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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62화 (63/137)

62화

숨바꼭질을 하면 덩치 큰 사람이 불리할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특히나 먼저 숨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면.

복면인의 입을 틀어막고 목뼈를 부순 정호기가 조심스레 신형을 뒤로 물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찾아! 놈들을 찾으란 말이다!”

길길이 뛰면서 소리를 지르는 깡마른 중년인은 청룡이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땅딸막한 중년인이 주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서생풍의 중년인이 현무였다.

“대형, 더 이상 수하들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사 층 구조의 전각인 이곳으로 들어온 사신방도들 중에서 벌써 다섯 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청룡이 싸늘한 표정으로 현무를 바라보았다.

현무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전음을 보내는 것 같았는데, 그의 전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룡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찾지 못해!”

청룡이 다시 부하들을 닦달하는 동안 현무가 슬며시 전각을 빠져나갔다. 반각의 시간이 흐른 후 청룡과 주작의 모습도 전각에서 사라졌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고 호통 소리가 사라졌지만, 정호기는 지금 그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배를 깔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복면인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이놈은 너무 노출되었어.’

지금까지 보여 주던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살기가 주변을 감싸다시피 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주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미끼!’

미끼를 던진다는 것은 정호기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움직이면 당한다.’

복면인의 발끝이 정호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갈 때쯤, 갑자기 환한 불꽃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방안을 밝게 비췄다.

‘젠장!’

정호기와 눈이 마주친 것만 세 명이었고, 그 주변에 복면인 두 명이 다른 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는 중이었다.

벌떡 일어난 정호기가 앞서 기어가고 있던 놈의 종아리를 힘껏 밟고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크윽!”

부지불식간에 종아리뼈가 으스러진 복면인이 신음을 흘릴 때, 그의 동료들은 그를 내버려 두고 정호기의 뒤를 따랐다.

쾅!

창문을 뚫고 나온 정호기의 눈에 보인 것은 불타는 전각이었다.

전각 전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문제는 안에 사신방도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불을 질렀단 것이다.

“아악!”

안과 밖에서 불에 타들어 가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청룡이나 사신방도 누구도 그들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때 창문을 뚫고 나오는 정호기의 모습을 확인한 청룡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쳐 내며 떨어질 때, 정호기의 눈에 사신방의 담을 넘는 일단의 무인들이 보였다.

‘너구리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크악!”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수하들에게 어서 화살을 쏘라고 독촉하던 청룡 등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정 소협! 우리가 왔소이다!”

선두에서 무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가정호였고, 그의 뒤로 영웅회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다.

앞뒤에서 포위 된 청룡 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전면에서 수하들을 도살하며 다가오는 복면인들은 가히 공포였기에 그들의 고개는 가정호 등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더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도, 도망쳐라! 길을 뚫어라!”

청룡의 명령에 우왕좌왕하던 사신방도들이 청룡, 주작, 현무를 따라 가정호 등에게로 신형을 날렸다.

“흥!”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본 당혜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그들을 향해 뿌렸다.

“아악! 내, 내눈!”

“파, 팔이… 크으윽!”

눈과 얼굴, 팔이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내리자 사신방도들이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중에서 현무가 그래도 견식이 높은지 당혜미가 뿌린 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단혼사!”

그리고 그의 눈에 당혜미의 녹색 옷과 손에 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 보였다.

“다, 당가다!”

중원에는 당씨 성을 쓰는 이들이 제법 있었고, 당가라 불리는 곳도 여러 곳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무인들이 얘기하는 당가는 사천 당가가 유일했다.

현무의 외침에 청룡은 간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고,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당가가 어째서? 그때 그년이? 아니야, 그럼 그놈이? 아니야. 그럼 그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그의 뺨을 현무가 후려쳤다.

“대형! 정신 차리십시오!”

순간적으로 당가란 말에 정신줄을 놓았던 청룡이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무공이 높기는 하지만 쉽게 흥분하고, 귀는 얇고, 새가슴인 청룡이었기에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응? 아…….”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겨우 숨 두어 번 쉴 정도?

-아무래도 이놈들이 서로 적인 모양입니다.

자신들을 가운데에 두고 양철중을 비롯한 복면인과 정호기 등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본 현무가 전음을 날렸다.

-어, 어떻게 하지?

-중간에 끼어서 경전하사(鯨戰蝦死)할 필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빠지지요.

-응?

되묻는 청룡을 보며 현무가 인상을 쓰다가 쉽게 풀어 말했다.

