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얼마나 보내라고 하면 되나?”
“사가장에서 사람이 온다면 적게 와도 우리가 밀리는 것은 당연하네. 그곳엔 고수가 우리보다 많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머릿수로라도 그것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나중에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될 테니.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많이 보내라고 하게.”
“그러면 가문이 위험할지도 모르잖나?”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지금 우리가 상대하려는 것은 파천궁도 흑룡문도 아니네. 그저 각 현에 자리한 흑도 놈들이지. 그놈들이 감히 보복할 생각이나 할 것 같은가?”
“하지만 정 소협이…….”
“딴에는 위험을 강조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일세. 말에 무게를 두려고 말이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이처럼 그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그리고 제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네.”
자신의 기준에 맞춰 정호기의 말을 해석하고 결론지은 가정호였다.
“정말 괜찮겠나?”
“물론이네. 그러니 걱정 말고 넉넉하게 사람들을 보내라 이르게.”
“알겠네.”
화세걸이 나간 후에 가정호도 자신의 가문으로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화세걸에게 설명한 그대로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흐흐흐, 네놈이 이토록 음흉스러운 놈일 줄이야. 과연 네놈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지는구나. 내가 그 비밀을 알게 되는 날, 너는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정호기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믿은 가정호는 자신을 내세운 것에 커다란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당혜미의 말을 들은 당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가 본 그대로의 인물이라면 조금 의아심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논할 만큼 정의로운 인물은 아니라고 봤으니까요.”
“그럼 정호기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다?”
“예. 아마도 이번 습격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를 노린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누가, 왜 사주를 한 것이냐인데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올 것 같으냐?”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흐음… 도무지 그놈들의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야. 이번에 온 놈의 시체를 파내서 구석구석 살폈지만, 어떤 단서도 없었다. 네가 준 단검도 마찬가지고. 독은 동물 독과 시독을 섞은 것 같은데, 그런 조합을 사용하는 곳은 많으니 한 곳을 특정할 수가 없구나.”
“다시 올 것입니다.”
“증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사파를 칠 때 일거에 쓸어버리려는 생각이 아닐까요?”
“흠… 일거에 쓸어버린다?”
“예. 쥐도 구석에 몰리면 무는 법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구나.”
“당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당혜미에게 당평은 외숙부였지만, 친족으로 이루어진 당가는 계급을 더 우선시 했기에 당주라 부른 것이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 공자는 뭔가를 노리고 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건 데 너무 종잡을 수 없이 움직였거든. 작은 조각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결국에 가서는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법이다.”
“과연 마라문을 칠까요?”
“글쎄… 어떨까?”
말을 흐린 당평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정 소협은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르겠는 사람이구나. 만일 그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면 정말 뛰어난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면, 저는 계속 영웅회에 머뭅니까?”
“그래. 어차피 귀접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리고 나도 같이 가자꾸나.”
“예? 당주님께서 말입니까?”
“그래. 이참에 외당주란 거추장스러운 직함을 떼어 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어차피 가주께는 이전부터 말을 했으니, 전서로 뜻을 알려도 될 것 같다.”
“하지만…….”
“혜미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그저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이나 마련해 두어라. 그리고 앞으로는 외숙부라 부르고.”
외숙부라 부르라 한 것은 당가의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빠지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외숙부…….”
“너도 벌써 가문으로 돌아가기는 싫지 않느냐?”
언제부터인지 말수도 적어지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당혜미가 갑자기 귀접의 뒤를 쫓는 일에 자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기에,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될 일을 당평이 직접 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싫다면 다른 사람을 불러 주랴?”
“아니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그 빈자리를 채워 주던 당평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네 얼굴이 한결 밝아져 기쁠 뿐이다.”
당가를 벗어나 섬서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당혜미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늘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많이 엷어졌기에, 당평은 그녀에게 조금 더 바람을 쐬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호기란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이 인 것도 한몫하였고.
“가문에는 계속 귀접의 뒤를 쫓는다고 일러둘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알았느냐?”
“예.”
***
“회주님, 뭐 시킬 일 없으신가요?”
영초린과 나상진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가정호의 과잉 친절은 계속되었다.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가 소협을 찾아갈까 했었는데요. 이제 곧 사람들이 올 것이니 전각들을 모두 청소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 공사도 해야 하고요.”
