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61화 (62/137)

61화

자신을 포위한 복면인들이 검은 연기를 피울 때, 정호기는 상황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들은 시시한 흑도 나부랭이가 아니다!’

자신과 검을 마주한 이도, 결코 사신방에 있다는 명호만 거창한 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그 이전에 회음혈을 노리고 검을 찌른 살수만 하더라도 이미 현재의 영초린보다 뛰어난 은신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미숙하긴 해도 일인 최강 살수라 불리던 귀접의 뒤를 이은 영초린보다도!

‘빠져나가야 해!’

정체를 짐작할 수 없지만, 좁은 곳에서는 더 이상 놈들과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참고 진기를 끌어 올려 순간적으로 뿜어낸 후에 바닥을 박찼다.

쾅!

검은 연기가 정호기의 진기에 밀려 나가다 뚫린 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호기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를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귀영단원들이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고, 양철중이 다시금 무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뭐야?”

소란스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차라리 오지 말아야 했다.

바람처럼 옆을 스치며 뛰어가는 정호기의 뒤를 귀영단원들이 따르고 있었으니까.

“크악!”

첫 비명이 들리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땅에 눕는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숨 몇 번 쉬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정호기가 외벽을 뛰어 넘을 때,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피윳!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정호기의 얼굴에 거의 다다랐고, 고개를 젖히는 순간 그의 볼을 할퀴며 지나갔다.

‘독!’

후끈 달아오르는 볼의 느낌에 독이 침투한다는 것을 느낀 정호기가 기를 황급히 얼굴로 인도하자,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쭈욱 찢어지며 피가 솟아올랐다.

기를 이용해 피를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근추를 시전하여 아래로 뚝 떨어졌는데, 그런 그의 머리 위로 화살 두 대가 머리카락을 자르며 날아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화살이 얼굴을 꿰뚫었을 것이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바닥을 구르며 품속을 뒤진 정호기가 예전에 천수신의에게서 챙긴 피독주를 입안에 물고는 땅을 박찼다.

퍽! 퍽! 퍽!

비수가 꼬리를 물고 정호기의 뒤를 쫓아 땅에 박혔고, 일부는 그의 앞쪽으로 날아와 움직임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정호기의 신형이 갑자기 세 개로 불어나면서 세 방위로 쏘아지자, 그것들은 모두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위다!”

양철중의 외침처럼 세 개로 불어난 정호기의 신형은 모두 허상이었고, 실체는 공중에서 화살을 쳐 내고 있었다.

팅!

첫 번째 화살을 쳐 낼 때, 이미 두 개의 화살이 더 날아오고 있었고, 그것을 막아내자 네 개의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무흔! 무흔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정호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화살을 막느라 손이 저릿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놈은 무영!’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흑룡문주가 되기 위해 홍여립을 죽였고, 그가 죽기 직전 한 말이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그의 그림자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던 정호기였는데, 무영·무흔·무심의 삼무(三無)로 불리는 암·궁·검의 절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틀림없는 무흔이야!’

전방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여덟 개의 화살을 보며 정호기는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이들이 흑룡문의 무인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 전에 검을 타고 흐르는 소용돌이치는 내기에서 무흔의 흔적을 발견한 정호기였다.

‘도망쳐야 한다! 살아야 해!’

만일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이라면 정가장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고, 정호기는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적은 허점을 노출시킬 것이고,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만악복 공손우가 한 말이었고, 그가 이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면 분명 정가장을 노릴 터였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 * *

여덟 개의 화살을 막아 가려는 찰나, 갑자기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그 뒤를 따랐고, 뒤쪽에서는 찐득한 살기가 정호기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앞뒤로 포위된 정호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밑으로 떨어지는 것뿐이었는데, 밑에서는 양철중이 검에 내력을 잔뜩 집어넣고 정호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기에 그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결국 결정을 내린 정호기가 자신의 발등을 밟고 위로 솟구칠 때, 그의 등을 향해 빠르게 쏘아지는 것이 있었다.

챙!

팔이 부르르 떨리고, 몸이 충격으로 날아갈 정도의 경력이 실린 검을 막아낸 정호기의 눈에, 멀리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복면인이 보였다.

‘무영!’

그러나 뒤쪽에서 들리는 파공음과 아래쪽에서 솟구치는 살기 때문에 그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화살을 막으려면 다시 몸을 돌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밑에서 찔러오는 양철중의 공격을 막을 수 없으리라.

“하앗!”

내력을 담아 아래를 향해 검을 던진 정호기가 빙그르 돌며 화살을 손으로 막아 갔다.

찌이익!

잡으려던 정호기의 손이 약간 늦었는지 화살이 정호기의 소매를 길게 찢으며 뒤로 날아갔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손과 팔을 이용해 그 찰나의 순간 화살의 날아가는 힘의 방향을 바꿔 놓은 것이었다.

