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조력자라니요?”
유옥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것을 말하자면 일단 어째서 질 싸움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 하니, 그것부터 설명해 주겠습니다. 지금 흑룡문은 정 소협을 핑계로 섬서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와중에 사파가 도움을 청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자신들이 노리는 정 소협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는 사파가 말입니다.”
정호기가 유옥접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기에 이제는 그녀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친절히 설명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어차피 같이 다니다 보면 알게 될 터였다.
“그럼 마라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라문이 질 싸움을 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 대협께서도 그와 같은 것을 읽고 떠난 것이지요. 종남과 화산이 떠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아예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럼 우리가 마라문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유옥접의 말에 당평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아도 마라문이 멸문한다면?”
“그럴까요?”
“어찌 되었든 마라문은 멸문의 길을 걸을 겁니다. 다만 그 명분이 정파까지 확대되느냐 정 소협에게서 끝나느냐의 차이일 뿐.”
정호기가 가든 안 가든 마라문의 멸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었다.
그 과정에서 화산과 종남이 끼어들면 정파에 핍박받는 사파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흑룡문이 정사대전을 벌이기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깜짝 놀란 유옥접이 당황해 물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것도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니까. 마라문의 배후에 흑룡문이 없다면, 지금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내실을 다진 후에 한꺼번에 치고 나오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평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눈이 정호기에게로 향했다.
“마라문의 배후에는 확실히 흑룡문이 존재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흑룡문이 어째서 이런 시기에 저를 납치했겠습니까?”
“자네가 과거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어떤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흑룡문이 마라문의 배후에 있다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알겠네. 어차피 우리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으니까. 그래, 자네는 어떻게 할 참인가?”
“제 결정은…….”
***
쾅!
마라문의 두꺼운 정문이 단번에 박살 나며 파편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적이다!”
소리 높여 정호기의 등장을 알린 마라문도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서걱.
그 옆에서 무기를 꺼내려던 마라문도의 목도 같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죽음을 시작으로 정호기의 무차별적인 살육이 시작되었고, 그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웬 놈이냐!”
고함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마라문주인 하귀 고주와 그의 동생인 동귀 고태였다.
-형님, 정호기란 놈인 것 같습니다.
고태의 말에 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구나.
일단 뛰쳐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정호기 혼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른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무래도 혼자 온 것 같습니다.
죽여 버리자니 난감했고, 밀리자니 단 한 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엔 세간에 알려진 마라문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어떻게 하지요?
고태의 물음에 고주가 무의식적으로 멀리 떨어진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이가 결정을 내려야 자신이 행동을 할 수 있었으니까.
“응? 거, 거기 멈춰라!”
갑자기 고태가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렀는데, 고주가 바라본 전각으로 정호기가 신형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막아라! 놈을 죽여!”
고주도 뒤늦게 수하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정호기는 그들을 지나친 상황이었다.
“쫓아라!”
고주와 고태가 먼저 정호기의 뒤를 쫓았고, 그 뒤를 마라문도들이 우르르 따랐다.
정호기가 목표했던 전각으로 거의 다가갈 때, 갑자기 전각주위에서 복면에 정(正) 자를 새긴 복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고주와 고태는 그냥 지나쳐 가더니 마라문도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악!”
복면인들의 등장에 고주와 고태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뒤쪽에서 죽어 가는 수하들은 버려둔 채로 정호기의 뒤를 쫓았다.
쾅!
전각에 도착한 정호기가 벽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가자 마찬가지로 복면에 정 자를 새긴 복면인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그때, 고주와 고태도 정호기의 뒤를 따라 전각에 도착했고, 복면인과 품(品)자를 이루며 정호기를 포위했다.
분명 자신들의 수하들인 마라문도들을 죽이고 있는 이들이 복면인과 관계가 있을 것인데도 두 사람은 그 복면인과 연계해 정호기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쯧쯧, 천둥벌거숭이 하나 막지 못하고 이곳까지 오게 하다니…….”
늙수레한 음성 사이사이에 살기가 스며들어 있었는데, 마치 정호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 시선을 돌려 쓰러지는 마라문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고주와 고태의 태도로 보아 복면인이 그들의 상관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차후에 이 일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예!”
‘누구지?’
