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정말 아는 것이 없습니까?”
사준우의 말에 당혜미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당혜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풍대가 경비를 서고 감철민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당혜미의 무공이 높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렇기에 지금 사준우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당평이었다.
“어째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당혜미도 사준우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른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도 아는 것이 없었다.
‘분명 당주님은 나에게 철접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직접 나서셨을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닐 거야.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난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내 자신 스스로도.’
“물론 우리 가문에서 귀접의 신물을 탐낸 것은 인정하지만, 염치없게 도둑처럼 살며시 가져갈 정도로 간절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어제 조금 더 무리를 했겠지요. 신물이 사라지면 당연히 우리가 의심을 받을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훔치는 행동을 했겠습니까?”
그녀의 말은 타당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불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훔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정호기가 주의를 집중시켰다.
“귀접의 신물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사 소협의 말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누가 증명할 수 있을까요?”
정호기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사준우에게로 향했다.
“정 소협?”
사준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속에는 감출 수 없는 불쾌감도 같이 자리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당 소저께서도 지금의 사 소협과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귀접의 신물이 우리가 서로를 의심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천고의 기물이라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귀접을 죽였다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귀접을 직접 죽인 것은 당가이지만, 그들은 다 차려진 밥상에 젓가락을 얹은 것뿐이었다.
“우리가 아니라고 하여도 당가에서는 귀접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호기가 말을 하다가 가정호에게 눈짓을 주었다.
“흠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금 빨랐을 뿐이지요.”
“가 소협?”
“자자, 우리 영웅회의 취지가 무엇입니까? 정의를 실천하자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깟 하찮은 신물 따위로 인해서 우리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을 보관한 사 소협께도 책임이 있으니,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정호의 말에 사준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나서서 맡겠다고 한 것이 자신이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렸으니,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었기 때문이다.
“당 소저께서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시어, 사 소협의 말씀을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가정호가 사태를 수습하는 것을 보며 정호기는 이대로 일이 끝나기를 바랐다.
‘당혜미가 지금 떨어져 나가면 곤란하지. 당가도 이 시궁창에 발을 들여놓아야 해.’
사가장을 통해 종남을 끌어들이고, 당혜미를 이용해 당가를 끌어들일 셈이었다.
그리고 홍초희를 영웅회에 받아들임으로써 화산도 이 싸움에 동참시켜야 했다.
‘가족들의 안전이 확인되는 대로 너희들을 부숴주마.’
아직도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무영과 무흔을 생각하며 정호기는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똑똑.
“예,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감철민이었다.
“저… 밖에 누가 찾아왔습니다.”
“모시고 오시지요?”
“그것이… 정 소협을 뵙고자 하는데…….”
“저를 말입니까?”
“예. 정 소협의… 흠흠, 연인이라고 하시는 군요.”
감철민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연인?’
듣는 정호기로서는 황당한 얘기였다.
* * *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감여월이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감 소협, 혹시 인척이십니까?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감철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같은 감씨라 물어본 것인데,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별 시답지 않은 게 들러붙으려고 하는구나.’
가뜩이나 심사가 편치 않은 정호기였기에 이따위 문제로 골치를 썩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전 분명히 침상에 누웠어요.”
겨우 울음을 그친 감여월이 입을 열었는데, 첫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소저를 보호하기 위해 부른 것뿐입니다. 계속 주루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침상에 눕기 전에 제가 수혈을 찍었고, 소저를 눕히자마자 전 침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요컨대 사람들의 눈이 무섭단 소리였다.
“이미 소저는 기루에 팔린 신세였습니다.”
정호기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자 감여월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깨끗한 몸이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정호기의 반문에 감여월이 정색을 하더니 이내 풀썩 쓰러졌다.
‘지랄하네.’
지금 그녀의 심장은 터질듯이 힘차게 뛰고 있었는데, 만일 진짜 혼절을 했다면 곧 안정을 찾아야 함에도 오히려 심장의 고동 소리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 속에서 혼절한 듯 연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모르기에 하는 행동이리라.
“그만 일어나…….”
