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정파 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놈들은 인간의 탈을 쓴 간악한 모리배요, 짐승이다!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만 뒤로 온갖 술수를 쓰는 놈들이지. 우리처럼 당당하게 드러내지도 못하는 쓰레기들이야.]
처음 흑룡문에 들어갔을 때는, 어린 나이였지만 선악의 개념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악으로 차있고, 선은 악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란 세뇌를 이십여 년 동안 받다보니 그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복수심이 그것을 감싸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려 버렸다.
정호기에게 있어 정파와 자신의 복수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이었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흑심을 숨긴 위선이었다.
물론 지금은 의식의 변화가 찾아왔지만, 그렇다고 그 기저에 깔린 불신의 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발악을 하지 않으니 만만히 여기고 오세지 같은 놈들이 고혈을 짜내는 거지. 힘이 안 되면 독이라도 써서 죽여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현 상황을 유지하려고만 하다니…….’
가족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은 흑도의 오랜 습관과도 같은 것이니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저 지금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감여월과 그녀의 가족들이 정호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탐스러운데?’
여자를 취하고자 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다시 살게 된 이후로는 어쩐지 여인을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누워 있자니 계속 그의 시선이 감여월의 가슴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다른 생각을 한 것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자 한 것인데, 결국 가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딱 내 취향이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니 어떻게 보면 조금 작은 가슴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정호기는 그런 가슴이 좋았다.
‘탄력도 좋고.’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봤는데,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이놈의 심장이 왜 이리 미친 듯이 뛰는지 모르겠군.’
그 옛날 첫 번째 부인과 처음 잠자리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수줍은 듯 부끄러워하던 것도 잠시, 어느새 정호기는 그녀의 밑에 깔려있었다.
[문주님이 제 첫 남자예요.]
세 명의 부인들이 모두 그렇게 말을 했고, 그를 깔고 앉은 것은 시기의 차이일 뿐 똑같았다.
‘근데 왜 혼인식 날이 달거리랑 겹쳤는지 모르겠어. 보통은 피한다고 하던데…….’
부인들 모두가 혼인식 날부터 달거리를 시작했었다.
‘달거리하기 전이 임신하기 가장 좋다고 하지만…….’
여인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똑같이 말했고, 정호기는 아직까지도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려 한 그 말을 믿고 있었다.
“쩝…….”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 혈신으로 분하고 있다 하여도 실체는 정파인 열호아 정호기였으니까.
‘운기라도 할까?’
단전 근처에 손을 모으고 운기를 하기 위해 기를 움직이려는 찰나, 그의 예민해진 감각에 혈향이 감지되었다.
‘이년도 달거리를 하나?’
억눌렀던 음심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운기하려던 것을 포기했다.
이렇게 마음이 뒤숭숭한 상태로 운기를 한다는 것은 일부러 독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같이 누워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 정호기가 침상을 내려와 탁자로 갔다.
“으음, 좋은데?”
탁자 위에 놓인 술병에는 탁주가 들어 있었는데, 그 맛이 탁주답지 않게 텁텁하지 않고 깔끔했다.
‘내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적들을 주살하고 나면 여자를 탐했던 기억은 있었다.
‘아마도 피 때문인가 보군.’
첫 경험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피와 함께 한 세월이 길어서인지는 몰라도 정호기에게 있어 최고의 최음제는 바로 피였다.
-대형, 접니다.
-놈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보니 나상진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영초린, 그놈의 기척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군.’
지금도 누가 다가온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것이 나상진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까 영초린이 왔을 때는 분명 그라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당시 영초린의 기습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오세지는 복주현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폐사당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오세지를 따르는 이들은 세 명이었는데, 그를 그곳에 버려두고는 각자 제 살길을 찾아 떠났고, 현재는 오세지 혼자 그곳에서 끙끙 앓고 있습니다.
어지간히도 수하들에게 인심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곳에서 놈을 주시하도록 해라.
-예.
나상진이 떠나고 일각 정도가 흐른 후, 미약한 살기에 정호기가 숨을 죽였다.
‘응? 뭐지?’
천장에서 느껴지는 살기들 때문에 정호기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는데, 이미 천장은 일단의 인물들이 장악을 한 것 같았다.
‘사신방에서 보냈을까?’
영초린이 사신방의 모든 인물들을 감시할 수 없으니 그쪽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시기가 너무 빨랐다.
‘거기다 영초린보다는 못하지만, 일개 작은 흑도 방파의 움직임이 아니야. 사신방이 살수문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움직임에 비해 이렇듯 살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어쩐지 맞지 않는데?’
황실의 학사가 천자문을 외우지 못하는 그러한 것이라고나 할까?
정호기의 눈이 침상에 누워 있는 감여월에게로 향했다.