-놈들끼리 치고받게 놔두고 우린 기회를 봐서 도망치잔 말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쉬운 말 놔두고 어려운 말로 자신을 무시한다며 호통을 쳤을 청룡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우측으로 뛰십시오. 장 제(弟)에게는 좌측으로 뛰라 이르겠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니 흩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알았다.

눈치를 보던 현무가 청룡, 주작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고, 두 사람이 각자 양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따라 살아남은 사신방도들도 같이 죽어라 도망쳤는데, 사실 그들은 그렇게까지 열심히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정호기와 양철중의 눈에 그들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청룡과 현무가 사신방의 담을 넘을 때까지도 그들은 대치를 하고 있었고, 담을 넘은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헉, 헉… 후우~ 저 개새끼들은 뭐… 왜?”

“대, 대형…….”

현무가 놀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녹의를 차려입은 다섯 명의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예의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죽여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암기가 청룡 등을 향해 뿌려졌다.

한편 청룡과 현무가 당가의 인물들과 조우해 생을 마감하고 있을 때, 반대쪽 담을 넘은 주작도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작 등을 막은 이들을 이끌고 있는 이는 바로 정호기와 비무를 벌인 적이 있는 감철민이었다.

사가장의 한풍대를 이끌고 있는 그가 한풍대와 함께 사준우의 뒤를 살피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사신방의 마지막 생존자인 주작도 수하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

“저들은 누굽니까?”

가정호가 정호기의 도인 호아를 건네며 말을 하자 정호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기습을 했으니까요.”

정호기의 대답에 사준우가 복면인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의 시선을 받는 양철중은 무영의 전음을 듣고 있었다.

-이미 당가와 일단의 무인들이 사신방을 포위한 상태입니다. 잘 아시리라 믿지만, 놈을 죽이는 것이 실패하더라도 대주께서는 귀접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무영의 전음을 들은 양철중은 오늘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결국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 모양이군.’

어쩐지 그럴 것이란 예감이 들어 수하들에게 죽음을 불사하란 명을 내리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닥치자 씁쓸했다.

결심을 굳힌 양철중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정호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광견! 나 귀접이 하늘을 대신해 무적문이라는 도당을 만들어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너를 처단하겠다!”

느닷없는 양철중의 행동에 정호기 등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는데, 순간 그의 손에서 붉은 귀화가 피어오르며 둥실 떠올랐다.

“귀접?”

양철중은 귀접 행세를 하며 정호기를 이전 무적문의 문주였던 광견 오세지라 부르며 속이려고 했지만, 이미 그 정체를 간파한 정호기였기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양철중도 정호기에게 들으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다.

정호기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귀접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소?”

가정호가 묻자 양철중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사부님은 혼자 힘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내게는 수하를 거두라 하셨지.”

“그대가 귀접의 제자이오?”

“내가 귀접이다!”

이름을 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이었다.

“난 정의를 위해 이곳에 왔다. 광견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너희들도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간악한 흑도의 무리겠지?”

“흑도라니 당치 않소! 우리는 영웅회의 사람들로, 그대를 잡으려고 온 사람들이오. 여기 이분도 영웅회의 일원으로 그대를 유인하기 위해 위장한 것뿐이오.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그대야 말로 흑도가 아니오?”

“영웅회? 아, 박구를 잡았다는 곳이군. 그럼 묻겠다. 내가 힘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나? 내가 죽인 것은 모두 간악한 흑도의 무리였다!”

양철중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가정호로서는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양철중의 말에 가정호가 머뭇거리자 사준우가 나섰다.

“정의? 흥! 웃기는군. 그대와 그대의 사부는 인명을 대가로 돈을 버는 살수일 뿐이다. 어디서 감히 정의를 논하는가! 대가를 받고 하는 살인은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토록 떳떳하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공정한 재판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겠다.”

사준우의 호통에 양철중이 코웃음을 쳤다.

“악이 지척에 있어도 나서지 않는 허약한 정파가 감히 정의를 실천하는 우리를 심판하겠다는 건가?”

“우리를 못 믿겠다면 관에 가는 것은 어떠시오?”

가정호가 둘의 대화에 넌지시 끼어들며 말했다.

“감히 우리를 우롱하느냐! 관에 빌붙어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너희가 아니냐? 이미 너희와 관이 한통속인데 어찌 우리가 그곳에 가겠느냐?”

하는 말만 들어 보면 양철중은 의적과 같았고, 정파는 제 살만 불리는 돼지였다.

‘이놈들은 언제까지 말만 섞을 것이지? 게다가 저놈들은 어째서 아직까지 도망가지 않는 것일까?’

정호기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철중과 사준우의 설전은 계속 되고 있었는데, 정호기는 그런 그들의 주둥이를 뭉개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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