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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82화 (83/137)

82화

“컥!”

격하게 올라오는 이물질을 뱉고 나니 속은 한결 후련해졌지만, 땅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그것을 보자 마음은 무거워졌다.

“지독한 놈들…….”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은 자신이 한때 기특하게 생각했던 천살대가 분명했다.

“이제야 그때 그놈들이 왜 그렇게 지랄했는지 알겠군.”

근 두 시진을 쉬지도 않고 몰아붙이는 천살대의 지독함에 어째서 정파 놈들이 천살대에 쫓기면 차라리 죽겠다며 무기를 들고 돌아섰는지 알 것 같았다.

핑!

“후읍!”

머리를 스치는 화살.

그것은 천살대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나도 차라리 저놈들과 싸우고 싶구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살대에는 화살만 잘 쏘는 놈들이 있는 게 아니라 검이 날카로운 놈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천살대가 무서운 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무기에 서슴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놈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도 저곳에 가면…….’

멀리 화광이 충천한 전각군이 보였는데, 바로 영초린에게 마라문도들을 이끌라고 한 장화표국이었다.

‘너무 자만했다.’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 흑룡문과 맞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상대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흑룡문이거늘…….’

갈지자로 신형을 옮기며 화살을 피한 정호기가 막 언덕을 넘으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불쑥 검이 날아왔다.

“헉!”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검이 팔을 스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몸이 정상이라면 아무리 암습이었다고 해도 간단히 피했을 공격인데, 지금은 정상이 아닌 것이다.

기이잉!

공기를 찢으며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본 정호기가 우측으로 피하는 찰나, 어떻게 된 일인지 화살이 그를 쫓아 방향을 바꾸었다.

챙!

한 번의 충돌이 정호기를 멈춰 세웠다.

챙! 챙! 챙! 챙!

도와 화살이 네 번 만나는 동안 어느새 정호기의 주변으로 복면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을 때 그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몽황분!’

아까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검에 생각이 미쳤다.

‘그게 무심의 검이었나?’

검에 묻은 몽황분이 상처를 통해 침투했을 것이다.

‘복수심이 무흔을 각성시켰나?’

아까 화살이 자신을 따라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흐려지는 눈을 부릅뜨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한번 자만한 대가가 죽음이라면, 난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복면을 벗어 던진 정호기가 자신을 포위한 천살대를 훑어보고는 정면을 향해 소리쳤다.

“무흔!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나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마치 그 대답이라는 듯이 화살이 정호기의 정강이를 노리고 쏘아졌다.

“하앗!”

정호기가 정강이를 노리고 쏘아진 화살을 밟고 앞으로 날아갈 때, 사방에서 무수히 많은 화살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퍽! 퍽! 퍽! 퍽!

‘죽지 않는다!’

알고 있었다.

천살대의 화살은 살은 뚫어도 뼈까지는 가지 않을 정도 뭉툭하다는 걸.

화살촉에 바른 몽황분을 이용해 원하는 목표를 사로잡기 위한 것이니까.

화살을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온몸에 박은 정호기의 눈에, 무심한 눈으로 활을 들어 올리는 무흔의 얼굴이 보였다.

“흐압!”

천지를 가를 것 같은 패기로 정호기가 도를 내리찍을 때, 무흔도 동시에 화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 * *

정호기의 검에서 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무흔에게 쇄도해 들어갈 때, 무흔이 날린 화살은 이미 정호기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분명 화살이 늦게 출발했음에도 정호기의 공격보다 빨랐다.

마치 화살이 이형환위라도 펼친 듯이 시위에 걸려 있던 화살이 어느새 어깨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늦었어…….’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몽황분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탓인지, 아니면 위기의식이 육체의 정보를 차단했는지는 몰라도 어깨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저 뭔가가 뚫고 지나갔다는 정도.

하지만 뇌리엔 절망의 그림자가 자리했다.

쾅!

날려 보낸 기운은 기운차게 땅을 강타했지만, 이미 그곳에 무흔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큭!”

무흔의 팔꿈치가 명치를 때리자 숨이 턱 막혀 오며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퍽!

뒤이어 날린 무흔의 손바닥 공격이 턱을 강타하자 정호기의 머리가 뒤로 쳐들리며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그런 정호기를 살며시 밟으며 몸을 띄운 무흔이 정호기의 배를 목표로 천근추를 시전하며 뚝 떨어졌다.

쾅!

