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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92화 (93/137)
  • 92화

    “이놈들! 대낮부터 퍼질러 앉아 있는 게냐? 거지의 본분은 게으름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것이냐!”

    걸인의 호통에 폐가 앞, 양지바른 곳에서 이를 잡고 있던 개방도들 십여 명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혀, 현 장로님, 어쩐 일이십니까?”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거지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걸인을 맞이했다.

    “왜? 거지가 거지 소굴 오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하냐?”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이번에는 좀 빨리 오셨기에 드리는 말씀이지요.”

    중년 거지가 말을 하면서 눈짓을 하자 젊은 거지가 잽싸게 폐가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안을 깨끗하게 치우겠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정호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는데,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는 모양이었다.

    “뭐하는 게야!”

    “윽!”

    걸인이 중년 거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손님이 왔으면 어서 안으로 들일 생각이나 하지, 뭘 멍청하게 보고만 있어?”

    “아, 예. 알겠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걸인과 정호기가 안으로 들어가니 거적을 탈탈 털고 있던 젊은 거지가 잽싸게 그것을 가지고 맞은편에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쯧쯧,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니 항상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거늘. 저 먼지들 봐라. 언제 털었기에 저 모양이란 말이냐?”

    혀를 차는 걸인의 말을 들으며 중년 거지의 입이 댓 발은 나왔는데, 걸인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거지 소굴에 손님은 무슨 손님이란 말인가? 그리고 거지면 거지다워야 한다고 내내 소리치면서 청소를 시켜? 세상천지에 깔끔하게 사는 거지도 있단 말인가?’

    물론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작년에 몰래 훔쳐서 잡아먹은 황구가 부러울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주안상을 내오겠습니다.”

    말을 하고 중년 거지가 잽싸게 둘만 남겨 놓고 방을 빠져나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정호기가 걸인을 바라보았다.

    “왜?”

    “주안상이요?”

    “거지는 술 좀 마시면 안 되냐?”

    안 될 것은 없었다.

    “난 소변 좀 보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라.”

    걸인이 나간 후에 혼자 남은 정호기가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지 소굴치고는 좀 깨끗한 편이라 생각했더니, 저 거지가 자주 들른 때문인 모양이군.’

    아마 이곳에서 잠을 자거나 생활하지는 않고 걸인의 전용 숙소로 준비를 해 둔 것 같았다.

    ‘분명 정보를 얻으러 갔을 테니, 그동안 나도 좀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구나.’

    걸인이 자리를 비운 것이 단지 소변을 보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분명 이곳으로 어떤 정보가 왔을 것이니 그것을 받으러 간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얻은 정보도 개방의 총타에 보내야 할 것이었기에 자리를 비운 것일 터였다.

    ‘조당은 나를 잡고자 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나를 미끼로 내가 말한 있지도 않은 사부와 사형들의 거처를 파악하려 하겠지. 그렇다면 나를 서둘러 죽이지는 않을 거야. 서서히 나를 압박하려 하겠지. 동시에 정파로 하여금 나로 인해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만들 테고.’

    그렇게 된다면 고립무원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건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구나.’

    정호기가 고민하는 사이 인기척이 들리며, 두 명의 거지가 커다란 상에 한가득 음식을 장만해서 들고 왔다.

    세 동이의 술을 들고 뒤따른 어린 거지의 입에서는 연신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있었는데, 입가에 묻은 양념으로 봐서는 이미 먼저 시식을 해 본 모양이었다.

    “조금 뒤에 술을 더 가지고 올 것이라 말씀드려 주십시오.”

    “예? 아, 알겠습니다.”

    이건 거지 소굴이 아니라 어디 잔칫집에나 어울릴 법한 음식들이었기에 정호기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아까 그 걸인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이런 호화로운 상을 차리게 하다니, 거지인지 강도인지 모르겠구나.’

    조개라는 거지를 떠올렸지만, 아직 확실치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같은 거지를 등쳐먹는 놈이 바로 그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은 음식이 오자마자 들어 온 걸인으로 인해 벌어졌다.

    “응?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게야? 이놈들! 게 아무도 없느냐!”

    방 안으로 들어온 걸인이 상을 보고는 대뜸 소리쳐 거지들을 찾았다.

    “술은 더 가지고 온다 하였습니다.”

    “술? 술은 당연히 더 가지고 와야지.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 당장 오지 못해!”

    걸인의 호통에 중년 거지가 잔뜩 인상을 쓰면서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 아악! 이, 이건 놓고, 놓고 말씀, 아악! 하십시오!”

    걸인이 어느새 중년 거지의 귀를 잡아서 비틀고 있었고, 중년 거지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라. 내가 왜 이러는지.”

    “도대체 뭐… 응? 아악! 아, 알겠습니다! 당장, 당장 대령할 테니 이 손 좀…….”

    상을 살펴본 중년 거지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안 모양이었다.

    “흥! 어디서 감히 이 몸의 음식을 훔쳐 먹으려 들어?”

    걸인이 귀를 놓자 중년 거지가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뒤이어 밖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아악! 분타주님, 잘못했어요! 아악! 악!”

    죽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아까 술병을 들고 왔던 어린 거지가 분명했고, 그를 패는 것은 분명 그 중년 거지이리라.

    “이 개 같은 새끼야! 내가 분명히 건들지 말라고 했지? 했어, 안 했어? 응? 이 삼 년 굶은 개새끼도 안 물어 갈 거지새끼야. 내 말이 우습냐? 우스워?”

