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86화 (87/137)

86화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지.’

정호기는 두 대의 화살이 좌우에서 회선하며 꼬치 꿰듯 꿰려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잡고 있던 화살을 놓으며 천근추를 펼쳤다.

‘남은 시간은 약 반 시진. 그 후에는 어린아이보다 약해진다. 서둘러야 해.’

잠력의 폭발과 함께 오감이 영민해지고 내공이 증가했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부작용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허…….’

자신을 따라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화살을 보면서 정호기는 무흔의 성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두 대의 화살과 두 번의 전환이라… 복수심으로 인해 무공의 성취를 이뤘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걸?’

정호기가 혈신이던 당시의 무흔은 무려 다섯 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두 번의 전환은 보여 주지 못했었다.

‘깨달음의 차이가 양과 질의 차이로 나타난 모양이구나.’

전각의 지붕을 뚫고 들어간 정호기가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지자, 그가 있던 곳에 화살이 꽂히며 폭음이 일었다.

‘마지막까지 힘을 싣다니…….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르겠구나.’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필히 가장 먼저 죽이리라 다짐하면서 그는 전각의 벽을 뚫으며 잠룡각을 향해 달렸다.

“잡아라!”

사방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들이 앞길이 험난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몽황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몽황분을 만난다면 저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겠지만, 이곳은 전각들 사이로 바람이 거셌고, 완전히 가둘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콰직!

다시 가로막은 벽을 뚫자 벌거벗은 여인들 몇몇이 정호기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여인들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정호기의 신형은 이미 맞은편 벽을 뚫고 있었는데, 스치듯 본 한 여인의 얼굴이 그의 눈에 익었다.

[무, 문주님을 뵙습니다.]

수줍은 것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종웅이의 부인이었지?’

여진욱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하 중의 하나였다.

쾅!

마지막 벽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정호기의 손에는 언제 얻었는지 검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평범한 검이었기에 덩치에 비해서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퍽!

정호기가 앞을 막아서는 무인의 가슴을 걷어차고는 땅을 박찼다.

그런 그의 뒤로 쏟아지는 화살과 암기들이 그가 떠난 자리를 메웠는데, 어느새 정호기는 전각들의 지붕을 밟으면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난리가 났군.’

하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흑룡문 한가운데서 이리 소란을 피웠으니.

뒤에서 쫓아오는 이들과 주위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는 이들이 마치 벌 떼와 같았다.

‘전각을 빠져나올 때 시간을 끌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쏴라!”

타타타타타타탁!

결국 참지 못했는지 명령과 함께 화살이 공중을 수놓으며 쏟아졌고,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전각들의 지붕을 두들겼다.

“크악!”

미처 피하지 못한 하인들과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명령을 내리는 이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뭣들 하느냐! 멈추지 말고 쏴라!”

뒤쪽에서는 화살이, 앞쪽에서는 잠룡각을 지키던 무인들이 정호기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냉하진.’

잠룡각을 지키는 무인 중의 하나이자 뒤쪽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 냉하정의 동생인 냉하진의 얼굴이 보였다.

항상 자신보다 앞에서 선봉을 서려 했었고, 그런 그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손수 뽑아 줬던 놈이었다.

[문주님, 쿨럭……. 머,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그를 향해 정호기가 검에 기를 담아 강하게 내리찍었다.

쾅!

동시에 발을 뻗어 냉하진의 가슴을 걷어찬 정호기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그의 발목을 붙잡아 왼쪽에서 달려드는 이들에게 집어 던지고는, 자신은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발에 밟히고, 걷어차이고, 주먹에 얼굴을 맞아 날아가고, 검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해 뒤로 튕겨져 나가는 흑룡문도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지만, 추억 때문에 목숨을 빼앗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해!’

만일 여기서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다간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흑룡문의 원대한 계획을 이어받는다는 말을 해 놓고는 바로 흑룡문도들을 주살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녹록한 흑룡문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에 걱정하는 정호기였는데,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이들이 그것을 현실로 인식시켰다.

‘서둘러야겠다.’

잠룡각 주변에는 고수들이 머물 만한 곳이 별로 없었는데, 그것은 흑룡문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 머무는 곳은 외벽 근처였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무공을 못하는 이들의 거처나 이제 막 무공을 배우는 이들의 거처가 중심을 이뤘다.

들어가기도, 나가기도 힘든 곳이 바로 흑룡문이었지만 이렇듯 미리 들어온 상태라면,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오히려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손우 그놈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까?’

잠룡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가서야 그의 예감처럼 공손우가 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조당이 빠져나갔으니 그를 지키기 위한 고수들도 조당의 주변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공손우가 정호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들을 고른 것이다.

‘혈랑대구나.’

잠룡각에 마련된 연무장에 다섯씩 짝을 이뤄 기다리고 있는 삼십 명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합공을 익힌 혈랑대가 분명했다.

