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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75화 (76/137)

75화

‘여유를 갖는 것도 좋겠지. 만금장으로 가는 이 길이 피로 점철된 혈로를 걷기 전의 마지막 평화일 테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악화된 상태였다.

무영의 검집을 본 흑룡문이 어떻게 나오리란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까.

“둘째 형님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있었지. 그런데 내가 어려워지니 떠나더라고.”

“그런… 그럼 그 뒤로 안 사귀셨어요?”

“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없구나.”

“아, 둘째 형님, 그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

“유 소저가 대형께 고백한 얘기요.”

“응?”

영초린이 정호기를 바라보았지만, 잠이라도 자는 듯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네, 장원이 떠나가라 외치셨지요.”

그러면서 그날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유 소저께서 대형과 눈도 못 마주치셨다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러면서도 한사코 그날 일을 기억 못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뒤로도 얼마간 사준우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

“오랜만입니다, 사 대협.”

만금장주인 홍금한은 후덕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는데, 그의 아들인 홍성한과 홍초희도 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허허허, 같은 섬서에 있으면서도 얼굴 보기가 이리 어렵군요. 격조했소이다.”

“제가 진즉에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그게 그리 쉽지 않더군요.”

“수장의 위치에 있는 분이 시간이 나시겠습니까? 저처럼 한가한 늙은이가 찾아뵙는 게 당연하지요.”

“무슨 그런 말씀을… 송구스럽습니다.”

사비연과의 인사가 끝나고 당평과도 또 한참을 얘기한 홍금한이 나머지 일행과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제가 영웅회에서 장로직을 맡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소문이 있던데, 정말이었습니까?”

“예. 허허허, 그렇게 됐습니다.”

“허…….”

“이번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 회에서 일을 하나 추진하고 있는데, 그 일에 홍 장주께서 힘을 보태셨으면 해서입니다.”

“좋은 일이라면 저도 당연히 거들어야지요.”

홍금한의 대답을 들은 사비연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나서야 할 차례라는 듯.

“우리 영웅회가 내건 기치는 사파 척결입니다.”

“사파 척결이요?”

“예. 섬서에서만이라도 정파의 의기를 되살리고 사파를 몰아내고자 합니다.”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홍금한이 사비연과 당평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알고도 영웅회에 몸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흠흠, 정 회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요? 또한 어떠한 파장을 가져올지도?”

“예.”

“정가장도 상가이지 않습니까? 흑도의 무리들이 해코지를 하면 장이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만 한번 잘못 나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방치한 결과가 지금의 섬서, 아니 중원입니다. 곳곳에 사파가 들끓고 서민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 사파에 한 발 걸치고 방관하는 정파 또한 병들고 있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홍금한이 사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종남에 연락은 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사비연의 대답에 홍금한이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요즘 들어 이상한 소문들이 저잣거리에 흘러 다니고 있어 설마 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이었군요.”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영웅회가 마라문을 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가정호와 화세걸이 자신들도 모르게 맡겨진 임무에 너무 충실한 모양이었다.

“사실입니까?”

“예.”

사비현의 간단명료한 대답을 들으며 홍금한은 그가 망령이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하신 겁니까?

홍금한의 전음에 사비연이 바로 대답을 했다.

-고름을 짜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가장이나 만금장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고름을 말입니다.

사가장과 만금장이 종남과 화산을 등에 업은 정파이지만, 그 속에는 마라문과 같은 사파와 은밀히 거래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비연은 이참에 그들을 모두 뽑아내자고 하는 것이다.

-가능하겠습니까?

-외부에서 흔드는 동안 내부에서 결단을 내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일임하고 왔습니다.

사가장의 장주이자 사비연의 아들인 사도민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본산도 그리 깨끗한 것은 아닐 것인데 말입니다.

종남, 화산이 정파의 태두라고 해도 모두가 정의롭지는 않았다.

-불을 지피면 알아서 타오르겠지요.

톡, 톡, 톡, 톡.

홍금한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언제부터 본산과 얘기를 하셨습니까?

사비연은 홍금한의 질문에 고소를 지었다.

그것까지 꿰뚫어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좀 되었습니다. 손자 녀석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 저와 장주가 짐을 떠안기로 했지요.

