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화산과 종남이 곧 온다.’
정호기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는 것에 미소를 지었다.
똑똑.
“대형, 저희들입니다.”
“들어와라.”
영초린과 나상진이 들어왔는데 그들의 얼굴은 이전에 없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앉아라.”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짐작하였지만 정호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궁에 소속된 것인지 궁금해서겠지?
-예.
무림인은 황궁과 엮이는 것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황궁은 무림을 이용하려고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어쩌면 황궁에 소속된 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라면 정파에서조차 모르는 흑룡문의 비밀 지부와 그들의 야욕을 알아차리셨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분이 직접 나서지 못하신 이유도 설명이 되겠지. 지난 몇 년간 소식이 끊긴 것도.
현재 황궁은 환관 왕진으로 인해 어지러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난 그것이 지금의 사태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흑룡문은 야욕을 드러낼 테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그 말에 나상진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황궁은 이전부터 무림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문파는 물론이고 개인까지도!
나상진은 자신의 비밀을 정호기가 알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와 만난 것을 후회하느냐?
-그건…….
-우리의 시작이 어떻든 지금 너와 나는 의형제로 맺어졌다. 그것까지도 황궁에서 조작을 한 것일까?
정호기의 질문에 나상진이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에게 말하지만 난 황궁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믿겠습니다. 그리고 전 대형이 황궁 소속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영초린의 대답은 명쾌했다.
-상진이 넌?
-저도 대형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시작이 어떻게 됐든 간에요. 하지만 황궁의 개가 되긴 싫습니다. 만일 대형이 황궁 소속이란 것이 밝혀지면… 대형을 떠나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나 또한 황궁의 개가 되긴 싫으니까.
말을 마친 정호기가 두 사람을 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사실 내가 바란 것이 바로 종남과 화산의 참전이었는데, 놈들이 과잉 반응을 하는 바람에 그것이 더 앞당겨진 것 같다. 우리는 이것을 기회 삼아 더욱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정사대전을 원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흑룡문을 어찌 막겠느냐? 과연 종남과 화산만으로 흑룡문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과거, 단 네 개의 문파로 중원을 상대하던 사파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흑룡문이었고.
-싸움이 일방적으로 흘러선 안 된다. 내가 참고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실력을 최대한 숨기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아직은 정파가 밀리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
“종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비연이 데리고 온 것은 정호기도 익히 알고 있는 이도준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정 소협.”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이분은 제 사형입니다.”
“반갑습니다. 은검호입니다.”
은검호는 종남의 미래라 일컬어지는 후기지수들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이였다.
“은 소협과 이 소협이 와 주시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인사치레가 끝난 후 사비연, 홍청한, 정호기와 함께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뒤로 다른 도발은 없었습니까?”
“예. 어찌 된 영문인지 묵골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라문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흠… 다행이긴 한데, 그들의 속셈을 모르겠군요.”
“그들로서는 어차피 인정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묵골방이 자신들의 하부 조직이라 인정하면 공분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정호기의 말에 은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보다 사가장과 만금장이 시끄럽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결국 터질 게 터진 거지요. 차라리 일찍 터진 것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은검호에게 있어 사비연은 사숙과 같았다.
그의 사부와 같은 항렬이었으니까.
그러나 본가와 속가는 항렬 자체를 따지지 않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존대하는 상황이었다.
은검호가 근심 어린 얼굴로 홍청한을 바라보았다.
“만금장은 어떠십니까?”
“곧 진정이 될 겁니다.”
현재 사가장과 만금장에서 마라문 또는 다른 사파와 은밀히 거래하고 있던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괜히 묵골방을 건드려 피해를 입었다며 당장 소장주들과 한풍대 등을 불러들여야 한다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럴 리는 없으니 분명 약점을 잡힌 사파에서 협박을 당했으리라.
“어찌 보면 좋은 점도 있소이다.”
사비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 그런 말을 하기도 하니, 우리로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추려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도려낼 생각입니다.”
사비연의 태도는 단호했다.
“충돌로 인명 피해가 생긴다면 시선이 곱지 않을 텐데요.”
은검호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환부를 도려내는 데 아픔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가문이 축소되더라도 전 우아를 믿습니다.”