정호기는 자신의 앞에 있는 복면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 기억 속에 있는 기운이고, 느낌이다.’
복면에 나 있는 눈구멍 부위에 그물과도 같은 천이 있었고, 손에는 장갑마저 끼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호기의 기억 속에서 춤추고 있는 기운이었다.
“야제?”
그 말에 복면인이 살짝 동요를 보였는데, 설마하니 정호기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허… 내 존재도 알고 있었나? 거기다 알아보기까지? 기가 막히는군.”
조당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냉획과 공손우도 단 한 번의 만남을 가진 것이 전부였고,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대면한 적이 없는 야제였기에 정호기가 자신을 알아본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지? 냉획인가? 아니면 공손우?”
야제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 두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믿을 텐가?”
“아니.”
“그럼 입 아프게 주둥이 놀리지 말고 덤벼.”
‘이놈을 죽인다면 조당에게 커다란 심적 타격을 줄 수 있다. 반드시 죽여야 해!’
호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놈이 기고만장하구나. 어차피 네놈은 미끼. 너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미끼의 역할에나 충실하라는 의미에서 가볍게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살짝 저었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경력이 정호기를 향해 쏘아졌다.
“하압!”
호아를 강하게 내리친 정호기가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호아에서 쏘아진 강기가 야제의 경력과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고, 정호기가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헛!”
급작스러운 정호기의 공격에 야제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놓치지 않는다!”
정호기의 몸에서 기가 뿜어져 순식간에 호아로 흘러들어갔다.
이는 내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보통 무공은 후반 초식으로 갈수록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력을 점차 키워 그 힘을 축적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초반의 초식들은 그러한 것을 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고수냐 아니냐는 그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었다.
흔히 고수들이 초식을 잊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자신이 자랑하는 최후 절기를 펼칠 수 있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이었다.
호아가 떨림을 보인 직후에 날카로운 예기들이 사방으로 쏘아졌는데, 이내 호선을 그리며 야제를 향해 집중되었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삼 층으로 이루어진 전각이 무너져 내렸고, 그 먼지를 뚫고 두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마라문에서 멀어졌다.
“으윽!”
잔해 속에서 신음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고주와 고태였다.
“태야, 다친 곳은 없느냐?”
“예, 형님.”
“어서, 어서 자리를 뜨도록 하자.”
“예.”
야제가 자신들이 예뻐서 살려 준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지금 섬서로 들어서고 있는 냉백에게 구원을 요청할 당사자들이었기에 살려 둔 것일 뿐이었다.
물론 이곳을 벗어나야 그러한 일도 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이 다친 몸을 이끌고 비밀 통로로 향할 때, 정호기와 야제는 산 중턱에서 대치를 하고 있었다.
***
“어린놈의 실력이 대단하구나.”
야제의 말을 들은 정호기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놈이었던가?’
아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야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무언가를 가진 놈이었고, 자신과 있던 두 시진 동안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놈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이놈을 죽일 수만 있으면 되니까.’
호아를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던 정호기가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으음…….”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기운들이 느껴졌다.
그 은밀함과 신속함이 녹록치 않은 놈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더 놀아 주고 싶지만,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야제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자, 정호기를 향해서 화살과 암기가 날아들었다.
티티티티팅!
호아를 이용해 그것들을 모두 쳐 냈을 때, 야제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바를 정(正) 자를 이마에 새기고 있는 복면인들.
그들이 어느새 마라문을 정리하고 야제를 돕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야제를 놓친 분풀이를 그들에게 풀어 버리려는 정호기였다.
“크윽!”
하지만 이내 뿔뿔이 흩어졌기에 정호기가 죽인 복면인의 숫자는 겨우 다섯 명뿐이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일행을 근처에 대기시켜 놓을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늦은 후회였다.
“어떤 놈들인지 보기나 할까?”
다섯 명의 복면을 모두 벗겼지만, 정호기가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일행에게 보이면 혹시나 누군지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호기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들이 자신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분명 정파 어딘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놈들일 거야. 그래야 나를 도운 것을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공손우라면 잡히거나 죽은 뒤에 시체를 보고 정파에서 확인 작업을 하는 것까지 신경을 썼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체를 알고 싶은 정호기였기에 시체들을 어깨에 걸머지고, 손에 들고 해서 모두 가져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