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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93화 (94/137)
  • 93화

    “좀 많다 싶으면 깎아 줄 수도 있네.”

    가만히 그런 걸인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는 내공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정가장에 있는 식솔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연무장에 모이기 바랍니다!”

    총 열 번에 걸쳐 외친 정호기가 성큼성큼 걸어서 연무장으로 향하자 진청운과 걸인도 그 뒤를 따랐다.

    “진청운이라고 합니다.”

    뒤늦게 진청운이 인사를 하자 걸인도 그제야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현정훈이라고 합니다. 무림 동도들은 과분하게도 제게 조개라는 별호를 지어 주었지요.”

    “아, 현 대협이셨군요. 개방의 방주님보다도 더 만나기 힘들다는 현 대협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목숨 값이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청운의 질문에 현정훈이 저간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음… 호기의 의뢰를 처리하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도저히 그만큼의 사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외상도 가능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정훈이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진청운은 말문이 막혔고, 그 뒤로 연무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들으십시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정호기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연단 위에 선 정호기가 그런 그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말을 이었다.

    “정가장은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곳에 계신다면 여러분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을 기해 정가장의 문을 닫고자 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지만, 정호기가 주의를 주자 조용해졌다.

    “여러분께서 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빈손으로 내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성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자, 저를 기준으로 무공을 익히신 분들은 좌측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으신 분들은 우측으로 서십시오.”

    거의 일 각에 걸쳐 사람들이 이동하여 겨우 자리가 잡혔다.

    “전 여러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저를 실망시키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일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는 물론이고, 진 총관님이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기에 무공을 익힌 이들 중에서도 저절로 마른침을 삼키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사부님, 장에 있는 모든 패물과 돈을 가지고 오십시오. 단 한 푼도 남기지 마시고요. 값비싼 도자기나 가구도 모두 들고 오십시오.”

    무공을 익힌 이들을 데리고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모은 정호기가 전답의 문서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누가 더 많이 받고 덜 받고를 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호기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가 연무장을 떠돌고 있었기에 기가 질린 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텅 빈 연무장을 보던 정호기가 현정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금자 이십 냥이라고 하셨지요? 이곳을 드리겠습니다.”

    “뭐?”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금자 이십 냥의 값어치는 할 정도의 건물이고 토지입니다.”

    백만 냥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흑룡문이 노리고 있는 이상에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 바로 정가장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받지 않으시겠단 것입니까?”

    당장 이곳을 거지들로 채운다고 해도 추풍검은 그따위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었다.

    “돈! 돈으로 줘라. 우린 현물로는 거래를 하지 않으니, 금전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자꾸나.”

    “그건 어르신의 사정입니다. 저는 드릴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으니 알아서 하시고. 사부님, 이곳은 이미 개방에 드렸으니 우린 이만 나가도록 하지요.”

    “그러자꾸나.”

    정호기와 진청운이 떠나려 하자 현정훈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어르신께 드렸으니 이곳은 우리에게 있어 남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나가야지요.”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외상으로 해 주마.”

    “제 인생에 있어 외상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주지 않은 것은 뭐란 말이냐?”

    “잠시 미뤄 둔 것이지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지만, 현정훈은 말로써 정호기를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그냥 해 본 말이니 주지 않아도 된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곳은 제 것이군요.”

    “그래. 그러니 어디 간다는 말은 하지 마라.”

    현정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호기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가 주십시오.”

    “뭐?”

    “제가 집주인이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호기의 말에 현정훈이 입을 딱 벌렸다.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나가 달라는 말은 하지 마라. 알았지? 방주가 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라고 했단 말이다.”

    이제야 이실직고를 하는 현정훈이었다.

    “방주님이요?”

    “그래. 아무래도 너를 중심으로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흑룡문을 끌어들였으니 네 곁에서 정확한 정보를 얻으라는 전갈이다. 물론 네가 냉획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과 네가 흑룡문에서 본 것들을 전했으니 그쪽에서도 조사를 하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도록 하자꾸나.”

    몇 걸음 걷던 정호기가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오던 현정훈을 바라보았다.

    “곳간도 모두 비웠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데, 수고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기왕 가시는 김에 영웅회에 전갈도 넣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마라문과의 싸움을 멈춰 달라고 말입니다.”

    “뭐?”

    “설마 공짜로 묵겠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것으로 숙박비를 대신하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신형을 돌린 정호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늦게 오시면 우리끼리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요. 설마 이곳에 비밀 통로 하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대놓고 협박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현정훈이 진청운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도 현정훈을 외면한 채 정호기를 따라갔기에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너무한 것이 아니냐?”

