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럼,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땅을 박찼는데, 단숨에 삼 장의 거리를 빠르게 움직여 도를 휘둘렀다.
쨍!
“으음…….”
도를 막은 사비연이 그 힘을 이용해 이 장여를 움직인 뒤에 신음을 흘렸다.
“신세를 졌군.”
이가 빠진 것으로도 모자라 약하게 실금이 가 있어, 자칫했으면 부러질 뻔했다.
아니, 사실 부러지고도 남았겠지만 정호기가 마지막에 힘을 빼서 무사한 것이었고, 사비연도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미안하네. 잠시 기다려주겠나?”
“예.”
말을 마친 사비연이 자신이 묵고 있는 전각으로 향할 때, 때 아닌 날카로운 금속음에 이끌린 다른 이들이 연무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당혜미의 물음에 정호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 장로님과 비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벌써 끝나신 거예요?”
“검이 부러져 바꾸러 가셨습니다.”
“예?”
정호기의 말에 당혜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고수가 들고 있는 검을 부러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공으로 보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수는 나뭇가지만으로도 바위를 부술 수 있었다.
같은 검을 들어도 하수가 고수의 검을 부러뜨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제 도가 가진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허허허, 겸손이 지나치네. 사 대협이 그런 것을 감안하지 않고 자네의 도를 막았겠는가? 그럼에도 검을 부러뜨린 것은 자네의 기량이 높다는 것이겠지.”
당평도 정호기가 사비연의 검을 부러뜨렸다는 것에 감탄한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사비연과 사준우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주가 보검을 선물한다고 할 때 받을 걸 그랬네그려. 그나마 이 녀석의 검은 제법 날카롭고 단단하니 아까와 같은 창피는 당하지 않을 것 같네.”
말을 마친 사비연이 사준우를 바라보았다.
“잘 보거라.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사준우가 당평 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사비연의 검이 가벼운 떨림을 보이다 멈췄다.
“감사합니다.”
그것을 본 정호기가 감사 인사를 하였는데, 곧 그의 도도 가벼운 떨림을 보이다 멈췄다.
이는 내공을 이용해 검을 보호할 때 나오는 현상으로, 이제는 무기에 신체가 닿는다면 베이는 것이 아니라 잘릴 위험을 각오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감사는 무슨, 자네의 말을 허투루 들은 내가 미안하지. 시작하세.”
이번엔 사비연이 검을 허공에 긋는다거나 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상대를 하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급으로 대한다는 의미였고, 선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했다.
“하앗!”
사비연이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차더니 검을 찔렀다.
한 번의 움직임에 무려 수십 개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고, 검의 그림자에 사비연의 신형이 묻힐 정도였다.
“웁!”
숨을 들이쉰 정호기가 무겁게 도를 내리긋자, 검의 그림자가 한순간에 사라지며 사비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많은 허상들이 실체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허상이었다.
정호기의 도가 내려진 것을 본 사비연이 그것을 기회라 생각했는지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정호기가 했던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아…….”
지켜보던 사준우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는데, 사비연의 한 수 때문이었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 긋는 한 동작에 무려 수십 개의 환영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하나하나가 실체와 동일한 힘을 가진 완벽한 검이 되어 유성우와 같이 정호기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났고, 그 흙먼지를 뚫고서 정호기가 사비연을 향해 뛰어올랐다.
챙!
한순간 검과 도가 부딪혔다 느꼈는데, 그것은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 찰나에 수십, 수백 번의 공방이 더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준우가 벌떡 일어났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사비연이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십여 장을 뒷걸음질로 이동하고 있었고, 정호기의 도는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사비연을 공격하고 있었다.
“허어, 회주의 무공이 저런 경지였나?”
당평이 놀랍다는 투로 말을 하였다.
“상생이 아닌, 속에는 속으로 강에는 강으로 환에는 환으로 눌러 버리는구나. 신성이 등장했어!”
사비연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낮다고도 할 수 없었다.
종남의 속가 중에서 최대의 문파라는 것은, 그저 돈이 많다거나 세가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가장을 이끌고 있는 사비연이 겨우 약관도 못 되는 청년에게 속절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신성(新星).
그것 말고는 정호기를 칭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한 말이었다.
쩡!
고막을 뒤흔드는 무거운 충돌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일각.
이미 단단하고 평평하게 다져졌던 연무장은 봄날 밭고랑처럼 파였고, 정호기와 사비연 두 사람의 몸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이 태산과 같고, 바람과 같으며, 사나운 호랑이의 이빨처럼 날카로우니, 열호아란 별호가 왜 생겼는지 알 것 같구나.”
당평이 감탄에 감탄을 더할 때,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사비연의 몸이 붕 떠올라 뒤로 이 장여를 날아갔다.