‘제 팔자인 거지.’
지금 감여월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취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어디 보자, 어떻게 이놈들을 맞아 준다?’
생각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적이 먼저 공격을 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적을 흩어 놓은 뒤에 자신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드러나게 해야겠지?’
그가 그런 마음을 먹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미세한 파공음이 들림과 동시에 엉덩이 쪽에서 검이 솟구쳤다.
“흡!”
급히 기를 항문으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발로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굴렀다.
쿠당탕! 콰직!
의자가 산산조각이 날 때 천장이 부서지며 일단의 복면인들이 시퍼런 빛을 뿌리는 검을 앞세워 정호기를 찔러 들어갔다.
***
‘이럴 수가. 그걸 피하다니!’
무영은 자신의 검을 피한 정호기에 대해서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도 아니었고, 바닥에 힘이 실린다고 느끼는 순간 검의 방향을 바꿔 찔러 갔는데, 세 번의 공격을 모두 허공에서 몸을 틀며 피했던 것이다.
귀영단이 살기로 정호기의 주의를 끌 때 자신이 마무리를 짓기로 했었는데, 그 계획이 틀어졌다.
천장에서 귀영단이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독침을 뿌렸지만, 그것도 정호기를 상하게 하지 못했다.
챙! 챙!
귀영단원의 검을 빼앗아 오히려 역공을 하는 정호기를 암습하려고 기회를 엿봤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면 그의 눈길이 자신을 향했기에 섣불리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이놈은 절대 애송이가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로는 정호기의 실력을 설명할 수 없었다.
‘최소한 생사결을 수십 번 거쳐야만 가질 수 있는 노련함이야.’
무영은 이번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무영이 결심을 굳히고 귀영단주인 양철중을 바라볼 때 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부탁하오.
양철중이 전음을 날리고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는데, 그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적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정호기를 죽이기 힘들다면 그의 정확한 실력을 알아야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흑룡문에 알려야 했다.
그래야 다음 계획을 세울 때 참고할 테니까.
손짓과 함께 공격의 방법이 달라졌다.
검을 앞세우고 정호기를 향해 몸을 날린 복면인의 뒤로 다른 복면인들이 마치 한 몸인 양 따라붙었다.
처음 공격하는 복면인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때 생길 수 있는 찰나의 틈을 이용해 정호기를 죽이겠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양철중이 침상에 누워 있는 감여월을 집어 들더니 정호기를 향해 던졌는데, 정파인을 상대할 때 흑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타인을 이용해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정호기가 감여월에게 어떤 식으로라도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날아오던 감여월을 발로 걷어차 귀영단원들에게로 날려 보냈던 것이다.
‘저게…….’
분명 정호기는 정파인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런 행동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무영은 지금까지 봐 온 어떤 정파인도 보이지 않았던 행동을 하는 정호기를 싸늘한 눈으로 주시했다.
꽃송이가 만개하듯 감여월의 뒤에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정호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작 그녀를 피한 것은 그들이지만, 어떤 정의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로 인해 시선이 가려지고 또한 그녀를 죽이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동안 정호기가 공격해 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채채채채챙!
검과 검이 만나 불꽃이 튈 때 무영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그사이 양철중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정호기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는데, 그것은 독과 함께 미혼약을 섞은 것으로 적을 죽이는 것보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데 중점을 둔 약이었다.
극악한 독을 썼다가는 이쪽이 오히려 피해를 당할 수 있기에 그런 약을 썼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의 품속에 있는 극독을 사용하리라.
‘검풍!’
정호기의 움직임 한 번에 연기가 귀영단원들을 향해 날아갔는데, 그것이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기에 귀영단원들의 옷이 마치 잘 갈린 검에 베인 듯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신음 소리.
“으음…….”
귀영단원들답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생명이 빠져나가는 그 허무함에 신음이 새어 나온 것이리라.
잘려지고 뚫린 몸뚱이들 사이로 선혈이 비산했고, 양철중의 검에 공력이 실리며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쾅!
양철중의 검과 정호기의 검이 만나고 힘이 충돌하며 굉음이 터졌다.
그 여파에 시신들과 물건들이 날아갔는데, 충격을 받은 감여월의 혈도가 풀렸는지 그녀가 눈을 떴다.
“무… 꺄악!”
기적에 가깝게 무사한 감여월의 비명 소리에 한번쯤 시선이 돌아갈 만도 하련만, 정호기를 비롯한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남은 귀영단원은 십이 명이었고,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몸을 날리는 중이었다.
펑! 펑! 펑!
다시 폭음이 들리며 안개가 주변을 감쌌는데, 아까의 희뿌연 것과는 달리 이번 것은 검은색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