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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88화 (89/137)
  • 88화

    “으음…….”

    옆구리를 관통한 화살로 인해 정호기는 피를 흘리며 도주 중이었다.

    ‘무흔, 네놈이 그 순간을 노릴 줄이야…….’

    모든 내력을 검에 실었기에 다른 곳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는데, 구멍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무흔이 쏜 화살이 옆구리를 찢고 지나갔다.

    ‘다행히 내장은 상하지 않은 것 같지만, 화살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을지 모르니 어서 빨리 안전한 곳에서 운기를 해야겠구나.’

    이 비밀 통로의 길이는 무려 이백여 장이었는데, 인공적인 것은 입구와 출구뿐이었고 나머지는 천연 동굴이었다.

    ‘왼쪽!’

    천연 동굴답게 중간중간 갈림길이 나왔지만, 정호기는 정확한 길을 따라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출구에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금 나가지 말고 이곳 동굴 어딘가에서 몸을 먼저 회복시키는 것이 좋겠으나 추격대가 뒤따를 것이기에 그것도 여의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추격대는 없었다.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싫은 것도 있었고, 조당이 누구도 자신의 침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있을까?’

    입구에 냉획이 있었으니 출구도 분명 그에 준하는 인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한다? 어디로 간다?’

    머리를 최대한 쥐어짰지만 다른 출구를 찾아본 기억은 없었기에 생각이 떠오를 리 없었다.

    ‘아! 만들면 되지. 왜 찾으려고만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혈신이었을 당시에야 다른 출구를 만든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때 가장 우려했던 곳이 어디였더라?’

    화산일미 방은진이 제 딸을 시켜 유만걸을 유혹해 배신하게 만든 뒤 이곳을 철저히 조사한 정호기였기에,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어둠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공이 활성화된 지금 안구에 내력을 집중했기에, 비록 대낮처럼 밝게 보진 못한다고 하여도 희미한 형체들을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서 또 내공이 소실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다!’

    출구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이었고, 사방으로 뚫린 동굴들 중에서 유난히 외벽 쪽으로 움푹 들어가 외벽과 가까우리라 예상되는 곳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멀어져야 한다!’

    손에 내공을 집중해서 벽을 파기 시작하자, 마치 무른 진흙을 쓸어내는 것처럼 단단한 바위벽이 푹푹 파여 나갔다.

    일 장여를 뚫고 들어가자 작은 구멍과 함께 빛이 새 들어왔다.

    ‘일단 주위에서 느껴지는 것은 없구나.’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구멍을 넓히고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젠장!’

    재빨리 동굴을 빠져나온 뒤 나무그늘에 숨은 정호기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내력을 움직여 심장박동을 늦춘 후,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 소란스러운데?’

    움직임의 방향이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산 아래쪽으로 향하였기에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현재 정호기가 있는 곳은 흑룡문의 뒤쪽에 자리한 산으로, 북쪽으로 움직이면 사천을 지나 섬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침입자가 있는 것인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어서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막 은신한 곳에서 몸을 빼려는 찰나 소란의 방향이 바뀌었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혹시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나?’

    갑자기 방향을 튼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정호기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있는 곳을 이렇게 빨리 찾아낼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해. 어쩌면 나를 끌어내기 위한 수작일지도 몰라.’

    결심을 굳힌 정호기가 은신하고 있는 곳으로 몸을 더욱 밀어 넣었다.

    * * *

    “아, 빌어먹을 놈들. 내가 삼 년 굶주림 끝에 본 개뼈다귀도 아닐 텐데 징그럽게 쫓아다니네.”

    누군가가 정호기가 은신한 곳 바로 옆에 내려서더니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응? 뭐야? 이런 곳에 웬 동굴이 또 있지?”

    그와 함께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다! 잡아라!”

    “이크!”

    후다닥 달려가는 인물을 본 정호기는 그의 빌어먹게 생긴 뒷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걸인?’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옷이 온통 누덕누덕 기운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개방의 인물인가?’

    정호기는 자신이 뚫고 나온 구멍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 걸인의 뒷모습과 그를 쫓아 안으로 사라지는 이십여 명의 인물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개방의 인물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혹시?’

    짐작이 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의뢰한 일을 하느라 조사하고자 올 수도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저놈의 거지새끼 때문에 움직이기가 어려워졌어.’

    자신이 뚫고 나온 곳을 지키는 십여 명의 인물들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이 이곳으로 도주했을 줄이야. 찾아라! 아마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서 장 대주님께 이 사실을 보고하도록.”

    무리를 이끌고 있는 이의 말에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장 대주라는 말을 들은 정호기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 대주? 장구현을 말하는 건가? 그놈이 온다면 들킬 수 있다. 어떻게든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겠구나.’

