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조당이 공손우에게 내가 말한 것이 잠룡승천공의 심결이라는 것을 알려 준 모양이구나. 하여 내가 광랑십삼검까지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런 무대를 준비했겠지?’
슬쩍 부서진 벽을 통해 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몰려 있기는 했지만, 들어오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기회다!’
냉획의 태도를 보니 자신이 잠룡승천공의 요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자신이 지금 펼치려는 무공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절영도를 펼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냉획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단은 공손우의 의도대로 광랑십삼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네가 광랑십삼검을 알지 못했다면 충격이 없을 것이지만, 알고 있기에 빈틈을 보일 것이다.’
광랑십삼검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냉획이었기에 그것이 정호기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당황할 것은 불 보듯 뻔했고, 그 순간이 정호기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었다.
“문주께서 언짢아하실 텐데 군사는 어째서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는지 모르겠군.”
정호기가 검을 뽑아 들었음에도 냉획은 한가하게 조당의 침실이 부서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현 강호에서 고수 이십 명을 추린다고 한다면 충분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가 바로 그였으니까.
“네놈을 이곳까지 보낸 놈들을 모조리 모아 놓고 단련을 시켜야겠구나.”
그 말에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정호기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놈들!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아주 배를 깔고 누웠구나. 그대로 묻어 주랴?]
냉획의 수련은 수련이 아니라 고문이었고, 한번 그가 나서면 정호기와 갈천하를 제외하고는 수련원들이 모두 드러누웠었다.
“자, 오려무나. 나도 할 일이 생긴 것 같으니 언제까지 너와 놀아 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문주께서도 기다리실 테고.”
냉획의 말에 마른침을 삼킨 정호기가 강기를 거두고는 내력을 천천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스쳐도 중상이다.’
냉가 고유의 낭아도는 상처를 자르기보다는 찢어발기는 기능을 하였는데, 냉획의 낭아도는 늑대의 이빨과도 같은 날이 곧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어긋나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단번에 뚫고 가야 한다!’
네 번의 회전을 이룬 후에야 내공이 검신으로 흘러들기 시작했고, 광랑십삼검의 최후 초식인 혈랑광분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응?”
내공이 검신으로 흘러들며 붉은 운무가 검을 감싸자, 냉획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이 깃들었다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서, 설마?”
붉은 운무가 서서히 검에 흡수되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갔는데, 검신 양쪽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늑대의 이빨을 연상시켰다.
“혈랑광분!”
정호기의 입에서 초식명이 외쳐짐과 동시에 검이 현란한 동작으로 휘둘러지면서 붉은 강기가 표창처럼 냉획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혈랑의 무리와 같았다.
콰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뒤로 밀려난 냉획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부, 분명 혈랑광분이었다. 완벽한 혈랑광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대 문주의 후계자는 조당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이 혈랑광분을, 그것도 완벽하게 펼칠 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대 문주님조차도 정사대전 당시 펼친 적이 없다는 혈랑광분이거늘…….”
혈랑광분은 광랑십삼겁의 최후 초식이었고,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조차 흑룡문 내에서도 아는 이를 찾자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냉획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뻥 뚫려 있는 바닥의 구멍을 냉획이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부서진 벽을 통해 조당과 공손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냉 장로님, 많이 다치…….”
공손우의 말을 끊고 냉획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저놈이 혈랑광분을 쓸 수 있습니까!”
냉획의 질문에 조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게 사질이 된다 하더군.”
“예?”
냉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사부께서 자식을 두었던 모양이야. 그의 제자가 바로 아까 그놈이고. 몰랐었나?”
조당의 질문을 받은 냉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대 문주님께 아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밀로 했단 말인가?’
흑룡문 전체가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던가?
그나마 조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흑룡문이 존재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분오열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슬쩍 그의 눈길이 조당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문주도 바랐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확실한 겁니까?”
“냉 장로가 보기엔 어떤가?”
솔직히 의심을 한다는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직접 혈랑광분을 겪어 보지 않았는가?
“절대 흉내만 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전 그것을 직접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말을 하면서 공손우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을 알고 이곳에 자신을 보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런 냉획의 눈길을 받은 공손우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렇다면 틀림없겠군. 군사는 이만 가도 좋네. 할 일이 많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
공손우가 떠나자 조당이 난장판이 된 자신의 침실을 한번 둘러보고는 냉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획.”
조당이 냉획을 장로가 아닌 획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친우로서 대답해 주게. 그놈을 알고 있었나?”
“몰랐네.”