    “넌 내 말이 우습냐? 어서 안 가지고 와?”

    걸인이 밖을 향해 조용히 내뱉자 이내 타작 소리가 멈췄다.

    “어르신,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정호기의 말에 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미리 계산을 한 것도 나고, 이놈들은 그저 음식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 와중에 몰래 훔쳐 먹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거지란 자고로 빌어먹어도 훔쳐 먹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야.”

    어쩐지 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이 음식들은 모두 어르신이 미리 사 놓으신 것이란 말입니까?”

    “그래. 개수까지 정확하게 해서 계산을 해 놓은 거다. 여기 보이지? 오리 다리가 분명 네 개여야 하는데, 세 개밖에 없잖아.”

    “보낸 곳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리 없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분명 계산을 했다 함은 장사치를 일컬음일 텐데, 걸인은 그들을 ‘그놈들’이라고 표현했다.

    ‘원래 성격이 개차반인 모양이구나.’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일삼는 것에서 짐작을 했었는데, 그것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뭔가 정보가 있습니까?”

    정호기의 물음에 걸인이 오리 다리를 하나 들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문제가 심각해졌다.

    분명 오리 고기를 입에 물고 있건만 전음은 또렷하게 정호기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경공도 그러하고 음식으로 입을 막은 채 전음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무공이 상당히 높은 것 같구나.’

    단순히 내공만 높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배우고 있는 무공의 이해와 내공의 운용이 뛰어나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흑룡문에서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이름 있는 정파의 모든 가문에 전서를 보낸 모양이다. 네가 냉획을 죽였다고 말이다.

    -예?

    -때문에 너를 잡고자 냉백이 직접 나선 것이라고 하더구나. 정말이냐?

    -제가 냉획을 죽일 정도로 무공이 뛰어났다면 그때 그리 도망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운공 중이던 냉획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죽였다고 하던데…….

    -어르신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있어 흑룡문의, 그것도 냉획이 운공하는 곳까지 숨어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 같으면 가능하겠습니까?

    -나야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느냐?

    걸인의 말에 정호기가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그놈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어쩌겠느냐? 실제로 넌 그놈들의 본거지에서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으니.

    -그럼 정파에서는 그들이 그대로 섬서에 들어가도록 수수방관하겠다는 겁니까?

    정호기의 물음에 걸인이 술을 한 동이 집어 들고는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아직은 모르지. 우리 개방에 그런 내용을 전해 달라고 의뢰를 했기에 알고 있는 것이니까.

    -예?

    진짜 어이없는 일이었다.

    흑룡문이 개방에 대놓고 의뢰를 하다니 말이다.

    -일단 전서를 보내긴 했다니, 반응을 기다려 봐야겠지. 지금 그놈들은 되도록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구나. 추풍검도 화산이나 종남에 전서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섬서로 들어갈 모양이다.

    걸인의 말을 들은 정호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 지금 출발할 생각인데,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응?”

    “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뒤로도 무슨 수를 쓸지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요? 과연 그놈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는 놈들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장에 돌아가 일을 처리하고 영웅회에 있는 의제들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음식을 남기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많이 드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정호기가 밖으로 신형을 날렸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걸인이 술동이와 오리 다리를 들고 뒤쫓았다.

    “어? 어디 가십니까?”

    마침 술과 오리 다리를 들고 들어오던 중년 거지가 그 모습을 보고 묻자, 걸인이 소리쳤다.

    “네놈 많이 먹어라. 대신 술은 묻어 놔!”

    그 말을 들은 중년 거지가 손에 든 술동이를 보면서 침을 삼켰는데, 뒤이어 들린 전음 때문에 채 넘어가기도 전에 목구멍에 걸려 사레가 들렸다.

    -이번에도 처먹고 오줌을 싸 놓으면 와서 네놈의 불알을 터뜨려 버리겠다!

    “캑, 캑, 캑, 쿨럭, 쿨럭…….”

    중년 거지의 기침 소리를 배웅 삼아 두 사람은 정가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사부님?”

    뜻밖의 인물이 정가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청운이었다.

    분명 천추산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할 그가 장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 녀석! 도대체 어딜 갔다 이제 왔단 말이냐!”

    -어째서, 어째서 사부님이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혹시 무슨 변고라도 발생했습니까?

    정호기가 진청운의 어깨를 붙들며 전음으로 물었다.

    -아니다. 내가 가끔 너의 소식을 알아볼 겸 마을로 나왔었는데, 네가 실종되었단 말을 듣고 달려왔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던가.

    절대로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생각으로 기다려 달라고.

    -왜 나오신 겁니까! 그러다 누구에게라도 행적이 들키면 모두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전음이었기에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말투는 격정적이었다.

    만일 걸인이 진드기처럼 따라붙지만 않았다면 진청운을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험험. 이보게, 정 소협, 뭔가 바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먼저 계산을 하는 게 어떤가?”

    걸인이 처음으로 정호기에게 반존대를 하며 말을 걸었는데, 그 이유가 먼저 수고비를 정산해 달라는 말이었다.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단 걸인을 먼저 보내고 난 후에 싸워도 늦지 않다는 생각에 정호기가 물었다.

    “어찌 사람의 생명을 값으로 매길 수 있겠는가마는 정 소협이 이미 약조를 하였으니, 금자로 이십 냥만 주게나.”

    그 말에 정호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진청운도 이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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