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뭔가요?”
“만일 그 살수가 진짜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정 소협을 노리는 것이라면 정 소협이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화세걸의 말에 유옥접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말씀은 정 소협이 영웅회를 나가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본인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 같은데요.”
말을 마친 화세걸도 가정호와 마찬가지로 몸을 뒤로 젖히며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발끈하며 벌떡 일어난 유옥접을 정호기가 말리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좋습니다, 제가 나가지요.”
그 말에 유옥접과 가정호, 화세걸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당혜미와 사준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유옥접의 표정도 안정을 찾았는데 그것은 당혜미, 사준우의 속내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지금 정호기와 가정호가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건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두 사람의 가치를 논하자면 금덩이와 돌덩이의 차이였으니까.
그런 점을 알고 있기에 당혜미와 사준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책한 유옥접이 자리에 앉았다.
“정말 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가정호의 물음에 정호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모두를 위험하게 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나 영웅회를 나가더라도 정의를 실천하는 계획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영웅회라는 간판이 없다 해도 정호기가 일을 하는데 아무런 아쉬움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저도 영웅회를 나가겠습니다.”
“저도요.”
당혜미와 사준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했고, 유옥접도 물론 동참했다.
이러니 내다 버려진 음식쓰레기 같은 처지가 된 것은 가정호와 화세걸이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
만일 귀접의 잔당이 노리는 것이 정호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 사람이 빠져나간다면 두 사람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문으로 들어가면 안전할 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예전의 무능한 인물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겉으로는 정호기가 영웅회를 나가는 것 같지만,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그가 버린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 나왔으니, 한 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야겠군요. 모두를 위험하게 하지 않으려면.”
‘모두’가 가리키는 것이 가정호, 화세걸 두 사람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정 소협…….”
정호기가 몸을 일으키자 가정호가 놀라서 따라 몸을 일으켰다.
“세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나서서 정 소협의 방패가 되어야 하거늘! 정 소협. 진정하고 앉으시지요. 세걸이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다시 패배자가 되어 가문에 얹혀살 수는 없었다.
영웅검이란 그럴듯한 별호를 얻고, 이제야 겨우 약간의 인정을 받게 된 가정호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정호기나 다른 사람들이 나가더라도 또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 영웅회를 존속시킬 수는 있겠지만, 누가 자신을 보고 영웅회에 들어오려 하겠는가?
가정호가 눈짓을 주자 화세걸도 비등한 몸을 일으키더니 정호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 소협, 제 말이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런 방향으로도 생각을 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말하려던 것인데……. 죄송합니다.”
“자, 세걸이도 이렇게 사죄를 드리고 있으니 진정하시고 일단 앉으시지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다 요 근래 맛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은 너무도 달콤했다.
자존심까지도 사라지게 할 만큼.
“저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정색을 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정 소협의 방패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저도 너무 성급하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가소로운 놈.’
가정호 정도는 정호기에게 있어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어쨌든 정호기가 자리에 앉자 가정호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채 진정이 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사준우가 그를 자극했다.
“이쯤에서 회를 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준우의 말에 가정호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영웅회의 특성상 이익을 도모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사파와 맞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니 회주가 아무래도 무공이 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무공으로 따져도 가정호는 여덟 명 중에서 화세걸을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이긴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가정호가 정호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굳게 다문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세걸은 아예 도움이 되지 않으니 제외하고, 다른 이들의 얼굴을 훑어본 가정호가 체념한 듯 사준우의 제의에 동의했다.
“사 소협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영웅회를 이끌려면 무력이 우선이 되어야겠지요.”
사실 이것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사파도 아니고 정파에서 무공의 고하로 직위를 결정짓는다니.
그러나 말을 하는 가정호도 제안을 한 사준우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 소협께 회주직을 맡기고 싶은데,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마지못해 회주직을 포기하는 가정호를 보면서 사준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아까 정 소협을 잡을 때 회주직을 넘겼으면 모양새라도 좋았지.’
딱 이정도의 사람이 가정호였다.
어쨌거나 만장일치로 정호기가 회주가 되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자, 이제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까?’
정호기를 노리고 두 번이나 기습을 했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관해 정호기도 어떤 답변을 내놓아야 했다.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회주직을 맡겠습니다. 먼저 어제 기습을 한 사람에 대한 것부터 말을 해야겠군요. 가 소협의 말마따나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유 소저도 아시겠지만, 제가 하남에 갔을 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거든요.”