“사부의 아들놈에 대해서는?”
“몰랐네.”
“놈은 사부의 계획이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더군.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말이네.”
“너무 늦은 감이 있군그래.”
“일찍 나섰다면 놈의 손을 들어주었겠는가?”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을 걸세. 어차피 살아남는 쪽이 모든 것을 가졌을 테니까.”
냉획의 말을 들은 조당이 부서진 침상에 다가가 엉덩이를 걸쳤다.
조당은 공손우에게 냉가를 의심한다는 듯이 말했었지만, 냉획의 대답으로 인해 그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둘은 그런 사이였으니까.
“내가 진정 궁금한 것은 말이네, 어째서 사부가 나를 살려 두었는가 하는 것이네.”
말마따나 전대 문주인 사마진혁이 그의 아들을 위해서 조당을 없애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이 자네를 아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겠나?”
말을 하면서 냉획이 조당의 옆에 앉았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일도 그분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어느 누구도 택하지 못할 정도로 둘 모두를 아꼈기에 벌어진.”
냉획의 말에 조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물론이네.”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조당이 화제를 돌렸다.
“어떻던가?”
“매서웠네. 자칫했으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훗! 자네가?”
조당은 냉획이 피투성이지만, 그것은 단지 살이 찢어진 정도이지 뼈나 내상은 전혀 없다는 것을 파악했기에 코웃음을 친 것이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냉획의 물음에 조당이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자네의 가문에 맡기기로 했네.”
“어디까지 바라는 건가?”
“더 이상 놈이나 놈의 사부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네.”
“놈들이 정파에 붙을 수도 있네. 그렇게 되면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할 것인데, 괜찮겠나?”
“어차피 정파와 붙을 생각 아니었나? 그게 좀 이른가, 늦는가 하는 차이지. 군사도 이미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고 있을 걸세. 하지만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냉가가 전면에 서야 할 것이네. 일을 벌였으면 그만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네.”
“아니, 준비는 벌써 되어 있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수련동에는 우리의 미래가 있지 않은가?”
“서두르는 이유가 뭔가?”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이잖나.”
“그렇긴 하지만…….”
말을 줄인 냉획이 조당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자네는 이번 기회에 아예 붙을 심산이구먼.”
알고 지낸 세월이 몇이던가?
얼굴 표정만으로도 냉획은 조당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내 후계가 정사대전의 주인공이 되기를 희망했네. 그래야 입지를 굳히는 데도 도움이 될 터이니까. 그런데 막상 이런 기회가 찾아오니 가슴이 뛰는군.”
“다 늙어 주책이지. 문의 위기라는 것을 내세워 전면에 서려 하다니…….”
책망하듯 말을 하는 냉획의 얼굴도 어느새 조당의 그것과 같이 변해 약간 들뜬 것 같았다.
“우리가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에는 그동안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무엇을 위해 피땀을 흘려 가며 무공을 수련했나, 이 말이네.”
“제대로 판을 마련해 주길 바라나?”
냉획의 말에 조당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주책 한번 거하게 부려 보세.”
“알았네. 어차피 놈은 우리의 표적이 됐다는 것을 알 것이니 꽁꽁 숨을 걸세. 그것을 빌미로 제대로 판을 짜 주겠네.”
“세작인 가문에는 일체 연락도 하지 말고 자중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으니,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네. 뒤는 걱정하지 말고 신명 나게 놀아 보세나.”
“홍가는? 홍가는 부르지 않은 텐가?”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한 곳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현재 조당이 믿는 것은 냉가뿐이었다.
지금 정파와 전면전을 벌이려는 것도 냉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수하들을 불신하며 전전긍긍하느니 내 역량을 펼쳐 보고,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둘 수밖에.’
쥐새끼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바엔, 차라리 초가집을 버리고 기와집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흑룡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중원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만일 정호기에게 붙은 변절자가 있다고 하여도, 조당 자신이 중원을 일통한다면 생각이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놈은 그냥 보내 주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래도 확인할 것은 해야지.”
“그럼 누굴?”
냉획의 물음에 조당이 천장을 가리켰다.
“설마 그를 보냈단 말인가?”
“가장 적임자이지 않나?”
“그라면 믿을 수 있지.”
냉획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만큼 조당이 준비한 한 수는 확실한 것이었다.
그런 냉획을 보면서 조당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지금의 정파라면 가능성이 있다. 굳이 사부가 준비한 힘을 쓰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이야.’
조당의 눈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곳을 뚫고 높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