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미아야. 너도 모르겠느냐?”
“예.”
“그럼 내가 설명을 해 주마. 아까 사 대협의 말씀처럼 마라문과 같은 곳을 치려면 많은 것이 걸리게 된단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지.”
“그들이 과연 먼저 시비를 걸까요?”
“우리의 뜻을 몰랐다면 우리가 하부 조직 몇 개를 부수더라도 그냥 모른 체 하겠지. 그러나 만일 알게 된다면? 우리가 최후로 노리고 있는 것이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여기에 만금장의 힘까지 더해서 말이다.”
“위기의식을 느끼겠군요.”
“그렇단다. 그러다 하나둘 하부조직이 무너질수록 위기감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란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가만히 앉아서 당하느냐, 아니면 먼저 치느냐.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만일 목표가 나라는 것을 안다면 힘이 더 약해지기 전에 먼저 치겠습니다.”
“회주도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란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그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전해 주어야 하지.”
“대놓고 말하면 그들을 핍박한다는 빌미를 주는 것이니, 그들의 비밀 사업을 하나씩 부수며 압박감에 스스로 나오길 바란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자신들이 최종 목표라는 것을 모른다면 얌전히 숨거나 다른 경로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겠느냐? 소나기야 피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그 말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가 소협을 선택하신 거로군요.”
“구룡장은 은밀히 마라문과 뒷거래를 한다는 소문이 있고, 가 소협 스스로도 사파들과 친분이 두텁기도 하지.”
사비연이 당평의 말을 받았다.
“같은 종남의 문하라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우리를 이기려고 발악을 하는 것을 보면… 쯧쯧, 어쨌거나 회주도 그것을 노리고 가 소협에게 겁을 준 모양인데, 그것이 어설펐는지 파리 떼를 잔뜩 끌고 왔기에 내가 도와준 거란다.”
이제 이해했느냐는 듯이 사비연이 사준우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정호기에게 박혀 있었다.
‘심계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란 말인가?’
세사에 어둡다 여겨 그를 무시했던 것이 부끄러웠는데, 그때 정호기가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사준우가 뭔가 떠오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할아버지와 당 대협이 이곳에 계시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마라문이 아무리 대단해도 두 분을 상대로 전면전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 말에 사비연이 이마를 짚으며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회주께서 설명을 해 주시겠소?”
자네라고 했다가, 회주라고 했다가 사비연의 정호기를 대하는 태도가 일정하지 않았는데, 정호기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예.”
“자, 친히 회주께서 설명을 하신다니 귓구멍 활짝 열고 들어라.”
“악! 할아버지, 아파요!”
사비연이 갑자기 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사준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 소협의 우려는 잘 알겠지만, 오히려 우리에겐 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더욱 전면전을 고집할 테니까요. 사 장로님이 비록 영웅회에 계신다고 해도 사가장의 안위를 생각해야 하는 처지일 것이니, 세를 모아 전면전을 할 것처럼 위세를 떨치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정호기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들이 보기에 사 장로님은 손자의 재롱을 받아 주러 나온 할아버지이고, 적당한 선에서 손자의 체면을 차리길 바란다고 여길 것이니까요.”
“그렇지. 나와 네 녀석의 각오를 모른다면 말이다.”
“만일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랬다면 암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내며 계속 놈들의 하부 조직을 부수는 길고 긴 싸움을 하게 되겠지요.”
“그럴 생각이셨습니까?”
사준우의 물음에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저는 가 소협은 물론이거니와 사 소협과 당 소저까지 가문으로 돌아가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영 제를 보내 가족들에게 당분간 장으로 돌아오지 말란 말을 전하라 했는데, 이제 보니 크나큰 결례를 저지른 셈이군요. 거기다 제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사비연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네. 정가장이야 원래 무가가 아니라 상가 아닌가. 마라문은 위험한 놈들이니 그 정도 준비는 해 둬야 하지. 안 그렇습니까, 당 대협?”
“맞습니다. 회주의 조치는 절대 과한 것이 아닙니다.”
“너그럽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정호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당평이 당혜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리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 하나만이 아니라 옆에 앉아있는 유옥접도 같은 얼굴이었다.
“침 떨어지겠다.”
“예? 아…….”
당평이 핀잔을 주고서야 정신을 차린 당혜미의 얼굴이 벌게졌는데, 그것은 유옥접도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의 계획은 가 소협과 화 소협이 떠난 뒤에 본격적으로 의논을 하도록 합시다.”
사비연이 슬쩍 뒤를 바라보더니 말을 하였고, 잠시 후 가정호와 화세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죄송합니다, 정 소협.”
