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65화 (66/137)

65화

‘고대랑의 말씀처럼 빚은 사라지지 않았고, 구정물 그놈도 죽지 않았으니 또다시 끌려가게 될 거야. 잡아야 해. 이 기회를 잡아야 해!’

그녀가 다짐을 할 때, 유옥접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미 그녀가 저간의 사정을 다 이야기했기에 감여월에게 연민의 감정이 깃든 것이다.

“기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제 그만 눈을 뜨세요.”

유옥접의 말에 감여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지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드리지요.”

“구, 구정운이 기루에 찾아왔었어요.”

“구정운인가 하는 놈이 아직 있다고요?”

“예. 제가 기루에 갔을 때 고대랑이 절 숨겨 줬는데, 그분이 구정운이 왔다고 하셨거든요.”

“제가 처리를 해 드리지요.”

당혜미가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안 돼요!”

감여월이 왜 이렇게 격정적으로 자신을 말리는 것인지 당혜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겁을 준다고 해도 옆에서 지켜 주지 않는 한, 언젠가 당혜미의 협박은 더 큰 위험으로 분해 다가올 것이었다.

구정운이 아니라고 해도 무적문의 인물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있었고, 그게 아니어도 복주현의 밤을 다시 지배할 누군가가 감여월의 처지를 듣게 된다면 그것을 빌미로 또다시 협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빚을 갚아 드릴게요.”

“…….”

물에 빠진 걸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경우란 것을 감여월도 알았지만, 감여월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가가는 저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요!”

갑자기 감여월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정가가란 말을 들은 유옥접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가? 가가라고 칭하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기루에 속한 여인들의 한과 속사정을 알고 있었고, 오세지나 구정운과 같은 놈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한지도 알았기에 감여월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감여월이 정호기를 정가가라 칭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정 소협과 혼인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손을 놓으며 갑자기 차가운 얼굴로 말을 하는 유옥접을 보며 감여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나, 난…….”

“너무 파렴치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사람이 친절을 베풀면 적당히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요. 욕심이 과하면 하나도 얻지 못하는 법이에요.”

쌀쌀한 유옥접의 말에 감여월이 눈물을 보였지만, 그것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딱한 사정을 감안해서 빚은 갚아 주겠어요. 구정운인가 하는 작자에게 가서 말도 해 놓지요. 대신 더 이상 정가가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셨나요?”

감여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 그럼 일어나세요.”

“저기 유 소저. 감 소저와는 제가 같이 가도록 하지요.”

당혜미가 말을 하면서 감여월을 가리켰는데,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몸은 가는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유옥접이 살기를 뿜는 바람에 감여월이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처럼 무인의 살기는 일종의 공격 수단이 될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기에 살기만을 수련하는 무공이 있을 정도였다.

감여월의 모습을 본 유옥접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당혜미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자, 일단 얼굴을 좀 만지고 나가도록 하지요.”

당혜미가 감여월을 상대하는 사이, 유옥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자책하고 있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자신은 절대 정호기와 엮일 수 없는 몸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가가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것도 당 소저가 있는 곳에서…….’

지금까지 꽁꽁 숨겨 왔던 자신의 감정을 모두 까발린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

“감 소저의 일은 잘 해결 되었습니까?”

“네.”

가정호의 말에 당혜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는데, 그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구정운의 손가락 한 개를 녹여 버린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행이군요. 그럼 내일 일찍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요.”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떠나야 하는 길이었다.

사준우는 정호기를 바라보지 않았고, 정호기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서먹한 분위기였지만, 가정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 소협과 정 소협이 틀어지면 나에게는 좋은 거지.’

둘이 가까워지는 것이야말로 경계할 일이지, 이런 일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호기가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사 소협께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제 너무 무례하게 군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호기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사준우가 마지못해 그의 사과를 받았다.

“아닙니다. 정 소협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는데… 저도 생각이 짧았습니다.”

비록 사과를 하긴 했지만 사준우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운 상태였다.

“제가 밤새 고민한 결과 이번 사태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악도를 찾아가기보다는 사신방, 용호방과 같이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이들을 처단하는 것이 더 우리가 뭉친 것과 취지가 맞는다고 봅니다.”

정호기의 말을 사준우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받았다.

“사신방과 용호방이 사라졌다고 해도, 내일이면 새로운 사파가 이 지역의 밤을 지배하면서 전과 같은 일을 할 겁니다. 사파 척결? 그게 그렇게 쉬운 것 같습니까?”

