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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69화 (70/137)
  • 69화

    “…….”

    -이렇게 생각해 봐라. 만일 놈들이 기습적으로 중원 정벌의 이빨을 드러내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질 것인지를. 그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만일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떠나라.

    -대형!

    -난 내 명령에, 설사 어린아이라고 하여도 서슴없이 검을 내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한다. 앞으로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는 시간도 아까울 테니까. 너뿐만이 아니라 상진이에게도 말을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떠나라. 붙잡지 않겠다.

    갑자기 영초린이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대형. 전 이미 제 목숨을 대형께 맡긴다고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대형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떠나란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이유 없는 살인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정파의 인물이나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너는 이 길로 호북 인화산장으로 가서 장주인 송조문과 아들인 송하연을 죽여라!

    인화산장은 무당의 속가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물론 영초린은 송하연의 나이를 알지 못하였지만, 지금까지 정호기가 한 말에 비추어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뜻밖의 명령에 영초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인화산장도 흑룡문의 비밀 지부이다. 단순한 정파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가보면 알겠지만, 송하연은 이제 열다섯인 놈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놈이니 오히려 송조문보다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송하연은 나이가 어렸지만, 지금보다 나중이 더 기대되는 소년이었다.

    [누구냐?]

    [인화산장을 책임지고 있는 송조문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가 바로 송하연인데, 제 아비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아비의 그늘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요.]

    자신의 물음에 공손우가 대답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놈을 치웠다고 안심할 수 없지. 그 빈자리를 더 뛰어난 놈이 메울 수 있으니까. 싹은 확실하게 뽑아 버려야해.’

    송조문을 죽였는데, 더 뛰어난 송하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아니한만 못한 결과이리라.

    그렇기에 송하연이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도 죽여야 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활을 사용하는 놈도 흑룡문의 소속이고 분명 이 근처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놈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실패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예.

    지금 하는 것만 본다면 절대 두 사람의 관계는 의형제 간이 아니라 주종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정호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걸 떨어뜨리고 오도록 해라.

    정호기가 건넨 것은 무영의 독검이 들어있던 검집이었다.

    궁금했다.

    정호기가 무엇을 노리고 이러한 것을 시키는지.

    그러나 영초린은 묻지 않았다.

    -몸조심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순간 영초린의 신형이 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숨고 싶겠지만, 기어 나올 수밖에 없을 거다.’

    흑룡문은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최소화하면서 해결하고 싶을 것이었다.

    보다 완벽한 준비를 하기 위해.

    그러나 정호기는 그렇게 해 주고픈 마음이 없었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앞에 그들이 몸을 드러내게 만들고 싶었다.

    우웅!

    정호기의 손에서 내공이 춤을 췄다.

    ‘정신적인 깨달음으로 인해서 내공의 향상과 오감의 발달은 가져왔지만, 아직 육체가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내공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정호기가 미소를 지었다.

    ‘육체와 내공을 융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수련이 필요하지.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실전! 싸우고 또 싸워 네놈들에게 다가가며 강해질 것이다. 기다려라. 네놈의 목에 칼을 겨눌 날이 멀지 않았으니!’

    거듭되는 고뇌 속에서 정호기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신은 누구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혈신도, 열호아도, 정호기 그 자신도.

    아직은 누구도 될 수 없었다.

    혈신을 선택하면 다시금 피를 찾아 헤매는 악귀가 될 것 같았고, 열호아로 남는다면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여린 정호기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것은 놓아 주어야 할 어린 시절의 치기일 뿐이었으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의 정신과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기에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팍!

    정호기가 손을 움켜쥐자 모여 있던 내공이 흩어지며 연무실 전체를 강한 바람이 휘감았다.

    ‘언젠가는 선택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복수만을 위한다면 혈신이 맞겠지만, 정호기는 그 이후를 내다보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자, 이제 그물을 쳐 볼까?’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흑룡문이라는 대어이지만, 그 전에 잔챙이를 몇 낚아야 했다.

    ***

    “만금장도 우리의 일에 동참을 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찬성을 했다.

    “찬성입니다. 만금장뿐만 아니라 뜻을 함께 하고픈 이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만금장을 동참시키려는지 회주님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당혜미의 말에 가정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회주’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먼저 회주라 칭했으면 저놈이 나를 더 신임하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그 상대가 당혜미였기에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섬서 전체가 하나가 되지 않는 한은 사파 척결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섬서의 대표인 종남과 화산이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파는 계속된 평화에,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에 당혜미와 사준우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적이 없으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고, 정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같은 정파와 계속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조만간 칼부림까지도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아니, 쉬쉬하며 서로가 숨겨서 그렇지 어디선가는 서로 부딪쳤을 수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가장과 만금장이 같은 날 여는 무림대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호기가 사준우를 바라보았다.

