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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57화 (58/137)
  • 57화

    “다음엔 어떤 방식을 사용할 것인가?”

    “원래는 미약을 암거래하는 조직을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져 포섭해 놓은 이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인물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그래, 누구였지?”

    “천예성이라고 일월문 소속이었는데, 계집에 눈이 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쓸 만한 놈이 있다고?”

    “갈천하라고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중마 연성 계획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이가 자신의 문하라는 것에 홍여립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 한번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 그 천예성이란 놈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오도록.”

    “여기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말할 것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홍여립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더 꺼냈다.

    “내가 궁금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뭔지 아는가?”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벗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려는 듯 홍여립의 손이 옷고름으로 향하자 조당이 손을 저었다.

    “아무리 자네 품속이 궁금해도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홍여립은 조당의 물음에 막힌 적이 없었고, 뱃속의 회충이라도 된 듯이 언제나 품속에서 필요한 대답을 내놓았다.

    “흠, 역시…….”

    홍여립이 내민 두루마리에는 조당의 짐작대로 정호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일까요?”

    “냉 당주에게 시키려고 했는데, 자네가 하겠나?”

    “마침 놈이 귀접에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예.”

    대답을 마치고 나가는 홍여립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조당이 두루마리에 적힌 정호기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네놈의 이름을 다시 듣는 일은 없겠구나.”

    홍여립과 냉백에 대한 조당의 신임은 두터웠고, 특히나 홍여립의 일처리는 철저했기에 그는 정호기의 죽음을 확신했다.

    ***

    [정 소협께서 과연 잘하실 수 있으실지 걱정입니다. 사파처럼 행동하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사파의 우두머리였던 정호기에게 사파처럼 행동할 수 있겠냐며 걱정하던 가정호였는데, 이런 걸 두고 걱정도 팔자라고 하는 것일 게다.

    정호기의 주위엔 열댓 명의 사람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는 한 사람과 대치하고 있었다.

    “퉤! 해보겠다 이거지?”

    침을 뱉은 장한이 도를 힘껏 쥐며 전방을 노려보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육 척이 넘는 덩치에 산발한 머리카락, 동물의 가죽을 얼기설기 기워 입은 사내, 정호기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곱게 내 밑에 들어오면 한자리 주마.”

    정호기의 말에 장한, 광견 오세지가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지마!”

    밤거리에서 닳고 닳은 광견 오세지는 저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랬고, 전대 무적문주였던 방각이 그랬던 것처럼 뒤가 찜찜한 자를 절대 살려 둘 리가 없었다.

    세력을 빼앗긴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말이었고 그것이 이 바닥의 생리였다.

    “죽어!”

    휭!

    나름 한 수를 섞어 환도를 시전했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 틈을 노리고 정호기가 접근을 시도하려고 할 때, 오세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손을 빠져나간 비수가 정호기의 가슴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그 역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느새 정호기의 신형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기 때문이다.

    “컥!”

    정호기의 주먹이 거의 파묻힐 정도로 오세지의 배에 틀어 박혔고, 그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면 어디 덧난 다더냐? 꼭 힘쓰게 만들어요.”

    정호기가 쓰러진 오세지의 등을 발로 내리찍었다.

    “켁!”

    “또 불만 있는 놈?”

    여름날 대로에 팽개쳐진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채 기절한 오세지를 밟은 정호기가 주변을 훑자,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던 이들이 일제히 흠칫 했다.

    “헤헤헤, 새 문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후다닥 달려와 정호기의 앞에 엎드린 울상의 중년인은 무적문의 부문주인 구정운이었다.

    “이 녀석들아,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엎드리지 않고!”

    수하들에게 호통을 지른 구정운이 흘깃 오세지를 바라보았는데, 침을 질질 흘리며 꿈틀꿈틀하는 것이 잘해야 병신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다.

    “좋아, 이제부터 무적문은 나 혈신이 다스린다. 알았나!”

    “예!”

    일제히 대답하는 이들을 보면서 ‘혈신’ 정호기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너, 이름이 뭐냐?”

    “예? 아, 구정운입니다.”

    “구정물, 새로운 문주가 된 나를 축하할 준비는 됐겠지?”

    “저, 구정물이 아니라 구정우… 컥!”

    “내가 구정물이라면 구정물인 거야. 더 맞고 싶냐?”

    “아,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정호기를 안내하는 구정운의 뇌리로 오세지를 처음 만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구정운? 네놈 낯짝에 그런 이름이 가당키나 하냐? 이제부터 넌 구정물이다. 알았지?]

    벌써 세 번에 걸쳐 새로운 문주를 모시지만, 하나같이 그들은 구정운을 구정물로 불렀다.

    ‘개 같은 새끼들! 남의 이름을 뭐로 아는 거야! 염병을 앓다가 똥구멍이 찢어질 잡놈의 새끼들!’

    염병에 걸리면 아이들은 설사를 하는 반면 어른들은 변비에 걸리는데, 그것을 두고 하는 욕이었다.

    “너 속으로 내 욕했지?”

    “예? 아, 아닙니다. 무슨 그런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혈신 님처럼 듬직한 문주님을 모시게 되어 그저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얼굴이 왜 똥 씹은 표정이야?”