“사 소협이 말씀하시는 바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사신방과 같은 곳을 섬서에서만이라도 몰아내자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견제를 한다면 저들이 힘을 잃지 않겠습니까?”

“자칫 사파가 연합을 할 수도 있고, 그들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가문의 힘을 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파가 연합할 수도 있다 하셨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 소협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신방처럼 작은 사파들만을 목표로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섬서에는 흑룡문이나 파천궁에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사신방보다 훨씬 큰 사파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마라문이 그 대표적인 곳이라 할 수 있겠군요.”

사준우의 말에 정호기가 옳다구나 하고 그것을 받았다.

마라문이 실상은 흑룡문의 지원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라문을 이끌고 있는 하귀 고주는 열화장이 특기였고, 그의 쌍둥이 동생인 동귀 고태는 한빙장이 특기인 고수들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합공을 하면 사가장의 태상장주인 사비연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에 사준우를 비롯한 이들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마라문을?”

“예.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쩌자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주변의 작은 사파들부터 정리하면서 세를 끌어들이지요. 예를 들면 만금장이라던가… 정파가 뭉친다면 예로부터 사파는 그 힘을 잃었습니다. 지금 이렇듯 사파가 활개를 치는 이유는 정파가 분열되어 자신들만의 이득을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부 정파인들 중에는 사파와 손을 잡고 그들이 주는 뇌물을 먹는 곳도 있다 하더군요.”

가정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얘기한 적이 있는 삼봉문이 바로 사파였고, 그들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사파 척결의 의지를 다시금 중원에 떨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영웅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당히 말하는 정호기를 사준우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의 표정이 많이 풀려 있었고 또한 입가에는 작은 미소까지 깃들어 있었다.

***

영웅회의 인물들에게 역설(力說)을 하고 돌아온 정호기는 영초린과 함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장에서 무탈하다는 연락이 오면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을 진행하겠다.

-별 탈 없겠지요?

-그렇게 생각해야지.

정호기가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귀접을 사칭한 놈들의 배후가 흑룡문이라면 놈들이 벌인 일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개방에 의뢰를 해 놓았으니 그들이 가져올 정보를 봐야겠지만, 섬서만 놓고 본다면 일종의 길을 만들듯이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전에 대형의 가문에 수작을 부리려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영초린의 말에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예.

이미 그것은 정호기도 생각한 바였는데, 그것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그것을 모르고 있지?’

분명 자신의 기억에는 사파를 상대로 수작을 부렸단 기억이 없었다.

그가 만난 사파들은 그의 앞에 조아리는 것들뿐이었고, 정파에 숨겨 놓은 세작들이 전부였다.

‘따로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으니… 거기다 사파는 의례 나에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서 인가?’

사파 자체에 세작을 심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단 그것은 장에서 소식이 온 이후에 더 논의하자꾸나. 주변은?

-이상 없습니다.

-너만 믿는다.

무영과 무흔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호기였기에 영초린으로 하여금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게 하였다.

***

“실패?”

“예.”

조당의 물음에 홍여립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허허, 자네가 실패를? 그런 애송이 하나 잡는데?”

“그것이… 그놈이 제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었습니다. 무흔과 무영을 보냈는데도 실패했으니 말입니다.”

“그래?”

“어찌할까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기필코 죽여야 할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영이 보낸 전서에 의하면 놈은 결코 이대로 사라질 정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질 놈입니다.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홍여립의 말에 옆에 있던 냉백이 코웃음을 쳤다.

“홍 당주께서 실패를 무마하고자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홍여립의 눈썹이 꿈틀했다.

“냉 당주께서 일을 잘 처리했으면 지금쯤 우리 흑룡문의 기둥이 되었을 놈이지요.”

“뭣이라?”

“사실 아닙니까? 정가장은 애초에 마중마 연성 계획과 천이 계획에 속해 있던 곳. 냉 당주께서 성공하셨다면 제가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홍가야,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쯧쯧, 말을 했으니 말이고, 그 내용이 옳으니 당연히 다이지요.”

“이놈이……!”

쾅!

탁자를 부순 조당은 두 명을 같이 부른 것을 후회했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이들 두 사람이 흑룡문의 미래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만일 지금처럼 아옹다옹한다면 그 미래가 밝을 리 없기에 되도록 같이 있는 자리를 만들어 친해지기를 바란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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