    정운룡이 집무를 보던 웅혼각에 들어선 진청운이 말을 했지만, 정호기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다른 분들도 그곳을 떠나신 것은 아니겠지요?

    -나만 나왔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겁니까? 흑룡문이 지금 눈이 벌겋게 돼서 찾고 있단 말입니다. 혹시라도 사부님의 행동 때문에…….

    -나라고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인 줄 아느냐? 장주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나왔을 뿐이다. 내가 나오지 않는다면 장주님께서 손수 나오시겠다는데 어찌하겠느냐?

    조해의 동생과 정호기의 가족은 그 처지가 달랐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정호기의 오판이었다.

    -자식이 위험에 처했는데, 부모가 마음 편히 기다릴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진청운의 말을 들은 정호기가 의자에 주저앉았고, 그 순간 현정훈이 들어왔다.

    “안주는 오리 다리로 가지고 왔는데, 괜찮지?”

    ***

    “대형, 무사하셨군요!”

    “무사하셨으리라 믿었습니다.”

    영웅회의 인물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다가와 손을 잡는 영초린과 나상진의 인사를 받은 정호기가 사준우에게 다가갔다.

    “걱정을 끼쳤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사준우의 물음에 정호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유옥접과 당혜미의 옆에 당평과 사비연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개방을 통해 정호기가 냉획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마라문의 뒤에 흑룡문이 있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유일하게 유옥접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되묻는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묵골방을 칠 때 나타났던 의문의 고수들은 흑룡문 소속의 무사들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들이 마라문의 배후이기에 마라문과의 전쟁의 중심에 있는 저를 납치한 것 같습니다.”

    “용케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났구려.”

    “제가 천운을 타고났는지 놈들이 방심한 틈을 타 천만다행으로 탈출할 기회를 얻어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사비연과 당평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흑룡문에서는 제가 냉획을 암살했기에 잡으려 한다지만, 전 그저 납치를 당한 후 탈출한 것이 전부입니다. 저들이 저를 중상모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영웅회를 더 이상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지도나 악가장 등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현정훈의 말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을 테니, 일단 지도 등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해라. 설사 지금 말한다고 해도 누가 믿어 주겠느냐? 오히려 악가장이나 인화산장에서 들고일어나면 일만 꼬일 뿐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네만, 설마 했다네. 아무튼 그래서 회주는 어떻게 하실 건가?”

    사비연의 물음에 정호기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불의에 굴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마라문과 싸움을 계속하겠단 말인가?”

    “예. 그리고 흑룡문과도 일전을 벌일 생각입니다. 물론 제 힘이 부족하기에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억지스러운 주장에 굽힐 생각은 없습니다.”

    굽히는 순간 죽음이라는 것을 사비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호기의 이런 반응을 우려하는 것이 정파의 입장이라는 것도.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네.”

    “그렇다고 목을 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흑룡문이 정 소협을 핑계로 중원을 활보하게 되면 뜻하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것이네.”

    “…….”

    “안타깝지만 우리 사가장은 이만 빠지겠네.”

    사비연의 말에 사준우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만금장도 이미 그러한 뜻을 비치고 모두 돌아갔네.”

    화산과 종남에서 온 이들도 희생만 남기고 모두 자파로 돌아간 실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당평을 바라보았다.

    “난 정 소협과 함께하겠네.”

    “흑룡문이 관계된 일입니다.”

    “괜찮네. 심심한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때 사비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호기에게 다가왔다.

    -어떤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우리가 힘을 모을 때까지 견뎌 주게. 그것을 위해 당 대협이 회주와 같이하는 것이니까.

    -뭔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천수신의 어르신께서 소림으로 향하셨다 들었네. 소림에서 각 문파에 전서를 보낸 것 같으니 조만간 소협을 도울 수 있을 것이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종남에서도 회주를 돕기 위한 방법을 강구중이라 들었네. 당 대협께서 보다 자세히 알고 계실 것이니 그분께 얘기를 듣게나.

    사비연의 말을 들은 정호기는 안도감보다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진청운도 모자라서 천수신의까지 그곳을 떠났다니… 이렇게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그곳이 들킬 확률은 높아지는 것이었으니까.

    ‘어째서, 어째서…….’

    왜 모르겠는가?

    아들에 대한 걱정, 손자에 대한 걱정으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가자.”

    “하지만 할아버님…….”

    “어허!”

    사준우는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비연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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