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뭘 멍청히 서 있는 것이냐? 어서 뛰지 않고!
걸인의 말마따나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맞은편에서 몸을 날리는 이들과 새카맣게 날아오는 화살이 있었으니까.
-예.
대답을 한 정호기가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들고 몸을 날리는 장구현 등에게 던지고는 빠르게 걸인의 뒤를 쫓았다.
“이 개새끼야!”
돌멩이 때문에 움직임의 제약을 받은 장구현이 절벽으로 떨어지며 외치는 욕지거리를 들으며 정호기와 걸인의 신형은 빠르게 멀어졌다.
***
“휴우…….”
길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뜬 정호기가 슬며시 밖을 바라보았다.
‘운기를 하는 동안 들어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럼 나를 해하려는 것은 아닌 모양인데, 아직까지도 어째서 저런 적의를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정호기는 걸인을 믿을 수 없었기에 무작정 운기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참고, 참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에야 운기에 들었고, 그것도 내공을 안정시킨 수준이었다.
완전히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선 좀 더 오랜 시간과 깊이 있는 운공이 필요했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 운기를 마쳤습니다.”
“그럼 이리 좀 와 봐.”
동굴의 입구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걸인이 정호기를 불렀다.
“네놈이 정호기란 놈이 맞지?”
“예.”
확인 절차를 마친 걸인이 다짜고짜 정호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네놈이 도대체 우리 개방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따위 의뢰를 했단 말이냐? 응?”
“어, 어르신, 무슨 말씀이신지?”
“자, 이거. 이게 네놈이 찾아 달라는 사람의 초상이 분명하지?”
걸인이 내민 것은 정호기가 개방에 의뢰를 할 때 건네준, 혈신이었을 당시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이었다.
“예, 맞습니다만…….”
“이것 때문에 실종된 개방도가 다섯이고, 그들을 찾으려고 떠났던 이들 중에서도 일곱이나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네놈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수련동 부근을 싸돌아다니다 흑룡문도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리라.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분명 저는 대금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란 것도 말씀을 드렸고요.”
“그래서? 책임이 없다?”
“…….”
“흥! 잘났구나, 잘났어. 그리 잘나서 그곳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것이냐? 혹시 우리를 이용해 시선을 끌고 뭔가 다른 수작을 부리려던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개방에서 소식이 없기에 저 스스로 알아보고자 왔을 뿐입니다.”
“네놈이 말한 곳은 그곳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어르신께선 어째서 그곳에 계신 것이었습니까? 제가 의뢰한 장소는 그곳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곳은 흑룡문의 구역이니, 당연히 흑룡문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었다.
“아주 청산유수구나, 에잉! 요즘 것들은 어째서 저렇게 다들 싸가지가 없는지 모르겠군. 어른이 말을 하면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까?”
정호기의 말에 걸인이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기서 개방과 척을 질 이유가 없으니 슬슬 달래야겠구나.’
“저… 어르신. 저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귀 방이 입은 피해를 물질적으로 보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장에 돌아가는 대로 성심성의껏 보상을 하겠습니다.”
“치워라! 어디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한단 말이냐!”
이미 실종자들을 죽었다 여기는 것은 정호기나 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고함을 지른 걸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놈들이 포기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어서 떠나기나 해야겠다. 네놈은 어디로 갈 테냐?”
걸인의 물음에 정호기가 북쪽을 가리켰다.
“섬서로 갈 생각입니다.”
“섬서? 영웅회인가 하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란 말이냐?”
“예.”
“쯧쯧, 생각이 아예 없는 놈이로구나. 아까 놈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흑룡문에서 네놈의 정체를 알고 있거늘, 영웅회에 속한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이냐? 설마 흑룡문이 자신의 구역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네놈을 이대로 그냥 아무런 일도 없이 놔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걸인의 말마따나 이대로 영웅회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 같으면 장으로 돌아가 가족들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겠다.”
이미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해야겠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았으면 어서 앞장서지 않고 뭐하느냐?”
“예?”
“장으로 돌아간다며?”
“예.”
“성의를 표시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목숨을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며 고함을 지른 것이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그것을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 내가 좀 뻔뻔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아무래도 네놈의 장원이 곧 횡액을 당할 것 같으니 미리 좀 챙겨 놔야겠다.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주 대놓고 정가장이 변을 당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왜?”
