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뭣들 하는 것이냐!”
조당의 호통에 두 사람이 고개를 조아렸다.
“쯧쯧…….”
마중마 연성 계획을 마련하면서 제자를 두지도 않고, 그들에게 맡겨진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를 후계로 삼겠다는 공약을 한 조당이었다.
현재 가장 두각을 보이는 이가 홍여립의 문하에서 나왔기에 이대로 간다면 그가 후계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직은 냉가의 위세가 더 강하다. 만일 홍가에서 계속 냉가를 박대하다가는 흑룡문이 둘로 갈라질 수도 있겠구나.’
뭔가 수를 내야 했다.
흑룡문에서 가장 강한 두 가문인 냉가와 홍가가 정면으로 붙는다면 흑룡문은 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중지란으로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죽기 전에 냉가를 정리하든가 홍가를 키우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허허, 내가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니.’
조당은 무려 부인을 열이나 두었건만 자식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딸이라도 낳았다면 이렇듯 심란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조당의 머리에 공손우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그놈을 불러야 하나?’
현재 공손우는 모종의 장소에서 앞으로 있을 중원 정복의 계획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홍여립과 냉백을 가끔 불러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잠깐이라도 공손우를 데려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라!”
조당의 호통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는데, 문을 지나며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는 그들을 보면서 조당이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서로를 견제하고 물어뜯으려고만 하다니. 차라리 냉가에서 뛰어난 놈이 나왔다면 좋았으련만.”
조당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 갔다.
* * *
정호기 등이 영웅회의 본거지로 돌아오자 기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가장은 무탈하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것 같구나. 좋아! 이제 마음껏 설쳐 보자!’
나상진이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나면, 본격적으로 흑룡문의 계획을 방해할 생각이었다.
‘기다리다간 때를 놓치거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어. 차라리 네놈들이 먼저 기어 나오게 만들어 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나상진이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수련을 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폐관 수련을 한다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연무실에 틀어박힌 정호기는 처음에는 수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홍여립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닌데, 무영과 무흔이 그 뒤로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목을 끌기 싫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사파 토벌에 나서면 마음 놓고 나를 공격할 거야.’
원한이 많아지면 누가 사주를 했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을 테고, 영웅회에 당한 사파 중 누군가가 의뢰를 했거나 원수를 갚기 위해 공격한 것이라 여기게 될 것이니, 흑룡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호기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후우…….”
한숨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고 수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밖에서는 영초린이 경계를 서고 있었기에 무영의 기습을 어느 정도는 막아줄 것이니 방해받을 걱정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점점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던 정호기는 어지럽게 펼쳐진 여러 갈래의 길과 형형색색의 빛을 보면서, 점점 변화해가는 내면에 조금은 당혹감을 느꼈다.
‘전보다 더 다채로워졌군.’
혈신이던 시절엔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로지 붉은색이었고, 길도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계속해서 길과 색이 오히려 더욱 늘어 가는 추세였다.
‘광랑십삼검을 버리고 절영도를 익힌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상해. 이러다 주화입마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무공은 달라졌어도 그 바탕은 등천공, 즉 잠룡승천공이었다.
무공이 내력에 영항을 준다고는 해도 이런 변화는 너무 심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는 무공 때문도, 내공심법 때문도 아니었고, 정호기란 인간 자체의 변화 때문이었다.
혈신 정호기가 아닌 열호아 정호기가 되어 그동안 갖지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게 되어 일어난 변화인 것이다.
‘이번엔 되려나?’
색과 길을 합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분히 길 하나를 응시하여 그 길이 나아가는 곳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뻗은 길.
이전에도 봤던 길이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지만, 이 많은 길 중에서 어떤 길 하나를 선택해 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자, 움직여라.’
어지러이 얽혀 있는 길 중에서 두 개를 선택해 하나로 합치고자 했다.
‘응?’
지금까지 요지부동이던 길이 마치 뱀과 같이 꿈틀거리더니 하나로 합쳐 좀 더 넓은 길이 되었다.
‘뭐지? 뭐 때문에?’
물론 합쳐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어떤 계기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다음에도 또 이렇게 합쳐진다는 보장이 없으니, 아무리 궁금해도 일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내면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나둘… 길과 길이 합쳐지고, 색과 색이 결합되면서 커다란 세 개의 길과 희고, 검고, 붉은 세 가지 색만이 남았다.
‘세 개의 길과 세 가지의 색이라…….’
왼쪽으로 뻗은 길의 주변은 흰색이었고, 가운데가 붉은색, 그리고 오른쪽이 검은색이었다.
‘그나저나 감정과 무공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인 줄은 몰랐군.’
길과 색을 합치며 정호기도 자신의 내면이 이토록 다채롭게 변한 것이 감정에 의한 것이며, 혈신으로 살던 시절 자신에게 없었던, 아니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표출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스스로가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헝클어져 있었어.’
백이십 살 먹은 노인의 정신이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가 다시 살다 보니 몸과 정신의 부조화가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것이 세월이 지나며 점차 융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그 안에 깃들었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허헛, 나는 노인인가, 청년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까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아이인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정호기의 정신은 서서히 그 세 가지가 융합되어 점차 하나로 이뤄지고 있었다.