그리고 도를 높게 쳐든 정호기가 그런 그를 향해 내리 그었을 때, 구경하던 모든 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쨍!
이 장의 거리가 있었고, 분명 정호기의 도와 사비연의 검은 부딪히지도 않았건만 사비연의 검이 조각조각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옷을 걸친 사비연의 몸 여기저기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는데, 부서진 검 조각들이 남긴 상처들 때문이었다.
손잡이만 남은 검과 정호기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이나 하던 사비연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장강의 앞 물결을 뒤 물결이 밀어낸다고는 하지만, 내가 벌써 퇴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구먼.”
“퇴물이라니요. 사 장로님이 사정을 두신 덕분에…….”
“아아, 지나친 겸손은 상대에게 실례라네. 나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도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네를 상대했네.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나?”
“말씀만 하십시오.”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사비연이 사준우가 있는 곳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어서 달려오지 못하겠느냐!”
“예? 아, 예.”
사비연의 부름에 사준우가 후다닥 달려왔다.
“앞으로 대형으로 불러라.”
“예?”
“어서!”
사비연의 호통에도 사준우는 선뜻 대형이란 말을 하지 못했다.
“사 장로님 이러시면…….”
정호기가 정색을 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사비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네. 앞으로는 이 녀석을 잘 부탁하네.”
말을 마치고는 고리눈으로 사준우를 압박했다.
“대, 대형.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사준우와 사비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정호기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는데, 그 대상은 사준우가 아닌 사비연이었다.
“전 의제들을 대할 때 예의를 차리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게. 나이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고 하고.”
사준우의 나이가 올해 스물셋이니 만일 의형제가 된다면 영초린, 나상진보다도 어려서 가장 막내가 될 것이었다.
사비연의 대답을 들은 정호기가 사준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래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는 듯이.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회주는 섬서가 아닌 시대를 이끄는 바람이 될 것 같구나. 할아비의 말을 이해하겠느냐?
사비연의 전음을 들은 사준우도 이전부터 정호기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대형,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음… 알았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당평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의형제는 아니라고 하여도 정호기와 안면을 터서 나쁠 것은 없단 생각에서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당혜미에게로 향했다.
‘혜미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당가는 가족을 외부로 보내지 않고 딸도 데릴사위를 얻어 당씨 성을 줄 만큼 폐쇄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으니, 이른바 정략결혼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평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유옥접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 먹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인해 한동안 정호기의 시선을 피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두 눈은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할 수 있어!’
정호기가 지금과 같은 작은 정가장의 주인이 아니라, 무림의 중축이 된다면 그녀가 일월문주가 된다고 해도 혼인을 할 수 있었다.
정호기가 전생에서 혈신이었던 정호기와 혼례를 올렸던 것처럼.
***
마차를 타고 가는 정호기는 앞에 앉은 사준우가 부담스러웠다.
사비연과 타고 가도 될 것을 굳이 이곳에 엉덩이를 들이민 것이다.
“하하하하, 대형. 그래서 말이지요…”
거기다 넉살도 좋아서 어느새 대형은 입에 붙었고, 자신의 얘기를 쉴 새 없이 떠드는 중이었다.
‘이놈이 이런 놈이었던가?’
“그런데 둘째 형님.”
정호기의 태도가 뚱해서인지 이번에는 목표를 영초린으로 바꿨다.
“왜?”
“형님은 어떻게 대형을 만나신 겁니까?”
사준우의 질문에 영초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죽을 뻔한 것을 대형이 살려 주셨고, 그때 바로 형님으로 모신다고 했지.”
“그래요? 그럼 셋째 형님은요?”
“나도 비슷하다. 위선된 삶을 살고 있던 나를 일깨워 준 것이 대형이었으니까.”
대답을 들은 사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대형과 인연이 깊네요. 그나저나 두 분 형님도 대형께 반말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쁘지 않으셨지요? 저도 처음엔 어색했는데, 워낙 대형이 노안이라서 그런지 금방 적응이 되더라고요.”
사준우의 말을 들은 영초린과 나상진이 처음엔 어이없어 하다 정호기의 얼굴을 몇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다 했었지.”
“그렇지요?”
“그래. 아무리 봐도 삼십대는 되어 보이는 얼굴이지.”
“둘째 형의 말이 맞아요. 누가 대형을 이십대로나 보겠습니까?”
사준우가 흥을 돋우고 영초린, 나상진이 맞장구를 치자 무덤덤하던 정호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내가 보이긴 하냐?”
사람을 앞에 두고 노안이라고 놀려대듯 말하는 세 사람을 보면서 정호기가 묻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예.”
보인다는데 뭘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눈을 감아 버리는 정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