정호기가 말한 것은 덕칠, 동팔 형제와의 싸움과 악가장으로 몸을 피하며 생긴 일단의 사건이었다.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낸 것이다.
“정말 파천궁이었습니까?”
사준우가 놀라 물었다.
“예. 그러나 그 뒤로 어떤 일도 없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만일 가 소협의 말씀대로라면 파천궁이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있어요.”
유옥접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사가장에서 열린 무림대회에서 박살난 분이 있지 않았나요? 좀 심하게 당했었는데…….”
“그 사람도 있군요.”
사준우도 이제야 생각이 난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따지면 삼절 중에서 색절을 정 소협이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후예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제가 원한이 좀 있었군요. 그나저나 차라리 저를 노리는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말을 하는 정호기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사파 척결의 의지를 계속 이어 나가는 한 그런 위험은 항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꺼려지는 분은 영웅회를 나가셔도 좋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누구도 나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화세걸이나 가정호도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면 모두 함께 하기로 하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기가 좌중을 둘러보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회주로서 내걸고자 하는 기치는 바로 정의 수호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제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정호기가 말을 마치자 유옥접이 박수를 쳤고 이어 모두가 같이 그녀를 따랐다.
“이런 좋은 순간에 나 소협이 안 계셔서 유감이군요. 나 소협은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사준우의 질문에 정호기가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나 제에게 전서가 왔었는데, 제수씨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장원에서 고칠 수가 없어 외조부님과 함께 모종의 장소로 이동한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다 련 매의 병세도 악화되어 같이 가기로 했다는 군요.”
“허, 모쪼록 빨리 쾌차를 하셔야 할 것인데…….”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외조모님의 산소에도 다녀오신다 하더군요.”
“화해하신 겁니까?”
정호기와 천수신의가 만나는 장면을 직접 본 사준우였고, 천수신의와 정호기의 부모가 껄끄러운 사이라는 것을 확인했었다.
“가족인데 화해라고 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잘 지내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을 해 놨으니 나중에 정가장이 비었다고 해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선 다른 변명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정호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전제하에서.
* * *
쾅!
탁자를 내리친 가정호가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닌가?”
화세걸이 옆에서 말렸지만, 가정호는 쉴 새 없이 술을 마실 뿐이었고, 어지러이 널려진 술병이 그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알려 주었다.
“내, 내가, 이 영웅검 가정호가 그따위 애송이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다니!”
다시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이 수모는 반드시 돌려주고 말 테다.”
“원래부터 노리고 있었던 것 같지?”
화세걸의 말에 가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은 처음부터 나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야.”
많은 술을 마셨음에도 아직까지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네. 굳이 자네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나도 물론이고.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없다고 해도 충분하잖은가. 게다가 처음에는 아예 전면에 나서려고도 하지 않았다면서?”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놈의 목을 죄는 열쇠 같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텐데?”
“분해하는 건 오늘까지 만이야. 내일부터는 놈의 발이라도 핥아 줄 정도로 충성을 다하겠어. 놈이 제 입으로 비밀을 까발릴 때까지. 자네도 도와주겠지?”
“물론이네. 따지고 보면 나도 놈에게 이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화세걸이 이용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바란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놈!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마.”
가정호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
-어쩌고 있더냐?
-대형에게 복수를 다짐하던데요?
영초린은 자신이 들은 바를 정호기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충성을 다한다고? 좋아, 그럼 내일부터는 소처럼 부려 주지.
-대형.
-왜?
-만일 대형의 계획대로 된다면 장은 안전할까요?
-놈들이 쳐들어갈 수도 있겠지. 가족이 없더라도 말이야.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영초린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이놈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영초린을 보면서 정호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살수인 사부를 두고, 그 자신도 살수로의 재능이 뛰어난데 쓸데없는 인정이 너무 많아.’
그동안 영초린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정호기의 생각처럼 정파의 인물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나상진은 애초부터 타인의 생명이나 사연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인물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천만 명을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했기에 정호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군.’
-초린아.
-예.
-흑룡문과 싸우는 것은 사부님의 유지를 잇는다는 것도 있지만, 혹시라도 사부님이 놈들에게 잡혔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놈들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는 야차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