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니야. 이놈이 하는 말을 모두 믿을 순 없지. 나를 기만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어.’
생각을 정리한 조당이 정호기에게 물었다.
“무엇이냐?”
조당의 질문에 정호기가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사백의 상대는 바로 당신이시라고요.”
정호기의 말을 들은 조당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 말은 언젠가 나와 정면으로 대결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냐?”
“물론 그것은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을 때입니다.”
“준비라? 얼마나 걸리지? 설마 내가 늙어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는 것인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조께서 준비하신 계획은 사부님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것은 사부님 자신의 권리라 생각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선전포고냐?”
조당의 물음에 정호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선전포고는 했습니다만, 지금 제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상관없습니다.”
“아, 무영의 검집. 잊고 있었군.”
말을 마친 조당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는데, 그것을 정호기가 내심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다!’
턱을 쓰다듬는 버릇은 익히 정호기가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럴 때의 조당은 반응이 느렸다.
조당이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조금씩 모아 온 내공이 드디어 단전을 가득 채웠기에 준비는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진기를 휘돌리다가는 조당에게 들킬 수 있기에 한꺼번에 격발시켜야 했다.
삐꺽.
오른쪽 발바닥에 힘을 줄 때, 바닥에서 살짝 소리가 들렸지만 조당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정호기가 순간적으로 내공을 폭발시킬 때에야 비로소 조당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려 졌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정호기의 신형이 조당의 코앞에 들이닥친 상태였다.
‘성공이야!’
이대로 공격이 먹혀 조당을 인질로 잡을 수만 있다면 흑룡문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리하게 내공을 폭발시켜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단전!’
이미 공격할 부위도 염두에 둔 상태였다.
잠룡승천공은 내공이면서도 외공과 같이 조문이 존재했는데 조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극천혈은 겨드랑이에 있어 공격하기 쉽지 않았고, 더군다나 지금처럼 팔을 내리고 있는 상태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호기의 공격에 반응해 몸을 일으킬 때 단전을 노린다면 가능성이 있었고, 그 충격으로 인해 일시간 내공을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사로잡을 가능성도 높았다.
찰나지간 정호기와 조당의 눈이 마주쳤고, 그 속에서 갈등의 빛을 읽은 정호기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갈등을 해?’
기습을 당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갈등이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촉박한 순간이었다.
‘젠장! 실패다!’
쾅!
정호기의 손과 조당의 손이 만나며 폭음과 함께 정호기의 신형이 전각의 벽을 부수며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 * *
‘이런…….’
도망가는 정호기를 보면서 조당은 공손우와 계획했던 것이 틀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더군다나 저릿한 손바닥의 감촉을 보건대 정호기의 공격을 흘려 맞았다고 해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부상을 당하기로 한 계획으로 인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단 소리였다.
‘이건 나중 문제겠지?’
서둘러 밖으로 나간 조당이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가자, 멀리서 흑룡문의 내부를 향해 달려가는 정호기와 그 뒤를 쫓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비밀 통로를 알고 있구나.’
정호기가 향하는 방향.
그곳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잠룡각이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존재했다.
그때, 마침 자신에게 쏘아진 화살을 붙들고 날아가는 정호기와 눈이 마주쳤다.
비록 먼 거리였지만, 서로의 눈빛을 읽을 정도였기에 조당은 정호기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저런 눈빛을 보내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애증.
‘차라리 아까와 같은 냉소적인 태도나 적대감이라면 모르지만, 아련한 눈빛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이라니?’
그런 의문을 품은 조당의 옆으로 공손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주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러네. 내가 자네의 계획을 망친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아닙니다. 어차피 놈이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진짜로 해약을 가지고 있었군요. 분명 철저히 수색했고, 놈이 배설을 하는 장면을 지켜본 연후에 손수 그것을 버리기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지난 열흘간 거의 잠을 자지 않다시피 하면서 조당이 오기 전까지 정호기를 지킨 공손우였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배 속에 숨겼다고 해도 이미 나와도 한참 전에 나왔어야 했으니까.
혹시라도 놓친 것이 있을지 몰라 밤에 잘 때 수혈을 찍고는 정호기의 몸을 샅샅이 살폈었다.
“제가 뭘 놓쳤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공손우를 보는 조당의 눈에는 일말의 의심의 빛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과연 놓쳤을까?’
절대적이라 믿었던 신뢰에 약간의 금이 갔다.
‘나도 몽황단을 먹어 본 적이 있지만, 나 스스로는 몰아내지 못했었다. 결국 해약을 먹어야만 했지.’
이것은 내공의 많고 적음이 아닌, 깨달음과 운용의 문제였다.
