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황송하군. 무흔이 직접 나를 감시하다니 말이야.”
“…….”
“공손우는 어디 있지?”
이 질문을 끝으로 정호기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무흔이 수혈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어느새 들어왔는지 공손우가 잠든 정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입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어쩐 일이십니까?”
“아, 출발 준비가 돼서 데리러 왔습니다.”
말을 하며 공손우가 손짓하자 그를 따라온 장한이 정호기를 안으려 했지만, 무흔이 그를 제지했다.
“놈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그들이 전각을 나섰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마차였다.
정호기도 누울 정도로 커다란.
아마도 수레를 개조한 것 같았는데, 특이하게 문이 좌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있었다.
***
“정신이 드셨습니까?”
깼다 잠이 들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정신이 들었을 때, 정호기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싸고, 치료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정호기에게 말을 거는 이는 한 명도 없었고 무흔의 삼엄한 눈길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공손우였고, 맞은편에 앉아서 정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마치 늑대가 먹이를 노리듯 무흔이 정호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중경으로 들어섰는데, 경치 구경이라도 하시지요?”
공손우가 창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정호기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돌투성이 산이 뭐 볼 것이 있나?”
“쯧쯧, 정취를 모르시는구려.”
“보아하니 역암산 같은데, 무슨 정취씩이나. 살기 풀풀 풍기는 살귀들이나 없으면 다행이지.”
정호기의 말에 공손우의 얼굴이 굳었다.
말 속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귀들이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훗! 나를 떠보는 것인가? 혈랑들이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굳이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하나?”
“허… 혈랑대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그대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구려.”
혈랑대는 혈랑처럼 제 동족의 살도 물어뜯을 혈귀들을 말함이었다.
마중마 연성 계획이나 천이처럼 은밀히 흑룡문이 키우는 무인들이었는데, 본문과 분타에서 모은 삼백의 젊은 흑룡문도들을 선별해 합공 위주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것으로 아는데?”
“황궁 소속이라는 얘기라면 더 이상 하지 마시지요. 이미 알아볼 만큼 알아봤으니까.”
“어디까지?”
“황제가 모르는 조직은 있을 수 없지요.”
함부로 황제라 부르는 공손우의 얼굴엔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하긴 누가 듣는다고 해도 이곳엔 그것을 고할 사람이 없으니 그런 것일지도.
“왕진을 구워삶은 것인가? 좋아. 그럼 더 이상 황궁은 못 팔아먹겠군.”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오히려 환관인 왕진이 그의 위에 있다 생각하는 백성들이었기에 흑룡문에서 왕진을 통해 알아봤다면 확실할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더 궁금한 것은 어째서 그대가 아직까지 우리 수중에 있느냐는 거지요.”
정호기의 나이에 맞지 않는 무위와 흑룡문 내외부의 정보를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보는 조직이라면 벌써 정호기를 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구하려는 시도라도 해야 할 것이지만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공손우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공손우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런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한 것과 황궁에서의 일을 보고받느라 그런 것이었다.
“벌써부터 밑천을 다 까발리라는 건가?”
공손우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되오이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내 대답을 듣고 싶으면 문주와 만나게 해 줘야 할 거야.”
공손우의 눈이 빛났다.
‘문주님과 만나게 해 달라? 그것이 목적인가?’
의문투성이인 정호기에게 분명 조당도 관심을 드러내고 있기는 했지만, 함부로 조당과 만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혹시라도 문주님께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홍가와 냉가의 갈등이 폭발해 문이 사분오열될 가능성이 있다.’
유심히 정호기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다.
‘아니야. 이놈이 그리 쉽게 자신의 목적을 밝힐 리 없어. 그럼 노리는 것이 뭘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자승자박.
머릿속에 든 것은 많은데 정호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공손우는 스스로를 동아줄로 꽁꽁 묶어 번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물론 문주님께서도 그대와 만나길 희망하고 계시니 어려울 것은 없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대를 문주님 앞에 데려다 놓으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소이까?”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그 힘을 더해 백회로 가고자 하지만, 중정과 옥당이 수문장이 되어 가로막는구나.”