“예? 아, 아닙니다. 어서 서둘러 장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어르신의 말마따나 흑룡문 놈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정호기가 앞서 걸어가려 할 때, 갑자기 걸인이 뒤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분명 누가 있는 것 같았는데…….”
주변을 훑어보던 걸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호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응? 아, 인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서 살펴봤지만, 없구나. 아마도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그리 말을 하면서도 걸인의 신경이 온통 뒤쪽으로 가 있는 듯하자 정호기는 어쩌면 자신의 뒤를 따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무흔이 날린 화살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치명적인 공격을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럼 일부러 나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운기할 때를 노리지 않았을까?’
정호기의 시선이 걸인에게로 향했다.
‘아마도 저 거지를 의식한 모양이구나. 지금만 해도 난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느꼈다고 했으니까.’
가족에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가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사천에 들어선 두 사람은 다시 동굴로 들어갔는데, 정호기의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축골공을 펼칠 정도도 되지 않는다니. 그럼 진즉에 말을 하든가.”
“죄송합니다. 일단 그곳을 먼저 떠나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에…….”
“됐다. 어서 빨리 운기나 하여라.”
처음 만남이 그래서였는지, 이제는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듯이 하대가 자연스러웠다.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걸인에게 정호기가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거지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쌀쌀맞게 대답한 걸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을 나섰다.
‘어째서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군. 뭐, 어쨌거나 내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지만.’
걸인이 밖으로 나가자 자세를 잡은 정호기가 본격적으로 운공을 시작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아무리 내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현재를 살지 못하면 의미 없는 것을.’
자칫했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선택을 미룬 것은 자만이었어.’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외면한 자신이 한심했다.
‘마지막 도전이다. 만일 실패한다면 하나를 선택하리라.’
***
의식의 깊고 깊숙한 곳에서 만난 검고, 붉고, 하얀 세 갈래의 길은 여전히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운 채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움직여라! 움직여!’
오늘도 세 갈래의 길은 요지부동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결정을 내려 주겠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조당의 성격이라면 뒤에서 전전긍긍하지는 않을 테니, 일거에 몰아칠 확률이 높아.’
최소한 그때와 같은 낭패를 당하기 싫다면 이제는 진짜 결정을 내려 내공심법과 정신의 일치를 가져 잠룡승천공을 완벽히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내게 있어 필요한 것은…….’
흰색은 자신을 유(柔)하게 만들 것 같았고, 검은색은 어쩐지 꺼려졌기에 제외하자 결국 남은 것은 혈신이었던 시절 걸었던 붉은색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가족을 지킨다는 생각보다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한 정호기였다.
그렇기에 세 갈래의 길에서 갈등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에게 더 이상 갈등은 없었다.
거침없이 붉은 길을 따라 전진하는 그의 손에는 어느새 도가 들려 있었고, 그런 그의 앞에 사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냉백을 시작으로 공손우, 홍여립, 조당과 여진욱을 비롯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수하들.
여기까지는 소림사에서 겪었던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사준우를 시작으로 사비연, 백영호, 백수련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걱.
마지막 백수련의 목을 벨 때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도는 멈추지 않았다.
스르륵 녹아내린 붉은 안개가 서서히 형체를 이루어 가자 정호기의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었다. 바로 부모님과 동생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또 베어야 하는가?’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다가오는 부모님과 동생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호기는 쉽게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분명 허상에 불과하고, 이것을 베고 또 베어 자신의 감정을 죽여야만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악몽! 이것은 내게 있어 악몽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셋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다시 나타나겠지?’
혈신으로 불리던 시절에도 베고, 베고 또 베어서 결국 나중에는 스스로의 감정이 무뎌질 정도가 되어야 끝이 났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정을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니라 심적으로 고통을 받은 것뿐이었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정호기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순간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얼마나 베었을까?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며, 죽어 가는 가족들의 애절한 비명 소리는 정호기의 정신을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어째서! 어째서!’
꿈이란 것을 알면서도, 죽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 도망가는 심정이었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정호기는 서서히 미쳐 간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