    “제가 원래 표정이 그렇습니다. 하하하! 보십시오. 웃고 있어도 똑같지 않습니까?”

    “지저분한 면상 저리 치우고. 본 좌가 오랜만에 하산을 했더니 속세의 향기가 그립구나. 어서 앞장이나 서라.”

    “예, 알겠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정호기의 얼굴은 부친이 와서 본다고 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엉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커다란 덩치와 함께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저놈은 어떻게 할까요?”

    구정운이 푸들푸들 떨고 있는 오세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갔다 버려라. 오늘 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

    ***

    “크으, 좋구나. 야, 구정물.”

    커다란 사발에 술을 가득 부어 들이켠 정호기가 구정운을 불렀다.

    “예.”

    “우리가 모두 몇 개나 관리하고 있지?”

    “기루 두 개와 도방 하나, 그리고 주점과 객점 각 두 개씩입니다.”

    “뭐? 정말이냐? 그것밖에 안 돼?”

    “예. 사실 우리 무적문을 비롯해 이곳 복주현에는 세 개의 문파가 있는데, 그중 우리가 제일 세가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 찍었군.”

    “문주님, 문주님이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이제 문주님이 나머지 용호방과 사신방을 제압하시면 이곳 복주현은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손?”

    “아, 문주님의 손아귀입지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많이 시달린 탓인지 구정운은 눈치가 빨랐다.

    ‘이놈은 힘만 센 멍청한 놈이야. 잘만 구슬리면…….’

    오세지가 너무 쉽게 뻗어 버려서 그렇지, 사실 그의 무공이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라면 섬서에서 그런대로 노른자로 소문이 난 복주현의 밤을 일부분이나마 지배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오세지를 가볍게 제압한 정호기의 무위를 봤으니 구정운이 어찌 꿈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런 실력으로 겨우 무적문을 골랐다는 것은 세상사에 어둡다 할 수 있지. 흐흐흐, 내가 네놈을 잘 요리해 주마. 어쨌거나 이놈의 실력이 못해도 사신방의 청룡만큼은 되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용호방과는 한번 해 볼 만하겠지?’

    사신방은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별호로 쓰는 네 명이 만든 집단이었고, 용호방은 적룡과 흑호를 별호로 쓰는 두 사람이 만든 곳이었다.

    “원래는 육웅방이라고 해서 여섯 놈이 작당을 하여 복주현을 주물렀었는데, 적룡과 흑호가 따로 독립을 하여 용호방을 세웠습지요. 그 혼란을 틈타 한 귀퉁이 떼어 먹은 것이 우리 무적문입니다.”

    흑도의 인물들 중에서 무적문과 같은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곳일수록 이름과 별호를 거창하게 짓는 법이었고, 그 때문에 한 지역에서 같은 별호를 주장하는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니까 여섯 놈만 날려 버리면 복주현이 모두 우리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중에 일단 용호방을 먼저 정리한 연후에 그 힘을 흡수한다면 사신방과도 일전을 벌일 수 있을 겁니다.”

    “하려면 제일 센 놈을 부수는 게 낫지. 그럼 나머지 놈이야 알아서 기어 들어오지 않겠느냐?”

    “예? 아, 물론 그렇지만 사신방은 만만한 놈들이 아닙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현청의 포두와도 안면을 트고 있는 만큼, 놈들을 잡으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적룡이 청룡의 동생이라 봐준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즉에 용호방도 쓸어버렸을 테니까요.”

    “그런데 무적문은 봐줬다?”

    “헤헤헤, 저희가 알아서 두 방파에 상납을 하고 있지요. 이년아, 뭐 하는 거야? 문주님 잔이 빈 것 안 보이냐?”

    구정운의 호통에 화장기 진한 여인이 콧소리와 함께 정호기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아잉, 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시니 심통이 나서 그런 거지요. 자, 문주님 한 잔 받으시어요.”

    “치워! 지분 냄새 안 나는 년은 없는 거냐? 이거야 원, 코가 막혀 술맛도 모르겠구나.”

    “가서 여월이를 불러 오너라. 어서!”

    정호기의 타박에 구정운이 여인을 쫓아내고 비워진 잔에 술을 따랐다.

    “일단 용호방을 쓸어버리고 적룡, 흑호, 두 명을 인질로 잡으면 사신방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용호방이 어디냐?”

    “저잣거리에서 좌측으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만, 항시 삼십여 명은 상주를 하기 때문에 때를 잘 노려야 합니다. 이미 문주님에 대한 소식도 들어갔을 것이니, 내일쯤 찾아가서 인사를 한다면 우리를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흘쯤 있다가 기습을 하는 거지요.”

    말을 하는 구정운을 빤히 바라보던 정호기가 혀를 찼다.

    “아주 술술 나오는구나.”

    “하하하하. 제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해 두었습죠. 기습할 때 이용할 장소도 미리 봐 두었으니 그곳으로 가면 틀림없을 겁니다. 아마도 문주님을 만나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반골인데,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지금까지 부문주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만큼 구정운의 처세가 뛰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내가 좀 성질이 더러워서 맨 정신에 그놈들에게 고개를 숙일지 모르겠구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가서 용호방과 사신방에 인사를 하도록 하자.”

    “예? 지금 말입니까?”

    벌써 시간이 술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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