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90화 (91/137)
  • 90화

    “웃기는군. 이게 네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

    그때 눈앞에 나타난 한 인물이 정호기를 비웃었다.

    “너는?”

    허연 수염을 기르고 냉정한 표정에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

    바로 혈신이었을 당시의 정호기, 바로 그였다.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지? 위선 떨지 마라. 네가 나였던 시절, 적을 베는 순간순간 느낀 것은 복수를 했다는 통쾌함이 아니라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한 희열이 전부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넌 지금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잖아. 지킬 것 없는 자유로움과 파괴에 대한 갈망으로 나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부인들과 자식들을 멀리한 것도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기 싫어서였지.”

    “아니란 말이다! 난, 난…….”

    “가족들을 사랑했다고? 부인과 자식은 가족이 아니었나? 넌 그저 파괴하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야. 그런 너에게 가족은 짐이었어. 지금의 너를 봐. 가족이 숨은 지금, 넌 자유를 느끼고 있잖아?”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였어!”

    정호기는 소리쳤지만, 이상하게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어때? 너도 그 말을 하면서 마음이 허전하지? 그건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야. 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려 줄까?”

    혈신이 다가오더니 정호기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넌 가족이 죽길 원해. 그래서 복수라는 핑계로 마음껏 살육하길 바라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니야!”

    격정적으로 도를 휘둘러 혈신을 베려고 했지만, 어느새 혈신의 손에 검이 들리며 그것을 막았다.

    “가족이 짐이란 것을 인정해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말을 마치자마자 혈신이 광랑십삼검으로 정호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너 자신을 숨기는 것에 지쳤지? 마음껏 너를 드러내고 싶지? 은근히 흑룡문에서 가족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길 바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너를 자유롭게 해 주길 바라고 있어. 그렇지?”

    광랑십삼검의 오의가 펼쳐지며 무수히 많은 붉은 늑대의 형상이 혈신의 검에서 뿜어져 나와 천지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는 와중에도 혈신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은근함마저 품고 있었다.

    쾅!

    폭음과 함께 피투성이의 정호기가 뒤로 튕겨 나갔고, 그런 정호기의 가슴을 혈신이 발로 밟았다.

    “나는 바로 너다. 내가 하는 말은 네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너의 은밀한 바람인 것이다.”

    “쿨럭! 컥… 아, 아니야.”

    “가족을 짐스러워했다는 것을 인정해라. 물론 처음 만났을 때는 좋았겠지. 죽어 버린 부모님을 만난 것을 기뻐했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넌 그들이 너의 삶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그래서 그들과 거리를 두고 멀어진 것이다.”

    “아니… 큭!”

    혈신이 정호기를 발로 걷어찼다.

    “정말이니?”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 쓰러진 정호기의 눈에 어느새 나타나 눈물을 글썽이며 서글픈 목소리로 묻는 백난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그래서 그렇게 나를 죽이고, 아버지도 죽이고 호태도 죽인 거니?”

    “아니에요! 이, 이건 그저 환상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에요!”

    “꼭 우리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란 말이더냐?”

    이번엔 정운룡이 슬픈 표정으로 정호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형…….”

    호태의 작은 손이 정호기의 눈물을 닦았다.

    “죽여라!”

    혈신이 정호기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나를 이기고 싶지? 나를 넘어서고 싶지? 그렇다면 죽여라! 죽이고 죽여서 나를 넘어 보란 말이다!”

    도발이었다.

    쓰러졌던 정호기가 일어서더니 도를 치켜들었고, 그 앞에는 정운룡과 백난영, 정호태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여.”

    어느새 다가온 혈신이 정호기의 귓가에 숨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우아아악!”

    정호기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나약하구나. 그래서야 어찌 나를 넘어서겠느냐?”

    정호기의 도는 가족들을 베지 않고 바닥에 박혀 있었는데, 그런 정호기를 혈신이 비웃었다.

    “그들을 베지 않는다면 너는 나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고,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주화입마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잠시 말을 멈춘 혈신이 다시 한 번 은근한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겠… 컥!”

    펑!

    정호기의 장력에 격타당한 혈신이 뒤로 튕겨 나갔다.

    “난, 지금껏 부모님의 안타까운 표정과 눈물도 나를 시험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네 말대로 주화입마에 걸려 쓰러질 것이라 생각해서 베고, 또 베었지.”

    돌아서는 정호기는 어느새 상처가 말끔히 나은 상태였고, 그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빛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나를 붙잡고자 하는 부모님의, 아니 내 자신의 배려였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너이던 시절, 주화입마에 걸리게 된 것은 무학의 간계도 더 높은 곳을 가고자 하던 내 마음도 아닌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걸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을 하는 정호기의 눈은 맑았고, 혈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확고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정호기를 마주한 혈신의 얼굴에는 예의 그 비웃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럼 내가 하는 말이 전부 옳은 것이란 것을 알겠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였기에 지금의 결과가 있는 것이었다.

