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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55화 (56/137)

55화

“정 소협?”

“솔직히 다른 살수 단체에 비해 귀접은 그 수가 많아야 두 명이니 부담이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접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게 할 수 있으니, 이쪽에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지요.”

“그 말씀은 우리 중의 누군가를 의뢰하겠다는 것입니까?”

“예.”

“너무 위험합니다.”

“저를 의뢰하십시오.”

“안 돼요!”

정호기의 말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유옥접이 바락 외쳤는데, 말을 하고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 회원의 안전을 담보로 일을 수행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지금 그러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면 나중에는 자원이 아니라 요구하는 형태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유옥접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도 그렇군요. 그럼 이참에 회를 운영하는 회칙을 정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영웅회를 키울 생각이지, 이대로 현상 유지만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바로 찬성을 했는데, 전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회칙에 만장일치가 아니면 회주를 바꿀 수 없다는 조항을 넣겠다고? 흐흐흐, 그럼 그것부터 의논을 하는 것도 좋지.’

가정호는 정호기가 왜 이런 회칙을 만들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가정호와 화세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화세걸과 같은 모자란 놈들이 회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런 회칙이라도 있으면 좀 제대로 된 놈을 들일 것이라는 생각에.

한 시진에 걸쳐 토론을 벌이고 드디어 첫 회칙 이십 개를 만들었는데, 그렇게까지 무리한 것들은 없었다.

이번 일과 관계된, 회원의 희생을 강요하는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없다는 조항과 정호기가 말한 회원의 만장일치가 아니면 회주를 바꿀 수 없다는 조항이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유옥접의 얼굴이 조금 펴졌지만, 곧 일그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니 회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정호기가 지원을 했던 것이다.

-미쳤어요? 왜 자꾸 위험한 일에 나서려고 하지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그놈을 잡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에요.

-그래선 회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만만한 놈들만 잡고 있을 겁니까?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야 회원도 늘고 우리도 자신감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유옥접이 아무리 말려도 요지부동이었다.

“좋습니다, 정 소협이 자원을 하신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럼 가 소협, 정 소협을 표적으로 의뢰를 하십시오. 그동안 저는 정 소협이 머물 곳을 찾아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십니까?”

“아직 어떻게 사주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가정호의 그 말에 사준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가정호였다.

* * *

귀접을 잡자고 거창하게 말을 꺼내 놓고는 정작 살수를 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인 의뢰하는 방법을 모르다니?

듣는 사람들의 맥이 확 풀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살수의 경우, 의뢰 방법을 알아내 그를 유인하는 것이 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지금 가정호의 말은 과장해서 전설 속의 기린을 잡자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기린도 이름은 알지만 잡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 뿐이니까.

“귀접은 의뢰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가정호가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정보를 조달해 주는 조직이 있겠지만, 그곳을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넓게는 개방부터 좁게는 저잣거리에서 떠드는 소리까지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아예 모르는 것과 같았다.

“귀접인 것은 확실한 겁니까?”

솔직히 귀접을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을 해야 했었는데, 당시에는 간과하고 지나간 것이 가정호가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자 이제야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직접 의뢰를 받으러 찾아온 귀접을 만난 인물이 있습니다. 삼봉문이라고… 아, 삼봉문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곳입니다. 아무튼 그곳의 문주에게 귀접이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그가 신물을 보였습니까?”

“예. 처음엔 별다를 것 없는 철접이었는데, 잠시 후 마치 어둠을 유영하는 귀안처럼 붉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고 하더군요.”

귀접은 철로 만든 나비를 신물로 삼았는데,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을 뿌리는 날개로 인해 귀접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진짜 귀접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과거 귀접이 활동할 당시에도 신물을 모방하여 그를 사칭하는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사준우가 계속 진위에 대해서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가정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

말을 하던 사준우는 물론 발끈하려던 가정호를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영초린에게로 향했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와 방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초린아!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영초린이 흠칫하면서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꼈다.

“귀접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느냐?”

정호기의 말에 영초린이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동안 다른 이들 중에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은…….”

영초린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그자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부님을 만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요.”

“그런 일이… 그런데 그자가 귀접이란 것을 모르셨소이까?”