사준우의 생각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가 장주가 되어 일을 처리하느니 자신과 사도민이 나서서 정리를 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동참하지 않더라도 일을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까지 시간을 주십시오.

-예.

“자, 오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일단 쉬도록 하시지요.”

홍금한의 말에 모두 일어서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특별히 직접 쉴 수 있는 전각까지 안내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사준우의 말을 들은 사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예.”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사준우의 다음 말이 홍금한과 홍초희, 홍성한을 놀라게 만들었다.

“형님들, 오늘 제가 한 잔 사겠으니 같이 가시죠?”

홍씨를 가진 세 사람의 눈이 사준우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든 광경은 다음에 벌어졌다.

“난 빠지겠다.”

정호기의 말에 사준우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던 것이다.

“대형, 그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으로 이 막내가 술을 산다는데 빠지시겠다니요?”

가겠다, 안가겠다 아옹다옹하는 그들을 보면서 홍금한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형? 분명 정 소협의 나이가 더 어리다 알고 있는데? 거기다 막내?’

아무리 두 사람의 뜻이 맞아 의형제를 맺고 싶다고 해도 가문이라는 울타리가 있는 사준우였다.

장차 사가장을 이끌어 나갈 그는 함부로 그러한 관계를 맺으면 안 되는 것이다.

슬쩍 사비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기에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묵인한다고?’

사가장과 정가장의 위세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허허허, 회주. 막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술을 한 잔 사고 싶다고 하는데, 같이 가 주시구려.”

‘오히려 거들기까지?’

홍금한은 어이가 없었다.

“흠흠, 이곳입니다. 방은 넉넉하니 각자 하나씩 쓰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기 심 총관에게 말씀을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일행을 안내하고 돌아서는 홍금한이 홍성한과 홍초희에게 살짝 눈짓을 하고는 전각을 떠났다.

“저기, 사 소협.”

“예.”

“저희도 같이 자리해도 되겠습니까?”

홍금한의 말을 들은 사준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형님들을 모시는 첫 자리라…….”

“우리는요? 설마 우리는 모른 체 하려는 건가요?”

유옥접이 끼어들자 진퇴양난이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같이 가자꾸나.”

정호기의 말에 사준우가 반색을 했다.

“그래도 될까요?”

“어차피 계산은 네가 할 것이니, 너만 괜찮다면 상관없다.”

“물론입니다. 그럼 모두 같이 가시지요.”

“그럼 제가 아는 좋은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성한의 말에 모두 동의 했고, 그를 앞장세워 만금장을 나섰다.

***

“어떻게 생각하느냐?”

홍금한의 물음에 동생인 홍청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나 사가장이나 완벽한 무가는 아닙니다. 정가장은 물론이고요. 만일 사파가 그것을 노리고 압박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 대협은 그렇듯 태연한 걸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사비연은 이미 구를 대로 구른 강호의 노회한 고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는 우려를 고려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정리를 해야 할 만큼 사가장이 급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 정호기란 소협을 충동질해서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그런 기미는 느끼지 못했다.”

“말 못할 사정이야 누구나 있는 것 아닙니까?”

“으음…….”

“솔직히 우리도 더 이상 방관만 하기에는 내부적으로 너무 썩었습니다. 언젠간 칼을 들어 도려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해도 시기가 적절하냐가 문제다. 분명 내부적으로 반발이 심할 터인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 않느냐? 사가장이야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왔다니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냉정하게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설픈 자비를 베풀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참에 결단을 내리시지요, 형님.”

홍청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홍금한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 대협은 어디까지 하려는 것일까?”

“내부적으로 정리를 할 때까지만 외부에서 시선을 돌리려는 것일 겁니다. 설마하니 진짜 사파 척결을 내세우며 섬서를 누비겠습니까?”

“그렇겠지?”

“예. 그리고 마라문을 친다고 소문을 흘린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일종의 경고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부를 정리하는 와중에 허튼수작을 한다면 진짜 싸울 수도 있다는 의지를 내비쳐서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만…….”

“우리는 그저 사가장이 만들어 놓은 배에 슬쩍 몸을 싣고 강을 건너면 그만입니다.”

근 한 시진에 걸쳐 두 사람이 이번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결국은 같이 동참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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