이는 그들이 들고 있는 기이한 무기로 알 수 있었는데, 보통 검보다 한 배 반은 더 긴 것 같은 검신과 삼각형의 모자를 씌운 것 같은 특이한 검첨이 그것이었다.

검신 옆으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돌기는 상대를 찍을 뿐만 아니라 끌어당길 수도 있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베는 것이 제약을 받을 수 있지만, 어지간한 것은 그냥 잘라 버릴 만큼의 실력은 되었다.

‘네놈들과 수십, 수백 번을 싸운 나다. 네놈들의 약점은 훤히 알고 있어!’

지금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난 혈랑대를 상대로 대련을 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합공의 핵심을 파악한 정호기였기에 이들을 간단히 돌파할 것이라 생각했다.

‘중추는 없다. 고수는 합공의 맥을 정확히 짚는 데 탁월한 놈들이고,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역의 역을 찌르기 위해 다섯이 하나를 이루도록 만들어졌으니 수레가 구르기 전에 수레 자체를 박살내야 해.’

아직 진이 발동하기 전에 강력한 힘으로 하나를 박살내든, 다섯을 일 장 정도의 간격으로 벌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정호기는 그런 힘이 있었고,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검에 내력을 모으는 중이었다.

‘간다!’

그런데 막 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 할 때 갑자기 머리 꼭대기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서둘러 몸을 움직여 피했는데, 그의 등줄기를 훑으며 화살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다.

‘어째서 느끼지 못했지?’

그러나 정호기가 느끼지 못한 것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벼락처럼 화살들이 그를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으니까.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화살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화살들은 정확하게 정호기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마도 무흔이 재주를 부린 것이리라.

‘머뭇거릴 수는 없다!’

결심을 굳힌 정호기가 남은 내공을 쥐어짜서 몸 주위에 강기막을 쳤다.

지난날 몽황분을 돌파할 때와 같은 강기였기에 진정한 호신강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화살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팅! 팅! 팅! 팅!

‘역시…….’

목표 지점을 잡고 화살에 깃들어 있던 내력을 풀어 버렸기에 그것에 깃들어 있는 살기와 힘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정호기가 그것을 감지하는 데 한발 늦은 것이었고.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진기가 화살을 감싸고 있어서 그냥 맞았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겠구나.’

“하압!”

기합을 넣은 정호기가 정면에서 쇄도해 오는 다섯 명의 혈랑대원들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절영도 최후의 초식인 절영이 펼쳐지며, 검에서 빠져나온 다섯 줄기의 강력한 힘이 마치 벼락과도 같이 공간을 찢으며 적을 강타했다.

콰콰쾅!

“크윽!”

신음 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뚫리자 정호기는 미련 없이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

‘강기를 펼치느라 시간이 단축되었다.’

약 반 시진가량의 여유에서 이제는 그것에서 일 각 정도가 줄어든 상황이었고, 강기를 때리는 화살에 반응해 내력이 소모되고 있었기에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화살만 아니라면 여유가 있었을 텐데…….’

화살 하나를 막으며 소모되는 내력은 별것 아니었지만 그것이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이 신경 쓰였고, 또한 화살이 강기막을 때릴 때마다 그것에 반응하는 내공을 추슬러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잠룡각은 고수들이 모두 빠져나간 상황일 것이다.’

흑룡문의 모든 움직임은 문주인 조당을 위주로 이루어졌기에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용담호혈이었고, 조당이 자리를 비운 지금 잠룡각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텅 비어 있을 것이었다.

물론 혈랑대가 있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비어 있지는 않을 테지만…….

혈랑대를 지나치자마자 땅을 박찬 정호기가 이 층에 있는 조당의 침실로 몸을 날렸다.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쾅!

벽을 부수고 조당의 침실로 들어간 정호기는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단 한 사람에 의해.

“흠…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단 소리를 듣긴 했지만, 정말 올 줄은 몰랐군.”

낭아와 같은 도신을 가진 도를 들고 서 있는 차가운 인상의 노인. 바로 냉백의 부친인 냉획이었다.

“냉획!”

냉백이 전성기를 맞고 있는 호랑이라면 냉획은 노회한 늑대였다.

“허… 어린놈이 나를 알다니 기특하구나. 안다면 말이 통하겠지? 곱게 끌려갈 테냐, 어디 한 군데 잘린 후에 끌려갈 테냐?”

정호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뭉클 피어오르며 대답을 대신했다.

“어쩔 수 없군. 옜다.”

고개를 흔든 냉획이 뒤쪽 탁자에 놓여 있던 검을 들어 정호기에게 던졌는데, 그것은 혈신이었던 시절에 사용했을 법한 검처럼 무척이나 커다란 장검이었다.

“왜 네놈에게 이것을 주라 했는지 모르겠구나. 네놈이 익힌 것은 도법이라고 들었는데 말이다.”

던져진 장검을 받아 든 정호기는 공손우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