이미 극성으로 익혔던 정호기에 비해 조당은 잠룡승천공에 대한 이해와 운용 능력이 떨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이미 멀어졌습니다.”
“죽이진 않겠지?”
“예. 문을 벗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치열하게 쫓되 놈의 생명만은 붙여 놓으라 했습니다.”
“알았네.”
“한데 문주님.”
“왜 그러나?”
“제가 없는 사이에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를 사백이라 부르더군.”
“예?”
공손우의 반문에 조당은 정호기가 했던 말들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그럼 정파나 황궁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문뿐입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말이네.”
“일단 전대 문주님과 가까웠던 분들의 가문을 모두 용의 선상에 올리고 정보를 차단해야겠지요. 가능하다면 놈들을 모두 잡을 때까지 가택연금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냉가라는 사실을 알고도 하는 말인가?”
이게 문제였다.
만일 지금 냉가를 홀대하거나 격리시키려고 한다면 다음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그 어느 때보다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부에 대한 불신은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호수에 던져진 돌이 일으킨 파문처럼 넓게 퍼져 나갈 것이니 말입니다. 강력한 대응과 신속한 조치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공손우의 말을 들은 조당이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놈에 대한 모든 일을 냉가에 일임시키도록 하게나.”
“예?”
“단, 일 년의 기한을 주고 그 안에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면 마중마 연성 계획과 천이 계획에서 한발 물러서게 될 것이며, 그 모든 일을 홍가에서 위임받게 될 것이란 것도 같이 전하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냉가에서 무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해도 상관없네. 만일 그놈들이 정파에 투항이라도 한다면 일 년이란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버리는 것이 있는 만큼 얻는 것도 있어야겠지? 일 년 안에 놈들을 살려서건 죽여서건 모두 내 앞에 데려다 놓는다면, 냉가에게 마중마 연성 계획에 투입된 아이들 중에서 원하는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홍가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이미 홍가는 한 번의 기회를 날려 버렸네.”
홍여립으로 하여금 정호기를 처리하라 하였는데, 그것을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외부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침투한 세작들과의 연락도 일절 금하겠다. 그리고 군사는 은밀히 그들과 내통하는 이들이 있는지 문내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하게 파헤쳐, 의심이 드는 자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잡아다 심문해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하라!”
“명을 받듭니다.”
후계의 연성은 홍여립이, 정호기와 그의 사문에 대한 처리는 냉백이, 그리고 흑룡문 내부의 첩자에 대한 처리는 공손우가 분담하여 한 가지 일에 한 사람씩 각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명령을 받는 공손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문주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렇다고 냉가에 일을 맡기시다니…….’
의심.
바로 그것에서 비롯된 일이란 것을 공손우는 알고 있기에 조당의 태도가 걱정이었다.
‘냉 당주를 위시해서 냉가는 흑룡문 내에서도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거늘.’
최대한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던 공손우의 계획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파에서 들고일어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니, 나는 이후에 전쟁을 최대한 길게 끌어가는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공손우의 눈이 잠룡각으로 향했다.
‘일단 냉가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겠구나.’
정호기가 도주하고자 하는 곳에 준비시킨 사람이라면, 그의 반응으로 정호기와 어떤 사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문주님, 저놈의 미행은…….”
“그것은 신경 쓰지 말게.”
“예.”
공손우가 물어본 것은 문을 벗어난 이후에 정호기를 미행할 사람을 붙이자고 하자 조당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기에 한 말이었다.
‘누구이기에 문주님께서 저리 자신하는 것일까? 정말 다른 사람을 붙이지 않아도 되려나?’
일말의 걱정은 있었지만, 조당이 결정한 일이기에 뭐라 말할 순 없었다.
‘어쨌거나 놈이 잠룡각에 도착하면 한 가지라도 의문이 풀리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하나하나씩 정호기의 껍질을 벗겨 가다 보면 언젠가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는 공손우였다.
***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무흔의 화살을 손으로 잡으며, 그 힘에 몸을 맡긴 채 날아가는 정호기의 눈에 멀리 조당의 얼굴이 보였다.
어찌 추억이 없겠는가?
[오늘 술 한 잔 하겠느냐?]
[어제도 마셨습니다.]
[녀석, 어제 마신 술이 아직까지 배 속에 남아 있단 말이냐?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정호기가 잠룡승천공을 대성하자 조당은 늙고 병든 몸이었지만 정호기와 술을 마시는 내내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치 자신의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정호기의 손을 꼭 붙잡고서 평안한 얼굴을 하고 세상을 떠났었다.
‘다음에는…….’
오늘은 비록 이렇게 쫓겨 가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자웅을 겨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