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비천단은 여기로 와라! 소장주를 보호해라!”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꾸역꾸역 밀려드는 묵골방의 위세는 놀라웠다.
미약이나 팔러 다니는 놈들이라고 우습게 여겼다가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절대 묵골방만이 아니다. 마라문이 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정호기가 각오를 하라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뭣들 하느냐! 길을 뚫어라!”
어떻게 해서든 사비연들과 합쳐야 했다.
그래도 저기엔 한풍대, 적열대 두 개의 대가 있었으니까.
홍청한의 뒤에서 홍성한과 홍초희가 붉은 옷을 걸친 채 열심히 검을 놀리고 있었다.
***
멀리서 들리는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는 곳에 열 명의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정호기와 영초린, 나상진이 품자 형태로 주위를 경계했고, 그들을 일곱 명의 복면인들이 포위한 형국이었다.
“정호기, 이번엔 경고다.”
정호기의 앞에 서 있는 복면인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무림은 무림인의 것. 그대들이 나설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시치미를 떼려는 것이냐?”
“불렀으면 짖지 말고 말을 해.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정호기가 귀를 파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복면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였다.
“궁으로 돌아가라.”
정호기는 의문을 느꼈다.
‘궁? 황궁을 말함인가? 놈들은 나를 황궁에서 나왔다 여기는 것인가? 이걸 잘하면 써먹을 수도…….’
“해가 비치지 못하는 곳은 없다는 것을 모르나?”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은 그 말을 하려던 것이니 이만 물러가겠지만, 더 이상의 도발은 용납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복면인이 손짓하자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형…….”
“그만. 일단 저들을 구하고 보자.”
정호기의 제지에 나상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들은 전장으로 달려갔다.
둥그렇게 포위된 사비연 등을 수백 명이 공격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눈에 띄는 고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그들의 공격은 사나웠고, 핏발이 선 눈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칼을 휘둘렀기에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퍽!
한 사람의 머리를 쪼갠 사비연의 눈에 외곽에서 치고 들어오는 덩치 큰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원군이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동요를 보일 만도 하건만, 공격하는 이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제 정신이 아니야.’
팔이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못 느끼는지 물려고 달려들었다.
‘묵골방이 미약으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어 우리에게 보낸 것이다.’
미약에 중독된 이들은 의외로 많았고, 그들 중에는 무인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 이들을 묵골방이 미약에 취하게 한 후에 사비연 등을 상대하게 한 것이다.
‘놈들이 이런 악독한 수를 쓸 줄이야.’
피골이 상접한 여인이 손에 든 검으로 찔러 왔다.
분명 무인이 아니라 일반인이리라.
하지만 무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휘두른 그 검에 찔리면 죽는 것은 같으니 막아야 했는데,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기에 결국은 그녀의 목을 베어야만 했다.
‘이건 악몽이다!’
처음부터 이런 반발에 직면할 줄은 몰랐다.
옆에 있는 사준우와 홍성한은 그런 대로 제 몫을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홍초희였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 있었기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다섯이나 되는 무인의 손이 묶인 것이다.
“갈!”
기운을 내서 다시금 검을 휘둘렀지만, 쓰러지는 적의 뒤로 또다시 검이 날아오고 독침이 쏘아져 왔다.
‘이것만 아니면…….’
사비연은 사준우를 보호해야 했기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검이나 도와 같은 무기로 공격해 왔다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련만, 중간중간 날아오는 독침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아직 우아가 막기는 무리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면 사준우는 독침의 희생양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은 홍청한이라고 다르지 않았는데, 홍성한·홍초희를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사비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를 때, 허공에 거대한 도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땅을 가를 듯이 떨어져 내렸다.
쾅!
팔다리가 날아가고 내장은 허공을 떠돌았다.
‘감정의 동요를 보여야 정상이거늘…….’
그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그런 광경에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공격을 하고 있었다.
‘나 혼자라 해도 쉽지 않았겠어.’
“사 대협!”
“왔는가?”
“길을 뚫겠습니다.”
어느새 정호기가 들어 온 곳은 다시 적들로 메워져 있었다.
“알았네.”
대답을 한 사비연이 뒤를 보며 소리쳤다.
“회주가 길을 뚫는다! 모두 회주를 따라라!”
정호기가 도를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 하자 그 뒤를 다른 이들이 따랐다.
***
쾅!
탁자를 내리친 홍청한이 정호기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늦게 나타난 것이오!”
뒤늦게 나타난 정호기가 보여 준 무위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런 실력으로 왜 처음부터 나서지 않았는지 따지고 있었다.
“또 다른 적들이 있었습니다.”
폭풍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여섯 명만이 영웅회로 돌아온 실정이었다.
“회주와 영 소협, 나 소협 이렇게 셋이서 그들을 상대했단 말이오? 폭풍단을 거의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간 그들을?”
“우리에게 온 것은 일곱 명의 복면인들뿐이었습니다.”
“폭풍단을 상대한 것도 일곱 명이었소!”
단, 일곱 명에게 폭풍단이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정말입니까?”
“내가 지금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오?”
홍청한이 정호기의 물음에 정색을 했다.
“그것이 아니라……. 그럼 제가 상대한 일곱 말고도 일곱이 더 있는 것이군요.”
“그들이 그대를 살려준 이유가 있소? 난 그것이 궁금하외다.”
“살려준 것이 아니라 제가 그들을 쫓아 버린 것입니다.”
“자자, 그만 진정 하시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봅시다. 정회주가 뒤늦게나마 와 주었기에 우리가 더 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것 아니겠소?”
사비연이 홍청한을 말렸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군가 하는 것이오. 마라문이 그 정도의 고수를 보유할 수는 없으니까.”
“정 소협께 원한이 있는 자들일지도 모르지요.”
홍청한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그 원한이 있는 자들이 어째서 정 소협은 살려 두고 폭풍단만 몰살을 시켰겠소이까?”
사비연의 물음에 홍청한이 입을 다물었다.
“마라문이 대남현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칠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물론 흑도의 특성상 쉽게 세력을 확장하기는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성장은 놀랍도록 빨랐소. 그리고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용했고 말이오.”
“사 대협의 말씀은?”
“그들의 배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오.”
“배후라 함은?”
“이제 그것을 알아봐야지요. 그리고 본산에 도움을 요청할까 합니다.”
“종남에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저희들만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사비연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회주의 생각은 어떠신지?”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괜히 제 주장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오. 만일 마라문의 뒤에 배후가 있다면 이렇게라도 알게 된 것이 오히려 나은 것이오. 나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오.”
사비연의 시선을 받은 홍청한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 ‘어떤’ 일이란 것이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어서 형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구나.’
정작 본산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가장이 아니라 만금장이었다.
‘화산을 불러야 해.’
***
“놈이 쉽게 인정했다고요?”
“예.”
보고를 들은 공손우가 탁자를 두들겼다.
“흐음… 그럼 황궁을 배제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중 함정일까?”
현재 공손우는 섬서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폭풍단에 큰 피해를 준 것은 어떤 연유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복면인의 말에 공손우가 미소를 지었다.
“불은 더욱 활활 타올라야 보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예?”
“어차피 상대는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감출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그들의 도발이 너무 약한 것이 아닙니까?”
“저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정체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저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가는 계속해서 끌려다닐 뿐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 식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좋지요.”
“종남과 화산이 끼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모른 체할까요?”
“…….”
“언젠간 내려올 놈들입니다.”
공손우의 이 착각은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정호기의 진짜 정체를 모르기에 일어난 것이니까.
“싸우기를 원하면 싸워 주면 됩니다. 대신 아주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겠지만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믿고 있는 공손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