    장구현은 저돌적인 성격으로 인해 광저(狂猪)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무식한 놈인데, 무공은 냉백에 비해서 조금 처질 뿐이지 흑룡문 내에서도 이십 위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장구현 그놈이 온다면 공손우도 곧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 무리를 해서라도 벗어나야겠다.’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몸을 빼려는 찰나, 동굴에서 빠르게 솟구치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들어갔던 걸인이었다.

    나이는 오십 대로 보였으며 머리는 새끼줄로 질끈 묶어 그나마 단정했고,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짧은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놈이다!”

    쏘아지는 표창을 가볍게 피하고, 찔러 오는 검을 타구봉으로 슬쩍 밀어 버리는 걸인의 무공은 녹록하지 않았다.

    펑!

    쏘아져 오는 장력을 장력으로 마주쳐 낸 걸인이 훌쩍 재주를 넘고는 멀리 이동해 내려섰는데, 마침 그곳이 정호기가 은신해 있는 곳이었다.

    “응?”

    발밑의 촉감이 이상했는지, 무작정 땅바닥을 향해 장력을 때리는 걸인의 행동 때문에 정호기는 어쩔 수 없이 숨어 있던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놈이다! 정호기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공을 담아 소리치는 흑룡문도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멀리서 흉포한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장구현이었다.

    하나의 바윗덩어리를 연상시킬 만큼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게 나뭇가지를 밟으며 거의 날다시피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정호기와 걸인의 눈이 마주쳤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네놈이 정호기란 놈이냐?

    걸인이 전음을 보내면서 품속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초상이 그려진 두 개의 종이였다.

    그중 하나와 정호기를 번갈아 쳐다보던 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이 좀 자라긴 했다만, 네놈이 맞구나.

    말을 하는 걸인의 음성에는 약간의 적대감도 함께 묻어 있었고,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정호기였다.

    ‘개방의 인물이 어째서 내게 저런 적대감을 갖는 것이지?’

    거기다 개방의 인물들이 좀 괴팍한 면이 있긴 했지만, 첫 대면에 저렇듯 반말로 일관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암튼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에 나랑 얘기 좀 하자.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리며 쫓아오는 장구현도 문제였지만, 얼마 안 있어 이곳에 천라지망이라도 펼쳐지는 날이면 두 사람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이쪽!

    걸인의 말에 정호기가 잠시 갈등하다 그의 말을 따랐다.

    ‘이쪽은 절벽인데?’

    맞은편 절벽과의 이십여 장에 이르는 거리가 가로막고 있지만, 나뭇가지를 던지고 그것을 발판 삼아 뛴다면 불가능한 거리도 아니었다.

    문제는 나뭇가지를 던져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놈이 먼저 뛰면 내가 발판을 던져 줄 것이니 그것을 딛고 뛰거라.

    -대협께선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내 걱정은 말고 네놈 걱정이나 해라.

    도와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절벽 쪽이라 그런지 앞에서 막아서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그에 반해 뒤쪽에서는 마치 벌 떼처럼 두 사람을 쫓고 있었다.

    만일 뛰어넘는 것에 실패한다면 잡히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절벽에 몽황분을 풀어 버리면 반항이고 뭐고 할 것도 없겠지.’

    정파와 싸울 때 즐겨 사용하던 방법 중의 하나였기에 정호기는 자신이 절벽으로 떨어지면 흑룡문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었다.

    -검으로 적당한 나무들을 잘라라.

    걸인의 말에 정호기가 달리면서 검을 휘둘렀고, 그 뒤를 따르는 걸인이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취했다.

    -뛰어!

    드디어 절벽에 도착하자 정호기는 걸인의 말대로 힘껏 발을 굴렀고, 십여 장 정도 날아갔을 때 그의 눈에 빠르게 발밑으로 지나가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정확하게 내가 떨어질 때를 노려서 던졌구나.’

    그렇게 나뭇가지를 딛는 방식으로 두 번의 도약을 더 한 정호기가 건너편 절벽에 다다를 때 슬쩍 뒤를 바라보자 그제야 절벽을 떠나는 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흡사 새처럼 공중을 날아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조개(雕丐)라고 개방에 경공이 뛰어난 놈이 있습니다만, 문주님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놈이 있던가? 어떻게 됐지?]

    [그것이… 행방이 묘연합니다. 원래부터 개방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는데, 정파와의 싸움이 시작된 이래로 그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이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공손우가 한 말이었다.

    ‘이놈이 그 조개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스스로 나뭇가지를 던져 마치 징검다리처럼 그것을 밟고 절벽을 건넌 걸인이 어느새 정호기의 옆에 내려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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