정호기가 그녀에게 다가갈 때, 유옥접이 그를 말렸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유옥접이라고 어찌 감여월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감여월을 안더니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고 그런 그녀의 뒤를 당혜미가 따랐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가정호의 물음에 정호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보내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빚 때문에 오세지란 놈에게 끌려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지요.”
정호기의 말에 사준우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놈들이 쉽게 놔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세지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그의 뒤를 잇게 되면 또 끌려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저더러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라…….”
“저하고 그 감 소저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부른 것도 기루에 남겨 두면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가 없기에 그리한 것이고요.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저를 얽어매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 아, 예.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녀가 뭐라 떠들고 다니던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작게는 정 소협이, 그리고 나아가서는 영웅회와 정가장이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감여월의 하는 행동으로 봤을 때, 완전히 막가자는 식이었기에 본인의 수치를 무릅쓰고 사방에 떠벌릴 확률이 컸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이 되리라.
‘죽여 버릴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거기다 혹시라도 감 소저가 어떤 위해를 당한다면 그 뒷감당을 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심사가 편치 않았기에 마음속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정호기가 살짝 뿜어낸 살기를 느꼈던지.
“사 소협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녀를 이곳에 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아직 무적문이나 용호방, 사신방의 인물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 그녀를 데리고 가잔 말씀입니까? 그럼 그녀의 가족은요? 그들도 위험하니 같이 가야하겠군요. 그 가족의 친인척이나 인연이 깊은 이들도 위험하니 그들도 같이 모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웅회의 결속을 얘기하던 정호기였건만, 오히려 지금은 사준우에게 시비라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정 소협,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쾅!
“그럼 어떻게 하잔 말씀입니까!”
정호기의 손에 맞은 탁자가 우지끈하며 부서졌고, 일어선 그의 몸에서는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꼭꼭 숨겨 두어 애써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던 가족에 대한 걱정과 짜증이 폭발한 것이다.
‘아차!’
일단 화를 폭발시키자 제 정신이 든 정호기였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잔뜩 굳은 얼굴의 사준우와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은 가정호, 그리고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는 화세걸의 얼굴을 보면서 정호기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생각했다.
‘이대로 밀고 나가?’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했다.
너무 지금까지 오냐오냐한 것이 있어서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으니, 이 기회에 인식을 바꿔줄 필요가 있긴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게 나섰군요.”
싸늘한 얼굴의 사준우가 먼저 사과를 했지만, 진정성이 보이지는 않았다.
“정 소협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본인과 주위에 폐가 되지 않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사준우가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정호가 정호기에게 다가왔다.
“쯧쯧, 하여간 오지랖 하고는. 정 소협, 제가 보기에 감 소저는 아마도 돈을 노리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깨어나면 돈을 좀 쥐어서 보내지요. 빚이 문제라면 빚을 갚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정호기에게 내밀었다.
“정 소협께서도 가지고 계시겠지만, 제가 좀 여유 있게 가지고 왔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봅니다. 모자란다면 제가 더 구할 수도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능글맞게 웃는 가정호의 얼굴을 보면서 정호기는 심각하게 갈등했다.
‘한 대 칠까?’
가정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어쩐지 사준우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정호기가 갈등하고 있는 사이 감여월은 주루의 여주인인 고대랑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이년아, 복이 굴러 들어왔으면 잡아야지! 잘하면 대갓집 안주인이고, 못해도 평생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어. 첩이면 어떠냐? 네가 잘돼야 네 가족도 편히 살 수 있지 않냐? 여기서 어물쩍거리다가 구정물 그놈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네년은 평생 여기서 사내놈들이나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니, 어서 가!]
현재 복주현은 영웅회의 소식으로 들끓고 있었다.
영웅회가 복주현에 있던 사파 세 군데를 동시에 괴멸시켰다고 소문났기 때문이었는다.
그것으로 인해 정호기의 정체도 알려졌고 그 소문을 들은 고대랑이 감여월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네년이 날 찾아왔기에 이런 기회를 얻은 것이니, 잘되면 이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알았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온 감여월이 찾아간 곳은 집이 아니라 자신이 팔려갔던 기루였다.
두려움 속에서도 집에 가는 것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단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