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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56화 (57/137)

56화

[웃으며 다가오는 이를 경계하고, 너에게 불편한 소리를 하는 이를 친우로 삼으라고 했다. 대가 없는 친절은 없는 법이야.]

가정호는 그의 부친인 가분심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정호기에게 이러한 친절을 받을 정도로 좋은 놈이 아니란 것과,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놈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 소협이 나를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건 내게 기회나 같아.’

정호기를 경계하라는 부친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 기회를 봐서 얘기를 해야겠어. 이래서야 회주라는 실감이 나지 않으니. 분명 정 소협은 내 말을 따라 줄 거야. 나를 회주라 부르지 않는 것도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가정호의 정호기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정호기가 회주라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당 소저의 이름을 언급 했으니, 그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실수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속내를 그렇게 내비치면서 정호기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유옥접은 이미 정호기와 연분이 난 것으로 보였고, 당가라는 배경은 지금 찾아온 기회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라 여겼다.

‘더 이상 철부지로 남지 않아도 돼!’

가정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

-얘기해 봐.

정호기와 마주 앉은 영초린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치고 행낭을 옆에 둔 상태였다.

-아마도 사부님의 무덤이 도굴된 것 같습니다. 신물을 사부님의 시신과 함께 넣었으니까요.

-사부님의 것은 확실한 거냐?

-예. 내공을 주입하면 붉은 귀화가 피어오르게 하는 것은, 특별한 재료를 필요로 하기에 사천당가에서도 만들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부님을 모방하려고 해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는데?

-문파에 대대로 내려오는 거라 사부님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사천당가에서 그것에 흥미를 느껴 사부님을 추적하신 적이 있다 하시더군요. 그 이후로 활동을 그만두셨다고 했습니다.

-당가가? 그렇다면 이번 일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군.

-예.

영초린의 전음을 들은 정호기는 당혜미가 단순히 박구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녀를 보좌하기 위한 당가의 무사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쯤 그놈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

가정호가 귀접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아무런 반응이 없던 당혜미가 떠올랐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인가?’

어차피 당혜미의 관심은 박구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호기였기에 급작스레 귀접을 죽이자는 가정호의 말에, 그녀가 어떤 일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것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의 묘를 확인할 셈이냐?

-일단 확인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신물 말고 다른 것을 넣어 둔 것은 없느냐?

그 말에 영초린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은 아니고, 사부님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에 영초린이 이름을 썼다면, 묘지의 위치가 밝혀질 경우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알았다. 그럼 너는 내가 심부름을 보낸 것으로 할 터이니 다녀 오거라.

-예.

영초린이 나간 후 정호기는 다른 것을 생각했다.

‘신물에 관심을 나타냈다면, 당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그것을 빼돌리려 할 것이다. 하지만 영초린이 그것을 좌시할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 시기에 그따위 짓을…….’

절대로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놈들을 고문이라도 해서 어디의 누구에게 뭘 지껄였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단숨에 죽여야 했다.

‘당가에 끌려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

영초린이 하남으로 떠난 지 사흘 후, 사준우가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놈이 어떻게 의뢰를 받아 내는지 그 성향을 파악했습니다.”

“오, 수고하셨습니다.”

가정호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사준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에 슬쩍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아랫사람이 수고한 것을 치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전음을 보낸 정호기도 사준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개방을 통해 섬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흉수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여기, 여기, 그리고 이곳을 거쳐 위로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준우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더니 한 곳, 한 곳 짚으면서 설명을 했다.

“올라가고 있군요.”

“예. 이것으로 보아 하남에서도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준우가 가리킨 곳들의 시작은 하남과 붙어 있는 상남현이었는데, 그것들이 성도인 서안을 향해 나아가는 형국이었다.

“이것들이 전부입니까?”

정호기의 물음에 사준우가 품에서 또 하나의 지도를 꺼냈다.

“사실은 이것이 처음 파악한 것인데, 다시 분류를 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붉은 점과 검은 점이 뒤섞여 있었다.

“지난 두 달 사이에 총 사십팔 건의 살인이 있었고, 그것들을 추리고 추려 나온 결과입니다.”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겠군요.”

“그럴 것입니다. 실종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과연 이것이 정말 귀접의 소행인지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의문을 가지시는 겁니까?”

“지난날 귀접은 부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특히 한 지역의 유지나 세가 있는 무가들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이 붉은 점들은 전부 사파입니다. 이들이 죽은 후에 그와 대립하고 있던 사파들이 그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군요. 그러나 처음 얘기했던 것처럼 그가 아니라 그의 제자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배후가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귀접을 이용해 은밀히 사파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들로 바꾸려는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사준우의 대답을 들으며 정호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럼 지금 놈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다음 목적지는 복주현이 아니면 위남현이겠군요?”

