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분도는 초식과 초식이 끊어지는 약점이 있지. 하나의 실체를 만드는 그 짧은 순간의 틈. 얼마나 그 틈을 줄이느냐로 상승무공이냐 아니냐가 결정이 되는데, 이놈의 무공은 어중간 하구나. 쓰레기는 아니더라도 상승무공이라 부르기엔 부족해.’
휭!
코앞을 도가 지나갔지만, 이미 알고 피한 것이기에 위기라는 의식도 없었다.
이미 지나간 궤적을 열십(十)자로 교차하며 갈라 오는 도는 미리 허리를 숙인 후라 머리카락도 자르지 못했다.
옷은 너덜너덜해졌지만, 그것은 정호기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지 마음만 먹었다면, 흑호의 도는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아니, 이 싸움은 진즉에 끝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길게 끌어서 좋을 것도 없지.’
생각을 굳힌 정호기가 뒤로 공중제비를 넘을 때, 흑호의 도가 그의 허리를 베어 오고 있었다.
“헉!”
공중에 뜬 상태에서 자신의 도를 밟고 그 탄력으로 턱을 노리며 발차기를 날리는 정호기의 행동에 흑호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진짜는 그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엉덩이가 흑호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크윽!”
엉덩이에 얻어맞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깔린 흑호의 목 언저리에서 우직 소리가 들리는 것이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랬지?”
팔꿈치로 흑호의 명치를 찍은 정호기가 일어나며 그의 턱을 걷어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망갔군.’
수하들이 데리고 도망쳤는지 적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정호기가 의도한 대로였다.
이미 병신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상태를 알게 된다면 청룡의 분노는 더욱 커지리라.
‘무적문처럼 쓰레기만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구나.’
도망갈 기회를 만들어 줬어도 용호방도들 전부가 바로 두목을 배신하는 무적문도들 같았으면 아직도 땅바닥에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적룡에게 충성심을 가진 놈들이 몇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 덤빌 놈, 있냐?”
정호기가 주위를 둘러보자 용호방도들이 눈을 깔았다.
“야, 구정물!”
“예? 예!”
“가서 그년 데리고 와라.”
“여월이 말씀입니까?”
“그래, 곱게 데리고 와라. 그리고 애들 시켜서 경계 좀 서고. 사신방 놈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뭐, 지금 사신방으로 가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하면 될 것 같구나.”
“아, 알겠습니다. 뭣들 하냐? 그거 안 치워?”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던 용호방도들을 오히려 위협하며 무기를 수거한 구정운이 무적문도들을 시켜 그들을 묶었다.
그 와중에 십여 명이 구정운과 말을 섞더니 같이 합류했고, 나머지 용호방도들을 묶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에 큰 소란은 없었는데, 어차피 그들도 내일이면 같은 동료가 될 것이기에 서로서로가 배려를 했기 때문이었다.
묶인 이들도 적룡이나 흑호에게 충성을 하기보다는 사신방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묶인 것뿐이었다.
그들이 만일 쳐들어온다면 배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다고 모든 용호방도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고, 세 명은 살기 어린 눈빛을 정호기의 등에 보내고 있었는데, 구정운도 그들은 특히나 꼼꼼하게 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
용호방도였다 변심한 이들에게 그들 세 명의 다리를 부러뜨리라 명한 구정운이 무적문도 두 명을 기루로 보내 여월이를 데리고 오게 했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 사신방도나 적룡을 데리고 도망친 용호방도에게 걸렸다간 횡액을 면치 못할 테니 직접 가지 않은 것이다.
***
“단주님, 놈들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귀영단의 단주인 양철중이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귀영단은 홍여립의 수하들로, 귀접의 신물을 이용해 사파들을 굴복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단체를 이끄는 양철중에게 이번에 홍여립의 특명이 내려왔다.
“이번엔 모두 간다.”
양철중의 말에 그 앞에 있던 차가운 인상의 청년이 되물었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삼 조와 사 조도 더 이상 정보를 모을 필요가 없으니 부르도록 하고.”
“쓸어버립니까?”
“아니. 목표는 정호기란 놈이고, 그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걸리는 놈들뿐이다.”
“그런데 어찌?”
“가정호는 몰라도 사준우는 만만히 볼 놈이 아니다. 특히 그의 조부인 사비연은 요주의 인물이지. 거기다 당혜미가 있다. 당가에서도 나와 있을지 모르니 해독단은 필히 챙기도록. 목표는 정호기다. 최대한 귀접의 소행으로 보이도록 사망자를 최소화 하겠지만, 당가와 영웅회 놈들이 개입을 한다면 계획을 바꿔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없앤다. 그리고 만약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놈의 목만은 반드시 취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내가 죽어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죽어라!”
“예!”
“가자!”
어둠을 뚫고 야조가 무리를 이뤄 향한 곳은 복주현이었다.
그런 귀영단의 뒤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홍여립의 특명을 받고 온 무영(無影)이었다. 홍여립의 그림자들 중의 하나이며 그 이름답게 암살이 특기인 사람이었다.
