 길었으니까요.”
“하지만 정파끼리는 힘을 합쳐야 하지 않나요?”
“그것도 옛일입니다. 눈앞에 위기가 닥치지 않는 이상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이 먼저지요.”
말을 마친 당평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지금 정 소협을 바라보는 눈길이 많은 겁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정의 구현이란 기치를 걸고 영웅회를 발족시켰으니까요.”
정호기는 지금 당평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는데, 혈신이던 시절 그것을 이용해서 정파를 이간질시키며 사분오열하게 만들어 보다 쉽게 정사대전을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제라도 흑룡문의 속셈을 눈치 챘을 테니 조만간 정파의 뜻이 하나로 뭉칠 날이 올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정호기가 당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오늘의 일로 미루어 보건대 저는 죽을 염려가 없는 것 같으나, 여러분의 안전이 걱정입니다.”
미끼라고 했으니, 몰아붙이기는 하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살려 둬야 쓸모가 있으니까.
그때, 주변을 돌아보러 나갔던 진청운이 돌아왔다.
“이런, 다쳤느냐?”
시체를 메고 오면서 피범벅이 된 정호기였기에 진청운이 놀라서 다가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시체를 메고 오느라 묻은 것뿐입니다.”
“시체? 응? 아니, 이들은 적화방주의 자제들이 아니더냐? 어쩌다 이렇게?”
“아는 놈들입니까?”
“알다마다. 적화방은 우리 정가장과 교류가 많은 곳이었단다. 물론 직접적인 거래는 없었고 부운장을 통해서 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찌 된 일이냐? 이들이 왜 이렇게 죽어 있는 것이냐?”
진청운의 물음에 정호기가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으음… 그럼 적화방이 흑룡문과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들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묻기로 하자. 그리고 넌 가서 좀 씻고 오너라.”
“어차피 피가 묻었으니 제가 묻겠습니다.”
말을 하자마자 시체들을 둘러메고 산속으로 들어간 정호기가 호아를 이용해 땅을 파고 시체들을 묻은 후에 근처에 있는 폭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