***
정호기가 수련에 들었을 때, 영초린은 연무실이 있는 전각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정호기가 수련에 들어간 직후부터 만 하루에 걸쳐 전각 전체를 꼼꼼히 수색하고 있는 영초린은 한 사람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무영이라… 내가 만일 그라면 절대 대형을 떠나지 않을 거야.’
흑룡문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나 자객의 본능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멀리 떠나지 않는 법이었다.
기회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니까.
‘놈이 어디 있을까?’
만일 흑룡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곳 영웅회의 본거지까지 쫓아왔을 것이었다.
어쩌면 흑룡문에서 정호기를 끝까지 죽이란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었다.
‘이걸 함정이라 여긴다면 멀리서 관찰하고 있겠지.’
[조심해라. 솔직히 내가 보기에 그놈이 너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정호기의 말에 자존심에 조금 금이 갔다.
사부가 그러지 않았는가?
중원에서 자신이 최고였다고.
‘그런 내가 무영이란 놈에게 뒤진다고?’
그러나 그 말로 또 한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게 있었으니, 그만한 실력을 지닌 자라면 자신감 또한 대단할 것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감은 때론 행동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대형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놈이 아직까지 대형을 따르고 있다면 분명히 들어올 것이다. 아무리 함정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어둠에 몸을 맡기고 마치 한 마리 뱀처럼 바닥을 기어 이동을 할 때, 영초린의 솜털이 살짝 떨렸다.
결코 바람에 스친 것은 아니었다.
쌓인 먼지조차 날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으니까.
‘있다! 놈이 근처에 있어!’
흥분감이 밀려왔지만, 이내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객에게 있어 감정의 파도는 금물이었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조용하게, 견고한 바위처럼 굳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어딜까? 어디 있을까?’
살수들의 승부는 누가 먼저 상대를 발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나뉠 정도로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비슷한 수준이어야겠지만.
‘나라면 어디서 공격을 할까?’
알아도 막기 힘들고, 확실하게 선제공격할 수 있는 곳.
‘뒤!’
영초린의 신형이 순식간에 빙글 돌더니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바뀌었다.
‘없어?’
실제로 보이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어떤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솜털이 곤두서고, 등골이 시리며, 뒷목이 찌릿한 감각.
순간 영초린이 몸을 발라당 뒤집었는데, 그런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당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줄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시퍼런 단검을 겨누고 있는 무영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영초린은 자신의 생명이 여기서 끝났다고 여겼다.
당연히 독을 묻혔을 것이라 생각되는 단검이 벌써 그를 향해 내리 꽂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영초린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쾅!
폭음과 함께 전각이 뒤흔들렸고, 영초린은 등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천근추를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무영이 그런 그를 향해 단검으로 공격을 했지만, 전각에 매어 놓은 줄이 흔들리며 몸이 같이 움직여 초점이 빗나갔고, 단검은 영초린의 앞섬을 가르며 지나갈 뿐이었다.
***
떨어지는 영초린을 쫓아 붙잡고 있던 줄을 놓은 무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죽인다!’
무영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영초린의 허점을 찾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다.
그 움직임이나 주위를 경계하는 것이 자신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방심을 했다면 뒤를 잡히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을 만큼 영초린은 타고난 살수와 같이 행동했다.
정호기가 전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만 하루가 지나도록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 것은 영초린 하나 때문이었다.
아직 위에서 어떤 명령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기회가 왔을 때 영초린을 죽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전각이 흔들릴 때 느껴졌던 거대한 기의 파동.
자신이 감시한 바가 맞는다면 이 전각에 들어 온 것은 정호기와 영초린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호기가 일으켰을 테니 서둘러야 했다.
‘어리석은 놈!’
손을 뻗어 자신의 단검을 잡으려는 영초린의 행동을 보면서, 그곳에 발린 극독인 역천(逆天)을 팔 하나로 막으려고 하는 그의 생각에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한 방울만으로도 황소 열 마리를 죽일 수 있는 역천은 남만에 있다는 독 개구리의 독과 시독을 결합한 것으로, 피를 타고 몸에 들어가 순식간에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팔로 막는다면 오히려 죽음을 더 재촉할 뿐인 것이다.
단검을 막는 순간에 팔을 잘라 낸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두 번째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기에 영초린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영초린의 손과 단검이 만나려는 그 순간!
“컥!”
배를 강타하는 충격에 허리가 꺾이며 절로 고개가 아래로 향하자, 그곳에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호기의 얼굴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 장여.
그 거리를 격하고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손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랜만이다.
내장이 터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정호기의 전음은 또렷이 무영의 뇌리에 전달되었다.
순간 정호기의 모습이 흐려진다 싶었는데, 어느새 면전에 들이닥쳐 주먹을 뻗고 있었다.
-내가 또다시 네놈을 죽이게 될 줄은 몰랐구나.
턱이 부서지고 가슴뼈가 움푹 들어가며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무영은 생각했다.
‘또 죽여?’
희미하게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을 느끼면서도 무영은 아픔보다 궁금증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