“위남현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패도문은 정파의 성향이 짙은데, 흑도의 무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곳, 복주현이 놈이 다음으로 노리는 장소이지 싶습니다.”

“복주현에는 노릴 만한 사파가 있습니까?”

“세 개나 됩니다. 여기 조사한 것이 있는데, 그 상관관계가 좀 복잡해서 놈이 어디로 올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사준우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고 읽던 정호기가 미소를 지었다.

“복잡하면 간단하게 만들면 되겠지요.”

어쩐지 그의 웃음이 사악하게 보였다.

***

“개방 놈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단 말이지?”

흑룡문주인 마검 조당의 말에 통통한 몸에 염소수염을 기른 홍여립이 설명을 덧붙였다.

“네. 은밀히 귀접의 향방을 쫓고 있습니다.”

흑룡문이 귀접의 행세를 하여 각 현의 작은 사파들을 정리하는 것은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도굴꾼이 그것을 팔고자 흑룡문이 관리하고 있는 암거래점을 찾은 것이 시발이었으니까.

물론 그 도굴꾼은 그가 평소에 그토록 자주 이용하던 땅속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우리와 연관시키지는 못하겠지?”

“철저히 숨겼기에 알지는 못하겠지만,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키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서안까지 가는 것은 무리겠군.”

“예. 그렇다고 해도 한두 곳만 더 작업을 하면 여산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다른 문제는?”

“순조롭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서서히 그들 조직들을 장악해 우리가 날개를 펴기 전,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잘 됐군. 그것 말고는 없나?”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홍여립이 품에서 두루마리 두 개를 꺼내 조당에게 내밀었다.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께름칙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홍여립의 말마따나 두루마리에 적힌 것은 그다지 신경 쓸 것의 일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이름만 없었다면.

“정호기?”

“예? 아,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힌 것처럼 천수신의의 외손자로, 두 번째 두루마리에 있는 영웅회에 소속된 인물입니다. 두 개 모두에 적힌 것은 그가 유일합니다.”

“개방에 의뢰를 했다?”

“천수신의가 지인을 통해 은밀히 알아보는 것 같지만, 딱히 건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외부에서 전혀 흠을 잡을 것이 없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준우가 귀접에 대해서 개방에 의뢰를 했는데, 그가 소속된 곳이 바로 영웅회입니다. 영웅회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사준우와 당혜미가 있고, 과거 당가에서 귀접을 쫓았던 전력으로 비추어 볼 때, 당혜미 혼자 섬서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판단됩니다.”

홍여립은 사준우와 당혜미, 그중에서도 당혜미의 존재를 중히 여겨 말을 하고 있었지만, 조당의 눈은 두루마리에 적힌 정호기의 이름을 향해 있었다.

“우연일까?”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가에서 귀접의 소식을 듣자마자 당혜미를 파견한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묻는 것은 이 정호기란 놈에 대한 것이다.”

“정호기 말씀입니까? 천수신의의 외손자이자 사가장 무림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높게 쳐줄 만하지만, 그 이외의 특이점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의도(意刀)를 펼친 것은 물론 대단합니다. 그러나 초반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천수신의가 무언가 수를 썼을 것으로 판단하면 앞으로가 기대되는 정도입니다.”

“이놈의 무위가 얼마나 될까?”

“의도를 비무 중에 펼쳤다는 것은 무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니 적어도 대주급은 될 것 같습니다.”

정호기가 펼친 무위가 대단하긴 하였지만, 절세고수라던가 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 나이에 비해 대단할 뿐이지 나이를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흑룡문에도 많은 이들이 의도와 의검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의도는 눈속임의 일종이었기에 고수들은 잘 걸려들지도 않았다.

“더 크겠지?”

“물론입니다. 시간만 있다면 말입니다.”

정가장은 정호기가 아니라고 해도 천수신의로 인해 살명부에 이름을 올린 곳이었다.

흑룡문이 문을 박차고 나설 때 정호기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지 않는 한 멸문은 필연이었다.

그런 이유로 흑룡문이 현재 신경을 쓰는 정파의 고수들은 모두 사십 대 중후반의 인물들이었고, 거기에 정호기의 이름은 없었다.

“악가장은?”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홍여립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조당의 버릇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현재 혼란을 수습하고 악무정에게 뒤를 맡겼습니다.”

“잘됐군. 파천궁은?”

“조용합니다.”

“계획은 순조롭겠지?”

“물론입니다.”

냉백이 정파 성향의 소문파를 담당했다면, 홍여립은 사파 계열의 작은 곳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들에 흑룡문의 간자를 집어넣어 점차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귀접을 활용하는 것은 그것의 한 방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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