    “한 번 치르는데 막대한 금액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금패, 은패를 만들면서 더욱 많아졌고 말입니다. 그것도 만금장의 금검, 은검을 본떠 만든 것이라 들었는데, 맞습니까?”

    “흠흠, 그것은 회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준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작년에 여는 무림대회에 나가라는 성화에도 불구하고 참가하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정호기 때문에 억지로 참가했었다.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현재는 정파와 사파의 개념이 모호한 상태입니다. 서민들에게 있어 칼을 들면 무인이고, 무인은 모두 도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사신방과 같은 곳이 활개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산은 화산과 종남의 중간에 있는 산이고 복주현은 그 밑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신 바와 같이 사신방, 용호방, 무적문이라는 세 개나 되는 사파가 버젓이 활보를 하고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호기가 좌중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마라문을 들 수 있겠군요. 사가장과 만금장의 중간에 위치한 자리에 마라문과 같은 사파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정파가 어떠한지를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마친 정호기가 사준우를 바라보자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동의합니다.”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이 때로는 위험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바로 그것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갑자기 가정호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정파는 환골탈태를 해야 합니다!”

    가정호가 슬쩍 화세걸의 발을 툭 쳤다.

    “맞습니다! 이제는 저 간악한 사파들이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화세걸도 벌떡 일어나며 맞장구쳤다.

    그 서슬에 의자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자, 알았으니 두 분은 앉으시지요.”

    사준우가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가정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사 소협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문에서 믿을 수 있는 분들로 하여금 영웅회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가문의 경비를 더욱 철저히 하고, 가족과 가문에 속한 분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사파입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유옥접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정호기가 말을 끊었다.

    “이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모실 분들만 모시면 됩니다. 저 또한 영 제와 나 제를 제외하곤 딱히 없어 부르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그리고 제 계획이 위험하다 판단되시는 분은 빠지셔도 됩니다. 이건 자칫 가문의 안위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의를 해 봐야겠습니다.”

    사준우의 말에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모두 가문에 오늘 제가 한 말을 전하시고 허락을 받으신 다음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

    “정호, 가문에서 허락을 해 줄까?”

    화세걸의 물음에 가정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좋은 기회를 왜 놓친단 말인가?”

    “좋은 기회라니?”

    “쯧쯧, 자네가 이리 어리석은지 몰랐네. 하긴, 정호기 그놈이 그토록 영악한 놈인지도 몰랐으니까.”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게. 지금 각 현에 있는 사파를 쓸어버리면 그곳을 누가 차지하겠는가?”

    “아!”

    “바로 우리들이지 않나? 정호기 놈도 그것을 노리고 있는 거란 말이네. 사파 척결? 흥! 이름만 그럴듯할 뿐, 그놈들이 가진 것을 뺏어 먹자는 수작일세.”

    “그럼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동참을 하겠구먼.”

    “사가장이야 당연할 테지만 당가는 모르겠군. 섬서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겠는가? 아마도 당 소저 혼자 계속 이곳을 지킬 것 같네. 자, 그보다 서둘러 장에 전서를 넣게나. 사람들을 보내고 관에 손을 좀 쓰라고.”

    “하긴, 관을 무마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좀 골치 아프겠지?”

    “그렇지, 놈들도 관과 밀접하게 엮여 있지 않나. 그러니 푸짐하게 대접하라고 하게. 나중에 놈들의 구역을 먹으면 몇 배의 이득으로 돌아올 테니.”

    “근데 말이네. 정 소협이 자꾸 마라문을 들먹이는데, 설마 건드리자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한 것을 왜 묻나? 그놈이 좀 성취를 이뤘다고 해서 이런 전력으로 마라문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은가? 게다가 사가장이나 만금장도 마라문과 얽혀 있는데, 그것을 찬성할 리도 없을 테니 걱정 말게. 말은 저렇게 거창해도 거치적거리는 놈들 몇 부수고 나면 다시 만만한 놈들을 찾아다니게 될 거네.”

    “그렇겠지?”

    반색한 화세걸이 나가려다 다시 가정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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