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91화 (92/137)
  • 91화

    혈신이었던 시절 주화입마에 걸려 누워 있을 때, 자식들과 부인들은 물론이고 정사대전 당시 등 뒤를 맡겼던 부하들도 그를 찾지 않았었다.

    “그랬었나?”

    “그래. 자, 이제 어서 추악한 늙은이인 나를 죽여라! 너의 치부인 나를 죽여 영원히 묻어 버리는 거야! 가족을 거추장스러워했던 너의 마음과 살육에 희열을 느꼈던 잔인한 본성, 그리고 타인의 삶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너의 이기적인 모습인 나를 죽이란 말이다!”

    목에 겨눠진 도를 붙잡고 심장에 가져다 댄 혈신이 찌르기를 종용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정호기가 한숨을 내쉬더니 도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너를 부정한다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의 살기에 반응해 처음 냉백이 모습을 드러냈고, 난 그를 죽였다. 마지막에 부모님과 동생이 나타났지만, 그들은 나로 하여금 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지.”

    도를 던져 버린 정호기가 혈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 그렇기에 나는 너를 인정한다.”

    정호기가 혈신의 가슴에 손을 대자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위를 밝혔다.

    * * *

    “무슨 일이지?”

    동굴에서 갑자기 강맹한 기운과 빛이 뿜어져 나오자 밖을 지키고 있던 걸인이 빠르게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할 때, 정호기가 먼저 걸어 나왔다.

    “어르신, 혹시 남는 옷 좀 없습니까?”

    완전히 벌거벗은 정호기는 부끄럼도 없는지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밝은 햇살 아래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작은 깨달음이 있었지요.”

    말을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 정호기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걸인이 붙잡았다.

    “왜 다시 들어가려는 거냐?”

    “제가 알몸으로 어딜 가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니 부탁드립니다.”

    “뭘?”

    “제가 갈 수 없으니, 어르신께서 제 옷을 가져다 주셔야지요. 물론 그 수고비는 장에 도착하면 잊지 않고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이틀 만에 나온 놈이 그동안 지켜 줘서 고맙다는 소리는 못할망정, 이 늙은이를 부려먹겠다는 거냐?”

    “그럼 이대로 갈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용의도 있습니다만.”

    어쩐지 정호기는 여유가 넘쳤고, 더 능글맞아졌다.

    “치워라! 흥! 오냐, 내 이 수고비는 틀림없이 받아 내고야 말테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걸인의 뒤에서 정호기가 전음을 보냈다.

    -축골공은 하지 않을 것이니 좀 넉넉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걸인을 보낸 정호기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그렇다면 멀리서 관찰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정호기의 능력은 과거 혈신이던 시절과 비교해 그리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는 누가 되었든 일대일로 붙는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결국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세상을 통달하는 것보다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깨달음이란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정호기에게는 그것이 스스로의 이해라는 것으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나를 부정하면서 무공을 익혔으니 결국에는 주화입마가 올 수밖에.’

    빛과 함께 깨어난 정호기는 마치 엉켰던 실타래가 풀린 기분이었다.

    ‘가족을 짐이나 발목을 붙잡는 존재로 여긴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를 기만하는 것이었어.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내게 소중한 사람을 만들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무의식중의 거부감.

    백수련을 떠나보낸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이용하는 관계만을 바란 것도 그 때문이었고.’

    정호기의 인간관계는 가족을 제외하면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죽여야 할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영초린과 나상진을 비롯해 과거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켜 주었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변할 것은 없을 거야.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안전이니까. 그러나 앞으로 조금씩 달라지겠지.’

    가족과 영초린 등의 목숨이 걸리면 당연히 가족을 선택할 정호기였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성인(聖人)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도 않을 것이었다.

    안다는 것.

    ‘알게 된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법이지.’

    기감을 넓혀 잠시 밖의 동향을 살피던 정호기가 다시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이것은 무엇일까?’

    길은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붉은 기운과 하얀 기운은 깨달음과 동시에 합쳐지며 사라졌다. 나에게 동화되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지. 결국 검은 길이 확장돼서 내면을 가득 채웠다는 것인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존재했다.

    ‘언젠간 너도 내게 너를 보여 주겠지?’

    굳게 잠긴 어둠은 아직 정호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응?’

    운기를 하면서도 주위의 기운에 민감해진 것은 또 다른 변화였다.

    이제 운공을 하는 와중에도 기습을 받을 걱정은 없어진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커다란 힘을 얻은 것이다.

    물론 몽황분과 같은 산공독도 지금의 정호기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어.’

    아주 은밀한 기운이 동굴을 맴돌면서 커다란 타원의 형태를 그리며 주변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잡을까?’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맞지만, 분명 저놈을 처리하고 나면 더 뛰어난 이를 보낼 것이었다.

    ‘일단은 놔두고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겠구나.’

    그때 동굴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고, 그와 함께 주위를 맴돌던 기운은 급속도로 멀어졌다.

    “옜다!”

    퉁명스럽게 보따리를 던지는 걸인을 향해 정호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알아 오신 것은 없습니까?”

    “뭐?”

    “그냥 오시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날로 먹겠다는 심보냐. 이것도 나중에 성의를 표시할 때 같이 계산하도록 해라.”