[실패할 가능성은 오 할이다. 이것도 당혜미 혼자 나섰을 때를 계산한 것이지. 만일 당가에서 사람이 나왔다면 이 할이 넘지 않는다. 그렇기에 너를 보내는 것이다.]
무영은 알고 있었다. 홍여립이 말한 이 할은 단순히 이 할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산한 최소한의 것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가 보낸 마지막 패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제 삼, 제 사의 패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만일 자신이 실패한다고 해도 정호기는 반드시 죽을 것이었다.
달빛 속에 녹아든 무영의 신형이 야조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흐흐흐, 이리 오너라.”
침상에 누운 정호기의 말을 들은 감여월은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허튼짓하거나 문주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집에 있는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구정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 하나만 희생하면…….’
흑도의 무리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가족이나 친인을 인질로 협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오세지는 직접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감여월의 아버지인 감소광의 친인을 통해 돈을 빌려 주고, 그 권리를 산 것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그 돈의 주인이 오세지였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리로 와서 어깨 좀 주물러라.”
정호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깬 감여월이 입술을 깨물고는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하기 달렸어.’
[이년아, 네가 새로운 문주님의 마음을 휘어잡기만 하면 네년은 팔자 피는 거야. 어떻게 보면 문주님이 오세지를 밟아 놨으니 네 대신 앙갚음을 해 줬다고 볼 수도 있지 않느냐?]
빚 대신 자신을 끌고 간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막으려던 감소광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던 구정운이었고, 그런 그의 뒤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던 오세지였기에 어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고대랑의 말이 맞아. 이자만 꼬실 수 있다면…….’
감여월이 복수하고 싶은 이는 오세지 말고도 더 있었다.
“저…….”
감여월이 정호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정호기의 손이 더 빨랐다.
그녀의 수혈을 찍어 버린 것이다.
목 뒤의 수혈이 찍혀 쓰러지는 그녀를 침상에 누이고 정호기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어디로 갔더냐?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영초린은 놀라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전음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음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야 가능한 것인데, 조금 전의 전음으로 볼 때 정호기는 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대형의 능력은 그 끝을 모르겠구나.’
새삼 정호기의 진(眞)사부인 양사부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정호기가 영초린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영초린의 실력이 미진한 것도 있었지만, 궁가촌에서 하나의 벽을 넘으려던 순간을 겪은 정호기의 기감이 놀랍도록 향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호기 자신도 사실 영초린을 감지한 것에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결과인데? 절영도를 익혀서인가? 하긴 절영도가 광랑십삼검보다는 기의 조절이나 운용에 대해서 세심하긴 하지. 그렇다고 해도 영초린이 아직 미숙한 부분도 있겠지. 그때의 놈은 정말 놀랍도록 기척도 없었으니까.’
영초린에게 당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몸이 움찔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적룡을 데리고 도망친 놈들이 사신방으로 향했습니다.
-들어갈 수 있겠더냐?
-물론입니다.
-오세지는?
-그쪽은 나제가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직 놈이 자리를 잡지 못해 늦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예. 그리고 대형, 혹시 모르니 땅속도 염두에 두십시오.
영초린이 땅속을 경계하라 한 것은 사부의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변화가 없었지만, 무덤을 파 보니 땅속을 통해 관에 있던 물건을 훔쳐 갔더군요. 다행히 편지는 뜯어 본 흔적이 없었습니다.]
땅을 판 흔적이 너무도 뛰어나 지둔공을 익힌 이들의 소행이라 여겼기에 땅으로의 침투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네가 있는데, 설마 여기까지 오겠느냐?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건대 귀접을 사칭하는 이는 이곳보다는 의뢰할 의향이 있는 사신방에 나타날 확률이 높았고, 사부의 유물이자 귀접의 신물인 철접을 회수하고자 하는 영초린을 그곳으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만일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놈들의 소문이 좋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시나 다른 곳에서 이미 의뢰를 받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알았으니 어서 가 보거라.
-예.
영초린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호기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감여월을 바라보았다.
‘역시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리고 세뇌의 힘은 놀랍도록 강하지.’
법에 길들여지고 세뇌당한 좋은 본보기가 바로 감여월이라고 생각했다.
‘그 꼴을 당하고도 저항할 생각을 못하다니, 얼마나 잘 길들여진 개란 말인가?’
서당이나 무관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나중에 괴로움을 못 이겨 자살까지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정호기는 법이 주는 세뇌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때리면 안 된다, 사람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이 미래의 흑도나 가진 자들을 이롭게 만들지. 가끔 살인자라고 하여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선전하며 대대적으로 알리고 공개 처형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힘없는 이들이나 그렇게 죽는 거지. 권력과 돈, 힘을 가진 자들은 살인이나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잘만 살고 있는데……. 쯧쯧, 혼자 죽긴 왜 혼자 죽어. 죽을 거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었어야지.’
법이 없다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이 먼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롭히는 이들이 행동을 조심할 것이니, 오히려 괴롭힘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