    “너는 내 무의식 속의 존재. 그렇기에 네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네가 지금에야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더 크기에 그러한 것. 너를 인정하긴 하지만 너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다!”

    “이제야 철이 든 모양이군. 그러나 나를 베지 않는 한 너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혈신의 말에 정호기가 도를 고쳐 쥐며 가족들 앞에 섰다.

    “그리고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해도 같은 결과를 맞이하겠지?”

    “그것까지 알게 되었구나.”

    지금까지 정호기가 가족을 벤 것이 잘못된 길이라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파괴가 아닌 보호.

    그것을 이루어야 진정한 잠룡승천공이 완성되는 것이다.

    “과연 나를 상대로 지킬 수 있을까?”

    말이 끝나자마자 혈신이 검을 휘둘렀고, 예리한 기운이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하압!”

    정호기도 지지 않고 도를 휘둘렀는데, 그가 펼치는 것은 광랑십삼검이 아닌 절영도였다.

    콰콰콰콰쾅!

    허공에서 폭음이 터지며 혈신이 내뿜은 기운과 정호기가 쏟아 낸 기운이 부딪쳤다.

    “봐라! 너는 가족을 인정하면서 네가 떠안을 부담을 스스로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너는 그들을 모두 지킬 수 있겠느냐?”

    혈신의 말에 정호기가 뒤를 돌아보자 가족들 옆으로 천수신의와 백수련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부모인 백영호와 채진진도 서서히 형체를 갖춰 가고 있었다.

    “당연히.”

    정호기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혈신이었던 시절에는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오로지 앞만 보며 파괴하는 것이 전부였다.

    부인과 자식들도 그의 발목을 잡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네가 그들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인물들.

    이제는 진청운과 독고화란, 진수수의 모습도 보이고 영초린, 나상진을 비롯해 영웅회의 인물들과 태력문의 인물들도 나타나 정호기의 뒤를 가득 메웠다.

    “내가 저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지킬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정호기는 자신의 등을 떠받치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은 너에게 있어 짐일 뿐이다!”

    혈신이 순식간에 여덟 명으로 불어나며 정호기와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정호기도 순식간에 넷으로 불어나 사방에서 도를 그어 댔다.

    붉은 늑대의 형상과 늑대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쏘아지고, 형체 없는 예리한 기운이 그것들을 막아 갔다.

    “으윽!”

    신음 소리와 함께 정호기가 무릎을 꿇었는데, 당혜미에게 쏘아진 공격을 막느라 그의 왼쪽 어깨가 짓이겨진 상태였다.

    “그들을 지키려다 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과연 그 부담감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난 그들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론 희생도 나오겠지. 그러나 그 희생은 나를 더욱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네 우선순위는 가족이다! 넌 그런 이기적인 생각으로 그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고, 나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 적은 없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혈신을 바라보았는데,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내부를 투영하는 듯했다.

    “넌 가족을 거부하려던 내 마음이자, 그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애써 외면하는 나의 약한 마음이다. 그것을 가리고자 거칠고 강하게 나오는 것이지.”

    정호기의 말마따나 혈신은 정호기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뭉쳐서 나타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나를 이기지 못하는 한 넌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해!”

    “간다!”

    정호기가 외침과 함께 몸을 날렸다.

    내공이 도 끝에 모아지고 일시에 폭발하면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혈신을 덮쳤다.

    “하압!”

    그에 맞서 혈신도 혈랑광분을 펼쳤는데, 유성우를 물어뜯으며 정호기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퍼퍼퍼퍼펑!

    연속해서 폭음이 들리고 주변은 기와 기가 만나 일으킨 폭발의 흔적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욱한 먼지를 뚫고 혈신이 뒤로 튕겨져 나갔고, 그런 그의 뒤를 정호기가 바짝 따랐다.

    퍽!

    “크윽!”

    정호기의 발이 혈신의 턱을 후려침과 동시에 정호기의 주먹이 혈신의 배를 강타했다.

    쨍그랑.

    혈신의 손에서 떨어진 검은 어느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정호기의 손에 들려진 도가 혈신의 목에 겨눠졌다.

    “죽여라!”

    죽음을 갈구하는 혈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호기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초라했던가?”

    스스로를 인정한 눈으로 혈신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늙고 외로운,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있을 뿐이었다.

    어디에도 천하를 호령하거나 수천의 수하들을 거느리던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서 제대로 보는구나. 네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겠느냐? 넌 피에 미친 살귀였을 뿐만 아니라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늙은이였을 뿐이었다. 전쟁을 할 당시에는 너의 무력으로 인해 가려졌던 것들이 전쟁이 끝나고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너를 따르던 이들도 서서히 멀어져 갔지. 네놈이 죽을 날만 기다릴 때, 어째서 너의 곁을 지키는 이가 하나도 없었는지 이제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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