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서걱!
가장 후미에서 움직이고 있던 이의 몸이 두 동강 나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고, 뒤이어 다른 세 명의 사람도 정호기가 휘두른 도의 궤적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크아악!”
허리 어름이 거의 잘린 인물이 지른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산울림이 되어 장막산을 휘돌았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인영들이 마적들을 향해 쏘아졌는데,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자리마다 비명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여덟 명이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열한 명이었고, 가정호가 중년인을 막고 있는 사이 정호기를 비롯한 다섯 명에게 둘씩 붙어 대치하고 있었다.
“우웨에엑!”
긴장감이 최고조로 이른 대치의 고요를 깬 것은 화세걸의 돼지 멱따는 듯한 구토하는 소리였다.
정호기의 도에 반으로 갈라진 시체를 보고는 같이 습격에 나서지 못하고 다리가 얼어붙었으며, 뒤이어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구토를 한 것이었다.
“쳐라! 빠져나가!”
중년인의 말에 복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중년인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정호를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챙! 챙! 챙!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전장을 지배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짤막한 비명 소리가 쇳소리를 몰아내며 주인을 자처했다.
‘이런,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일 나겠는데?’
중년인의 기세에 눌려 점점 일행과 멀어지고 있는 가정호는 어서 다른 이들이 자신을 구하러 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윽, 제길!”
옆구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며 시큰거리는 것이 제대로 당한 모양이었지만, 지혈할 틈도 없었다.
‘나 좀 살려라, 이것들아!’
소리 내 외치고 싶었으나 차마 마지막 자존심에 그러지 못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도와주겠지?’
그러나 그 조금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중년인의 솜씨였고, 팔과 가슴, 다리에서도 조금씩 피가 비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사…….”
가정호가 살려 달라고 외치려는 찰나 공격하던 중년인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그 틈에 가정호도 거리를 벌리며 입을 다물었다.
‘누가 도와준 거지?’
일행은 아직도 멀찍이서 싸우고 있었기에 그를 도와줄 만한 여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누가 되었든 도움을 주는 이 기회를 가정호가 놓칠 리 만무했다.
‘누구면 어떠냐? 이대로 꼴사납게 물러설 수는 없잖아?’
기세등등한 가정호의 검이 중년인을 향해 쏘아졌다.
“받아라!”
챙!
가정호의 검을 막아 낸 중년인의 얼굴이 복면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까 자신을 공격한 기운이 또다시 쏘아져 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뭐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조된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기운은 그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피할 수도 없었는데, 가정호의 검이 공격해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에서 퇴로를 점한 채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호의 검과 중년인의 도가 부딪치는 순간, 중년인의 허벅지에 뭔가가 와서 박혔다.
“큭!”
그것이 시작이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순식간에 세 개가 더 중년인의 팔과 다리를 찔렀고, 가정호의 검이 그런 중년인의 가슴을 찌르며 싸움이 끝나고 말았다.
때마침 정호기 등도 마적들을 처리한 후 가정호에게 다가왔는데, 그때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드러난 얼굴을 본 정호기는 그녀가 같은 객점에서 묵고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도 우리를 의식하고 있던 것 같았는데, 지금 등장한 것은 우연인가?’
“아닙니다. 솔직히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소저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정호가 어찌 된 일인지 순순히 자신이 위기였음을 인정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영웅회의 회주를 맡고 있는 영웅검 가정호라고 합니다.”
박구를 잡은 일로 인해 가정호에게 과분한 영웅검이란 별호가 생겼다.
영웅회의 회주란 직분이 많이 작용한 별호였다.
“아, 영웅검 가 소협이었군요. 당가의 당혜미입니다.”
[사천당문에 제 손길을 탄 계집이 있는데, 그 계집은 그것을 비밀로 하려 하기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당혜미가 이름을 밝힌 순간 정호기의 뇌리에 박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사천당가의 분이셨군요. 어쩐지 암기를 날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가 소협, 일단 이곳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준우의 말에 가정호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그럼 정리를 하도록 할까요?”
처참한 시체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부상을 입고 살아 있는 두 명의 마적을 화세걸이 밧줄로 묶어 옮기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땅을 파고 마적들의 시체를 묻었다.