“사부님께서 임종하실 때 말씀하시더군요. 어둠 속에서 귀화가 피어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요. 사실 거의 산속에 틀어박혀 지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는데, 오늘 가 소협의 말씀을 들어 보니 그것이 바로 귀접의 신물이었던 모양입니다.”

무거운 분위기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저기, 가 소협.”

정호기의 부름에 가정호가 얼굴을 돌렸다.

“네.”

“개방이나 다른 곳은 모르고 있습니까?”

“아마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네?”

“귀접이 활동할 당시에도 그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정파였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워 할 리 없다는 것이죠.”

가정호의 말에 사준우가 살을 붙였다.

“중원에 살수 단체는 많습니다. 그중에는 마음만 먹으면 본거지를 알아낼 수 있는 곳도 상당수고요. 하지만 어느 곳이고 정파에서 손을 썼다는 얘기는 드뭅니다. 지인이나 가족이 변을 당한 후 복수를 한 것 외에는 말입니다.”

“예? 왜 그런 거지요?”

정호기의 반문에 사준우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정 소협이시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데, 진짜 모르시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무공이 높고 사리 판단이 빠르다고 하여도 역시나 아직은 애송이로군.’

정호기가 부족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사준우의 마음속에선 작은 우월감이 고개를 들었다.

인정하진 않았지만 그동안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이 사실이었던 만큼, 지금의 감정은 그에게서 정호기를 한 단계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였다.

“제가 아직 세상사에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정호기는 이렇듯 부족한 면을 보여야 불완전한 조직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중마 연성 계획 당시 수련동에서 깨달은 것이었는데, 무공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너무 자신만만하였고, 그러다 보니 적을 키우게 되었었다.

결국엔 힘으로 굴복시켜 대부분의 인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었다.

사준우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정호기의 궁금증을 채워 주기 위해 입을 놀렸다.

“첫 번째로 아까 얘기한 놈들의 복수에 있습니다. 만약 일제히 소탕하지 못하여 놓치게 된 후, 제 목숨을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요. 두 번째로는 살수 집단의 연합입니다. 정파가 그들의 목을 죄면 그들이 힘을 합칠 수 있는데, 지금처럼 서로가 경쟁하며 제 살을 깎아 먹는 경쟁 체제가 구축된 마당에 일부러 빌미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아무튼 귀접이 자신의 신물을 이용해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신물을 내세운다는 것은 다른 단체에 들어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말을 한 사준우가 영초린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가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 소협, 일단 가 소협께서 알려주신 것을 토대로 제가 한 번 정보를 모아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사준우가 정보를 모은다고 했는데, 그것이 가정호를 건드렸다.

마치 ‘네놈이 못한 일을 내가 해 주마’란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끈하려던 가정호가 정호기의 전음을 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준우가 정보를 모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론을 내리고 모두가 돌아갈 때, 가정호와 정호기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호기가 전음으로 그를 남게 했던 것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가정호가 발끈하려던 자신을 말리고 사준우에게 정보를 모으게 한 것을 따지듯 물었다.

“수장의 위치란, 나설 때와 나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나서지 않을 때이지요. 알아서 정보를 알아 온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아랫사람임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당 소저께서 오해를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능해서 사 소협이 나선 것이라고…….”

‘그거였군.’

가정호가 요즘 들어 그답지 않게 조금은 대범하고 여유로운 모습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이유가 당혜미 때문인 모양이었다.

“당 소저께서도 충분히 가소협의 넓은 뜻을 짐작하실 겁니다. 무능하다니요? 아무도 모르던 귀접의 소식을 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수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이들이 세세한 부분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하하하하.”

웃고 있는 가정호의 얼굴을 보면서 정호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찌 되었든 네놈이 회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나에게도 이로우니,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너를 도와주마.’

“저기, 근데 정 소협.”

“예?”

“그… 아, 아닙니다. 이거 영 소협께서 기다리실 텐데 그만 가 보시지요.”

영초린의 부모가 귀접에게 죽은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는데, 그의 아픈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개인적인 시간이 된 만큼 그의 대형인 정호기와 영초린은 더 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가정호가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떠나는 정호기의 등을 보며 가정호는 갈등했다.

가정호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을 회주라 부르지 않고 가 소협이라 칭하는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정호기만큼은 나서서 대우해 주는 데 앞장을 설 것이라 생각했건만 끝까지 자신을 향해 회주라 부르지 않아 초조함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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