먼지가 가시고 드러난 광경은 움푹 파인 땅에 푹 파묻혀 있는 정호기의 모습과 그런 그를 밟고 있는 무흔이었다.

짝! 짝! 짝!

박수와 함께 천천히 걸어온 공손우가 무흔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공손우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무흔이 정호기의 단전에 손을 대려고 했다.

“아아, 참으시지요.”

“후환을 남겨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군사.”

단전을 파괴해 정호기가 다른 꿍꿍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조당은 정호기를 죽이라 명했었기에 사실 무흔이 죽인다고 해도 그를 책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공손우는 마치 조당이 정호기를 아무런 피해 없이 살려서 데리고 오라 명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쓰러진 정호기를 보면서 공손우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계획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기왕 잡은 먹이를 한 끼 식사로 끝낼 수는 없는 법이지.’

정호기를 미끼로 뒤에 숨은 그림자를 밝혀내려는 속셈이었는데, 그러자면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더 이로웠다.

죽이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데 서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만 있으면 미끼작전이 실패한다고 해도 고문을 통해 정호기의 입을 통해 배후에 관한 것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고.

‘문주님도 죽이지 않았다고 나를 책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명령은 내려도 그에 대한 계획을 활용하는 것은 공손우의 특권이었다.

“그는 아직 배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떠나서라도 지금 상태에서 단전까지 파괴한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제가 무흔께 부탁드린 것은 그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정호기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말을 하면서 공손우가 손을 흔들자 복면인들 몇이 달려와 정호기의 상태를 살폈다.

“어떠냐?”

“위급한 것 같습니다. 맥이 불규칙하고 진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두다간…….”

“안가로 옮기도록.”

“예.”

몇몇이 정호기를 옮기는 동안 무흔은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이라도 잘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우선 저놈을 고쳐 놓는 것이 먼저입니다. 살려야 쓸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공손우의 말에 무흔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몽황단의 약효는 잘 아실 것입니다.”

몽황단은 몽황분을 특별한 처리를 하여 단약으로 조제한 것인데, 흑룡문에서 배신자나 모반을 꿈꿨던 이들에게 사용했고 그 해약을 만드는 방법은 대대로 문주만 알고 있었다.

“그것을 사용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까?”

무흔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몽황단은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저도 그놈을 위험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몽황단을 먹인다면 사지를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안전했다.

산공독도 들어 있어 내공을 전신에 흩뿌려 놓고, 단전을 이용할 수 없기에 범인(凡人)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만일 놈을 처리하게 되면 무흔께 그 일을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철수하라!”

공손우의 명령에 천살대원들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 후, 그곳에 은밀히 접근하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초린이었다.

‘분명 이쪽에서 불꽃이 번쩍였는데…….’

뒤쫓아 오는 마라문도들을 이용해 장화표국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빠져나오는 와중에 멀리서 불꽃이 튀는 것을 봤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자신이 그것을 본 것이 결코 우연 같지 않았고,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 와 본 것이었다.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구덩이에 사람 모양의 자국이 있었는데, 그것이 신경 쓰였다.

‘저만한 구덩이가 생길 정도의 충격이라고 해도 지금 남아 있는 자국은 범인(凡人)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커. 설마…….’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주위에 누가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고, 거기다 그를 더욱 찜찜하게 만드는 것은 쓰려져 있는 두세 마리의 동물이었다.

오소리와 들쥐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는데, 아마 오소리가 들쥐를 쫓다가 같이 변을 당한 것 같았다.

‘죽은 것은 아니야.’

내력을 귀에 집중해 들어보니 심장 소리가 들렸는데, 매우 규칙적이었다.

‘분명 저곳에 뭔가가 있어.’

그것이 영초린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주된 이유였다.

‘왜 자꾸 대형이 떠오르지?’

한 시진에 걸쳐 유심히 살폈지만, 늘어 가는 것은 쓰러지는 동물들뿐이었고 정호기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그러나 영초린의 머릿속에서는 정호기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자.’

이곳에서 확인할 도리가 없다면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떠나가는 영초린의 뒤로 붉은 새벽 여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

“으음…….”

정호기가 눈을 뜨자 어둠이 그의 눈을 가득 채웠다.

‘잡힌 거겠지? 단전은 무사한 건가? 내공은?’

아랫배 쪽에 통증은 없었기에 단전이 손상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내공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안개처럼 떠다니는군. 몽황단인가?’

내공은 뒤로하고 몸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혈도가 제압된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은 꼼지락거릴 수 있었고, 얼굴도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사지를 결박시켜 놨는지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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