***
비명 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에 긴장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정호기 등이 부상당한 마적을 앞세우며 촌락으로 돌아오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아직도 남아 있는 핏자국을 비롯해 시체들이 남기고 간 잔재들을 치우기 위해 싸움이 벌어졌던 곳으로 향했다.
객점의 주인은 일행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술을 내왔는데, 그 자리에 당혜미도 끼어 있었다.
“도움을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가정호가 술잔을 건네며 당혜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영웅회의 분들이라면 그 간악한 박구를 잡으신 분들이 아니신지요?”
“맞습니다.”
“역시! 사천에도 영웅회의 이름이 알려져 꼭 한번 여러분을 뵙고 싶었는데, 우연찮게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당혜미의 말을 들으며 정호기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우연? 그게 아니겠지.’
감옥에서 독으로 목숨을 끊었다 알려진 박구도 분명 당혜미의 솜씨라고 생각했다.
‘그놈이 섬서에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가 잡히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처리를 한 것이 틀림없어.’
혹시라도 박구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고,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으리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정호기가 그런 궁리를 하는 사이, 당혜미가 답을 내놓았다.
“영웅회의 행사가 이렇듯 정의로운 것이라니,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도 영웅회에 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가정호의 대답을 들은 정호기가 유옥접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를 홍일점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옥접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고,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는 듯 보였다.
***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가 소협께 유 소저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저도 당 소저가 합류하게 된 것에 대해 크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전음으로 자신을 불러내기에 그것에 관해 추궁을 하려나 보다 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 소협.
-예.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입니까?
-박구의 죽음과 당 소저의 등장이요. 전 아무래도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유옥접의 전음을 들으며 정호기는 역시나 그녀는 예리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당가의 여식이 박구 같은 놈에게 해를 입었겠습니까?
-모르는 일이지요. 당가의 여식들도 무인이기 이전에 여자이고, 여자들은 때때로 방심을 하기도 하니까요.
-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제가 너무 쓸데없는 상상을 했나 봐요.
“먼저 들어가세요. 전 조금 더 바람을 쐬다 들어갈 테니.”
“알겠습니다.”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는 정호기의 뒷모습을 보던 유옥접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짓까지 하다니… 내가 정말 그를 좋아하는 걸까?’
굳이 정호기에게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의문으로 묻어 둘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아니한 것은 정호기에게 당혜미가 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당혜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유옥접이 손으로 자신의 가슴 어름을 만졌다.
‘이런 몸뚱이를 누가 좋아할까?’
장덕칠의 공격에 입은 부상은, 여인에게는 치명적일 정도의 상처와 흉터를 남겼다.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그간 조금씩 커오던 정호기에 대한 마음을 접고, 그에게 백수련을 찾아가라 말한 것도 그 흉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호기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지웠다 생각했는데, 당혜미의 등장에 긴장하는 자신을 보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마음대로 지울 수 있었다면 백 소저가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겠지.’
몸이 멀쩡하다고 해도 정호기와 인연을 이어 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자신이 일월문주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지만 그것은 절대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아…….”
달빛에 그녀의 한숨이 녹아들었다.
***
“누굴 잡자고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가정호가 한 말이 논란이 되었다.
“귀접입니다.”
“귀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사준우의 말에 가정호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어렵게 알아본 바로는 그 귀접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정호기가 영초린을 바라보았다.
-전 아닙니다.
이미 영초린과 나상진, 정호기는 서로의 감추어진 부분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정호기가 밝힌 것은 거짓이었지만.
-그럼 뭐야? 어떤 놈이 귀접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말이냐?
-그런 것 같군요.
둘이 전음을 주고받을 때, 사준우와 가정호는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사준우는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놈은 한 놈이니 그놈을 잡으면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실패한다면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귀접이 사라진 지 벌써 이십 년이니 분명 지금 활동하는 이는 그의 후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일 가능성도 배제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둘을 잡으면 되겠군요.”
사준우는 간단하게 말하는 가정호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살수가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지 모르는 멍청한 놈!’
언제 어디서 비수가 날아올지 모르고, 음식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숨을 쉴 때도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 살수와 척을 지고 사는 인간이었다.
그중에서도 귀접은 거의 전설이라 불리는 인물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려 삼십여 년 동안!
“하지요.”
“예?”
솔직히 사준우는 정호기가 자신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찬성을 하자 황당한 얼굴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