지금 영웅회의 간판이 걸린 장원은 원래 표국이었다가 망한 곳이었기에 부지가 상당히 넓었고 창고나 건물들이 많았는데, 그중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또 다른 것은?”
“개방에 잠깐 다녀와야겠는데, 혹시라도 누가 저를 찾으면 그리 알려 주십시오.”
“제가 갔다 올까요?”
“아닙니다. 그리고 가 소협은 전각들을 책임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세걸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니 저도 회주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가 소협.”
“예?”
“사람이 많아지면 직급이 생기겠지요? 부회주는 이미 사 소협께서 하고 계시니 내당주직과 외당주직을 정해 회의 안과 밖을 책임지게 할 생각입니다. 외당주는 아무래도 외부의 인물들을 많이 만나야 하니 당 소저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당주는 장원을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요.”
전각들을 보수하다 보면 장원을 잘 알게 되지 않느냐는 소리였고, 그것은 곧 내당주라는 직함을 얻게 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화 소협께 내당주직을 맡길까요?”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책임지고 말끔하게 손을 봐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가 소협만 믿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멀어지자 그의 등을 보면서 가정호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네놈도 나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구나.’
여전히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있는 그였다.
***
귀찮은 가정호를 떼어 버리고 장원을 나선 정호기가 찾아간 곳은 그에게 말한 대로 개방의 분타였다.
한가하게 볕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거지들은 정호기를 보고도 별 다른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분타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먼저 정호기가 용건을 얘기하자 그중 하나가 일어섰는데, 거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질반질하고 토실토실한 볼 살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제가 이곳을 맡고 있습니다만, 무슨 용무이신지.”
“안녕하십니까. 정호기라고 합니다. 영웅회의 회주를 맡고 있지요.”
“광개 정철입니다. 근데 영웅회는 가정호 소협이 맡고 계신 줄 알았는데, 정 소협께 넘기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개방이 원하는 것은 정보였고, 그것을 정호기가 준 셈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리 중한 정보가 아니라고 해도, 일단 호의를 베푼 셈이니 정철로선 일단 기분이 좋았다.
“정 소협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개방에 왔으니 당연히 알고 싶은 것이 있어 왔지 않겠습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정호기가 건넨 종이에는 중경에 자리한 옥화산에 있는 모종의 장소였는데, 그것을 본 정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중경이군요. 거기다 흑룡문의 영역인 것 같은데…….”
“맞습니다.”
“실례지만 왜 조사를 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분이 그 부근에서 실종이 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는지요?”
“여기 그분의 초상을 그려 왔습니다.”
종이에 그려진 얼굴은 정호기가 혈신으로 늙었을 때의 얼굴이었다.
“흠… 이분이 실종되셨다고요?”
“예. 가능하겠습니까?”
“뭐, 흑룡문의 영역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이런 일에는 위험이 따르니 의뢰비가 좀 비쌉니다.”
“얼맙니까?”
“못 주셔도 은자 서른 냥은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의뢰가 길어지면 추가 요금도 받습니다.”
“여기 금자 두 냥입니다. 소식을 가져오시면 은자 열 냥을 더 드리지요.”
정호기가 건넨 전낭은 무영의 것이었고, 그것을 요긴하게 쓰는 중이었다.
“그분의 덩치도 저와 비슷하니, 분명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소식을 알게 되는 대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서는 정호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 모두 진흙탕에 빠져드는 거야.’
정호기가 의뢰한 지역은 마중마 연성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개방이 얼씬거리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
거지들의 곡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였다.
***
“정말이십니까?”
정호기가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당평을 보며 물었다.
“물론이오.”
“어째서 당 대협 같은 분이… 그리고 당가의 외당주직을 맡고 계시다 들었습니다만.”
“이미 외당주직은 물러났으니 상관없다오.”
“하지만 만일 이곳에 계시겠다면 제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당 대협께는 장로직을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무슨 장로씩이나. 어쨌거나 주신다니 고맙게 받겠소이다.”
“월봉은 없습니다. 그건 아시지요?”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릴 만큼 가난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이자가 무슨 의도로 온 것일까?’
당평이 움직이는데 자신이 일조를 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정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