‘백회? 중정과 옥당?’
지금 정호기가 말한 것은 모두 혈도들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내공구결의 일부인 것 같은데, 처음 들어 보는 것이기에 공손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다 중정과 옥당을 거쳐 백회로 간다고? 그건 일직선으로 몸을 관통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 운용법이 있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았고, 주화입마에 걸려 침상에서 자리보전하고 싶으면 시도해 봄 직한 방법일 뿐이었다.
“무슨 뜻이오?”
“문주한테 말하면 알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정호기 스스로 눈을 감았다.
무흔은 죽일 듯이 노려보고 공손우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정호기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기만을 바랐다.
‘최소한 계획을 세울 시간은 있어야 해.’
급조한 계획이었기에 그것을 다듬고 살을 붙여야겠건만, 계속해서 수혈을 찍는 바람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먹힌 건가?’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그의 뒷목을 가만히 누르는 손이 있었다.
‘썩을…….’
정호기는 지금 포로의 몸이 된 것부터 시작해서 인생이란 역시 언제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정호기의 수혈을 찍은 무흔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손을 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공손우가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정호기가 뱉은 말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
“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예.”
정호기의 말을 전해들은 조당이 처음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다음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
“놈을 구하려는 수작은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흐음…….”
턱을 괴고 앉아 한참을 고민하던 조당이 입을 열었다.
“놈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공심법의 요결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잠룡승천공의 요결 중 하나이네.”
“예?”
공손우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일이었다.
“어, 어찌 그런 일이?”
좀 너그럽게 생각해서 인화산장이나 귀접의 일은 알 수 있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한 일이지.”
조당의 말마따나 조당의 머릿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바로 잠룡승천공의 요결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대대로 잠룡승천공과 광랑십삼검은 구두로 전대 문주에서 다음 문주에게로 전해지는 것이었으니까.
공손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그놈을 살려서 데리고 온 자네의 결정이 훌륭했다고밖에 할 수 없군.”
잠룡승천공의 요결을 알고 있다면 철저히 배후를 파고들어야 했다.
어쩌면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일단 좀 두고 보세.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대신 그놈 주위에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예.”
“아, 그리고 놈에게도 일러 주게나. 만일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뱉는 날에는 죽여 버리겠다고. 그것이 설사 잠꼬대라고 하여도 말이네.”
“알겠습니다.”
공손우가 나가자 조당이 자신의 품을 만졌다.
‘단 한 권씩인 비급들도 모두 내 품에 있고, 이것은 사부에게서 받은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구두로 전해지며 비급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비밀 지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호기가 속한 단체의 능력에 감탄했었는데, 이건 기절초풍할 만한 사건인 것이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잡혔을 때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했을 때 믿는 구석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군사는 가능한 모든 정보통을 이용해 그놈이 잡혔다는 소식을 나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놈을 구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호기가 그냥 버려도 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단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력을 보유한 곳일 것이다.
‘놈이 쓰다 버릴 소모품이었다면 잠룡승천공의 요결을 지껄이지도 않았겠지. 그럼 우리를 자극한 것이 잡힐 가능성도 염두에 둔 것이었나?’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조당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 가고 있었다.
***
정호기는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층의 전각이었고 주위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는데, 단지 그것뿐이었다.
오늘로 열흘째.
그동안 본 사람은 공손우가 유일하였고, 밥과 몽황단을 주고 대소변을 본 통을 치우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으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몽황단이 지독한 약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해독하는 방법은 이미 정호기의 머릿속에 있었고 굳이 해독약이 아니라고 하여도 해독할 자신이 있었다.
‘조당이 나를 부르는 그 순간이 유일한 기회겠지? 하지만 그놈이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부르지 않고 찾아올 것인데…….’
조당의 침실에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한다면 도망칠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그런 기회를 제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의 경계도 만만치 않을 테고.’
내공을 운용할 수 없기에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분명 이곳 전각을 중심으로 물샐틈없는 경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내공을 회복한다고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게 관건이군.’
시기가 맞아떨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