“그건 저희 만금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를 떠나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소장주가 장주의 직위를 이으면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만금장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홍청한은 처음보다 상당히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는데, 홍금한의 전서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구나. 최대한 밖에서 시선과 시간을 끌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먹힐 수도 있다. 그들과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그들의 뜻에 따르도록 해라.>
폭풍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은 오히려 지금 만금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비하면 심각하다 말할 수 없었다.
‘장원의 사 할에 이르는 이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진짜 싸움을 우려하는 이들과 평화를 바라는 소심한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 할이라니…….’
만금장이 그만큼 많이 썩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사가장은 이 할 정도라 들었는데, 여기서 만일 사가장이 먼저 일을 해결하고 발을 빼 버리면 우리만 난처한 지경에 처하리라.’
아무리 화산이라고 해도 만금장의 내부 일까지 나서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흑심을 품고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외부에서 세력을 끌어올 것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만금장은 산산이 부서져 공중분해 되리라.
‘외부의 힘을 장 내부에 들일 수는 없는 일. 자칫 하다가는 싸움에 이겨도 화산에 먹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어.’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희는 일단 개방에서 마라문에 대한 정보를 더 얻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화산에서 사람이 오면 그때 하도록 하지요.”
“예.”
은검호와 이도준이 나간 후에 사비연이 따로 정호기를 불렀다.
“정 회주.”
“예.”
“놈들의 정체에 대해서 진짜 짐작이 가는 곳이 없는 것이오?”
“이미 말씀드린 것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하남에서 있었던 충돌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파천궁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래된 일이었고, 그들이 이제 와 저를 죽이기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들은 말이 있어 그러오. 은 소협도 개방에 다녀오면 알게 되겠지만, 마라문에서 파천궁의 인물을 봤다는 소문도 있고, 또 저잣거리에 은밀히 파천궁이 마라문의 배후라는 말이 떠돌고 있소이다.”
“그럼 아까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아까는 계획을 세울 것도 아니었고, 본격적인 것은 화산이 와야지만 시작될 테니 잠자코 있었던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춘 사비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회주께 먼저 확인하고 싶었소이다.”
“정말 그것이 전부입니다. 유 소저께… 유 소저의 말도 신뢰하지 않으시겠군요.”
유옥접이 정호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진실이었으니, 그녀가 정호기에게 불리한 말을 할 리 없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파천궁이 배후에 있느냐와 없느냐는 대단히 큰 차이라오. 만일 그들이 배후에 있다면 지금 있는 전력과 화산에서 올 전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놈들이 파천궁을 팔아먹었구나.’
흑룡문이 어쩐지 잠잠하다 싶었더니 파천궁을 끌어들이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염화귀라고?]
[허명입니다.]
‘그래, 그놈이 파천궁에 있었지.’
정파에 세작을 심었는데, 파천궁이라고 없을까.
분명 염화귀 관홍 말고도 서너 명이 있었다.
‘그놈이 아니라고 해도 파천궁의 인물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니 덜 중요한 놈으로 보내기만 해도, 일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진다.’
화살의 방향이 파천궁으로 향하면 흑룡문만 어부지리를 얻는 셈이었다.
‘네놈들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겠다.’
“파천궁과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알았소. 어차피 지금 개방에서도 계속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이 일은 화산이 온 뒤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요.”
“예.”
***
-무슨 일입니까, 대형.
자신을 은밀히 부른 정호기에게 영초린이 천장에서 전음을 보냈다.
-흑룡문 놈들이 파천궁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예?
-지금 마라문의 배후를 파천궁이라 믿게 만들려는 속셈인 모양인데,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흑룡문만 이득을 취하게 되니 그것을 막아야겠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귀를 기습해라.
-죽이란 말씀입니까?
-아니. 죽이진 말고 흔적을 남겨 놈들을 이끌고 기오산 산자락에 있는 장화표국으로 가라. 하귀가 여의치 않으면 그들의 시선을 끌 수만 있으면 되니, 네가 알아서 목표를 선정하고.
-그곳이 어디입니까?
-파천궁의 비밀 지부이다. 놈들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는 거지. 파천궁이 흑룡문을 대적하도록.
-같은 사파인데 겨우 그런 일로 싸울까요?
-앞으로 같은 일이 몇 번 일어나면 싸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모르는 척은 하지 않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영초린은 어쩌면 정호기가 진짜 황궁 소속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그에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