    개방에게 있어 정보는 곧 돈이었다.

    그렇기에 알아 온 정보를 공짜로 넘겨주지 않으려는 걸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별다른 것은 없다고 하더라. 거리가 있으니만큼 최근의 정보는 아니겠지만, 장도 무사하고 영웅회도 마라문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지금은 대치국면이라고 했다.”

    “그럼 다행이로군요.”

    “다행은 무슨 다행? 도대체 네놈은 무슨 사고를 쳤기에 흑룡문에서 추풍검이 뛰쳐나오도록 만든 것이냐?”

    “예? 냉백이 흑룡문을 나섰단 말입니까?”

    “그래. 냉가가 자랑하는 수라파천대와 나찰지옥도객들이 모두 흑룡문을 떠났다는 전갈을 받았다.”

    ‘수라파천대와 나찰지옥도객들이? 그렇다면 전면전도 각오한 일이란 말인가?’

    “정사대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모르지. 아무튼 그들의 방향이 섬서로 향한다니, 아무래도 정가장이 목표인 것 같구나.”

    “개방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냥 그렇다는 전갈만 받았기에 모르겠다. 일단 너를 구한 상황과 지금 정가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전갈을 보냈으니 뭔 말이 있겠지.”

    ‘섬서에는 화산과 종남이 있다. 과연 그들이 냉백과 흑룡문도들이 공식적으로 섬서에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까? 그것도 전투부대를 이끌고? 흑룡문도 그들이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것을 알 것인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정호기를 향해 걸인이 소리를 질렀다.

    “크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늙은이 기죽이는 것도 아니고. 어서 옷이나 입어라!”

    걸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정호기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주섬주섬 그가 가져온 옷을 입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그들이 장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알았으니, 처음 목적대로 서둘러 장에 돌아가야 하겠지요. 괜한 사람들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어서 가자. 얘기는 가면서 하고.”

    ***

    “아니, 그럼 도대체 왜 흑룡문에서 너를 잡고자 추풍검을 내보냈단 말이냐?”

    정호기가 그저 사람을 찾으려 흑룡문을 기웃거린 것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하자, 걸인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낸들 알겠습니까? 아,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뭔데?”

    “제가 그들에게 잡힌 후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을 쳤는데, 그 와중에 한 전각에 들어가게 되었다가 본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여러 문파들이 기록되어 있고, 깃발이 꽂혀 있더군요.”

    “그래?”

    “예. 하지만 얼핏 본 것뿐이고, 나도 모르게 섬서를 중심으로 보게 돼서 그리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섬서를 막 지난 시점이었고, 산 하나만 넘으면 큰 현이 자리했기에 그곳에서 정보를 얻기로 했다.

    “일단 잠깐 저기서 쉬었다 가자.”

    산마루를 넘은 후에 걸인이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아마도 네가 본 그것이 뭔가 중요한 모양이다. 그러니 흑룡문에서 너를 잡고자 추풍검을 내보냈겠지. 자, 자세하게 말을 해 보아라. 네 말을 들은 연후에 방에 연락을 보내 그것을 좀 더 깊숙이 알아보라 할 것이니.”

    “예. 음, 일단 연운표국과 공씨세가, 그리고 유운산장의 이름이 적힌 곳에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고, 호북에는 인화산장, 하남에는 악가장에 같은 색의 깃발이 꽂혀 있었습니다. 서너 개 더 있었지만, 그곳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살펴보라고 한 그곳에는 마중마라고 적힌 깃발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원에 악가장이나 인화산장이란 이름의 문파나 가문이 여럿 있을지는 몰라도 하남의 악가장과 호북의 인화산장은 둘일 수 없었다.

    아니, 설사 있다고 해도 지명과 결부시키면 단 한 곳씩만 연상이 되는 곳이었다.

    “으음… 네가 말한 곳이 전부 세간에 알려진 곳이라면 정파가 아니더냐?”

    “예. 악가장이나 인화산장 모두 어르신께서 짐작하시는 그곳이 맞습니다.”

    “붉은 깃발이라……. 거기다 마중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설마 그곳들을 공격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사대전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가만, 너 하나로 인해 추풍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두 개의 전투부대를 이끌고? 음… 이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구나. 어쩌면 너를 핑계로 중원을 활보하면서 그들이 원하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너에게 그만한 혐의를 씌워야 할 것인데, 어떤 억지를 부리려는 것인지 몰라도 일이 진행된다면 너는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럴까요?”

    “물론이다. 정파는 흑룡문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을 테니까. 평화가 길어 그것에 길들여진 정파가 어째서 단 한 사람을 위해 흑룡문과 전쟁을 하는 길을 택하겠느냐?”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정파에서 저를 잡으려 하지는 않을 테지요?”

    “모르는 일이지. 일단 어서 출발하도록 하자. 아무래도 꾸물거릴 사건이 아닌 것 같다.”

    걸인의 말을 들은 정호기의 안색도 조금 굳었다.

    ‘이 거지의 말마따나 정파는 흑룡문과 정면 대결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가? 흑룡문의 목적은 내가 정파와 척을 지게 하는 것인가?’

    걸인의 뒤를 따르면서 정호기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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