챙!

다시 검을 날리려고 준비하고 있던 무영이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을 막아 내고는 눈에 놀라움을 가득 담아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정호기의 눈에 자신이 던진 검을 막고, 시퍼런 독을 묻힌 검을 이용해 다시금 공격하려는 복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정호기가 입에 물고 있던 피독주를 뱉고는 그가 움찔하는 사이에 발바닥으로 검면을 차며 옆으로 떨어졌다.

‘가야 해!’

땅에 발이 닿자마자 신형을 날린 정호기가 향한 곳은 영초린이 있는 곳도, 나상진이 있는 곳도 아닌… 정가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귀접이 어떻든, 지금 하고 있는 작전이 뭐든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런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으니, 그것은 양철중의 고함이었다.

“쫓아라!”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도 이들은 분명 자신을 쫓아올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위험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몰랐다.

‘거기다… 내가 가는 것보다 전서응이 더 빠르지.’

생각을 고쳐먹은 정호기가 골목을 돌아 향한 곳은 영초린이 있는 사신방이었다.

‘최대한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

오늘 복주현을 주름잡던 세 곳의 사파가 모두 끝장이 날 터이지만, 내일이 되면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들이 다시금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리라.

그것이 흑도였고, 정파가 득세하는 지방에서도 흑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였다.

‘이 골목만 돌면…….’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뒤에서 파공음이 들렸다.

벽을 차며 방향을 바꾼 정호기가 힐끔 뒤를 바라보자, 공중에서 다시금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는 복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무흔! 내가 미완성인 것처럼 너 또한 아직 그때의 네가 아니야!’

정호기가 혈신으로 홍여립을 죽일 당시, 무흔은 날린 화살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정도였다.

두어 번 더 벽을 찬 정호기의 눈에 멀리 사신방의 건물이 보였다.

***

쾅!

굳게 닫힌 문을 들이받아 산산이 부숴 버린 정호기가 안으로 뛰어들며 번을 서고 있던 사신방도의 목을 잡아 뒤로 던졌다.

“크악!”

복면인의 검에 가슴을 찔린 사신방도의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이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사신방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그들이 본 것은 자신들의 동료를 열심히 집어 던지는 커다란 덩치의 인물과 던져진 동료들을 도륙하는 일단의 복면인들이었다.

“기습이다! 죽여라!”

사신방도들이 보기에는 정호기와 복면인들이 같은 편이라 생각되었는데, 던지고 죽이는 호흡이 척척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벌써 십여 명의 사신방도들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정호기는 다른 이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대형! 좌측 처마 밑입니다.

드디어 원하던 전음이 들렸다.

-초린아, 이 길로 개방으로 달려가 장에 전서를 날려라! 은밀히 피하라고!

-예?

영초린은 정호기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도우려는 것이었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란 뜻에서 전음을 보낸 것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흑룡문 놈들이다! 놈들이 장을 노릴지도 모른다! 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흑룡문이란 말에 영초린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형은…….

-내 걱정은 말고 서둘러!

-알겠습니다.

전음을 마친 정호기가 땅을 박차더니 막 건물을 빠져나오는 중년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네, 이놈!”

정호기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중년인의 덩치는 일반인에 비해 컸고, 그가 들고 있는 언월도도 거의 정호기의 호아와 크기가 비슷했다.

중년인이 정호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언월도를 뒤로 젖혔다가 호선을 그리며 베어왔다.

중도인 언월도에 어울리지 않게 다섯 개의 환영을 만들며 빠르게 공격하는 중년인은 백호였는데, 그의 첫 번째 실수는 정호기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휭!

정호기의 신형을 환도가 가르며 지나갔지만, 선혈도 비명도 없었다.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바닥에 납작 엎드린 정호기가 마치 뱀처럼 바닥을 기어 백호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여기서 백호의 두 번째 실수가 이어졌는데, 정호기의 뒤를 따르는 복면인들의 앞길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정호기를 쫓거나 길을 터 주었다면 죽지는 않을 수 있었으리라.

“감히!”

처음 앞에서 쏘아져 오는 단검을 언월도로 막은 백호가 뒤이어 날아오는 단검을 막으려 할 때, 그의 옆구리에 또 다른 복면인이 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컥…….”

두 번째 복면인의 검이 백호의 가슴을 찔렀고, 마지막 복면인이 백호의 목을 날렸다.

복주현에서 가장 큰 사파라 일컬어지는 사신방의 한 축이었던 백호가 너무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장면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양철중이 건물의 문으로 사라지는 정호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흩어져!”

양철중의 말에 복면인 십여 명이 건물을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이내 양철중 자신도 그곳에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