“아닙니다. 가문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호와 화세걸이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정호기와 이별을 하였다.
“당 소저, 언제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저희 구룡장을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짧은 대답이 서운한지 돌아서는 가정호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병신.’
당혜미는 가정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불쾌한 심정이었다.
그의 눈길이 몸을 훑을 때는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아, 가정호가 두어 걸음을 떼자마자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 소저.”
“네?”
같이 따라온 유옥접이 부르자 당혜미가 불쾌감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째서 남으신 거예요?”
유옥접의 질문에 당혜미가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가 폈다.
“전 정 소협께 관심 없습니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유 소저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귀접의 신물을 가지고 간 이들이 다시 올까 하는 마음에 있는 것뿐입니다. 외숙부께서는 그런 저를 보호하려고 오신 것이고요.”
어쩐지 차가운 말투였다.
“그렇군요. 근데 정말 관심 없으세요?”
“없습니다.”
당혜미는 내색을 하지 않아 그렇지, 박구와의 일로 인해 남자라는 동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에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일전에 정호기를 넋 놓고 바라본 것도 남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깊은 심계에 놀란 것뿐이었다.
“저… 당 소저.”
“말씀하십시오.”
“우리 술 한잔할까요? 앞으로는 마실 일도 없을 것 같은데요.”
이제 막 아침을 먹은 후였다.
이건 낮술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인 것이다.
“지금 말입니까?”
“네.”
그때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려무나. 내일부터는 긴장의 연속일 테니.”
당평은 당혜미가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며 예전의 밝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는 거냐?’
이 년 전에 갑자기 방에 틀어박히더니 그 이후로 두문불출하였었다.
가주의 생신 잔치가 벌어질 때도 몸이 좋지 않다며 얼굴도 비치지 않았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귀접을 추적하는 일에 자원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아니, 기뻤다고 해야 옳으리라.
‘귀접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평은 당혜미와 귀접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직접 귀접을 죽인 직후에, 당혜미를 살폈지만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보면 귀접은 아니란 말이 된다. 그런데 귀접을 잡는 것에 자원했어. 뭘까, 뭐가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녀가 애써 비밀로 감추는 것을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뭔지 짐작이 가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삼봉파에 귀접에 관한 정보를 흘리게 한 것은 영웅회에서 귀접을 맡게 하기 위한 것이겠지?’
가정호가 귀접에 대해 듣게 된 것, 그리고 귀접을 잡으면 명성이 올라간다는 달콤한 말을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혜미가 부탁하고 당평이 만든 작품이었으니까.
‘네가 이곳 영웅회에 집착하는 이유가 설마 그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당혜미가 영웅회에 들어오기 직전, 영웅회는 박구를 죽였다.
희대의 색마이자 살인자라는 박구.
‘아니겠지…….’
부정하고는 있지만, 당평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음을.
***
“당 소저.”
“예, 말씀하세요.”
이미 유옥접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반면 당혜미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저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지요.”
“제가 회주… 정 소협을 사랑해도 될까요? 그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말하지 못한, 술에 취해 보여준 가슴의 상처가 아닌 마음속에 담아둔 사연이.
그러나 당혜미는 유옥접이 부러웠다.
최소한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난…….’
짓밟힌 육체와 정신에 대한 분노로 당혜미는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자신을 학대했었다.
씻고 또 씻으며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은 더러움을 지우고 싶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박구의 손길과 혀가 지나간 곳을 돌로 문질러 피부가 벗겨지고 살이 찢어져도, 아픔보다 절망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드러난 손과 얼굴을 제외하고 그녀의 온몸은 흉터투성이였기에, 유옥접이 가슴의 흉터를 보여 주었어도 별로 동요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온몸에 그물 같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안다면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술을 한 잔 들이켠 당혜미가 조금은 쌀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렇겠지요? 포기해야겠지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기억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당혜미도 알고 있었기에, 유옥접에게 어떤 충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날의 기억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으니까.
“망각은 때론 축복이기도 하죠.”
쓸쓸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는 당혜미의 얼굴을 보면서 유옥접은 취중에도 그녀가 말 못할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셔요! 마음껏 마시고 잊어 보자고요!”
갑자기 유옥접이 활기찬 목소리로 술잔을 들더니 당혜미에게 권했고, 그 뒤로 두 여인의 술잔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누가 그랬던가.
낮술은 부모 형제도 몰라보게 한다고.
“정호기, 이 개자식아! 왜 내 마음을 몰라줘!”
중천에 떠오른 태양을 향해 유옥접의 큰 목소리가 솟아올랐고, 영웅회가 자리한 장원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