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허… 윤회곡에 그런 규칙이 있었습니까?”
“네. 데릴사위가 아니라면 아예 혼인을 할 생각도 못하죠.”
치근덕거리는 가정호를 향해 냉정한 표정으로 유옥접이 선을 그어 버렸다.
“화심 유옥접이라…….”
“누가 화심이라는 거예요!”
“예? 아니, 그냥 그런 소문이 돌기에…….”
쏘아붙이는 유옥접에게 낭패한 표정으로 변명하는 가정호를 보면서 사준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저러니 아직 혼담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
사준우에게는 벌써부터 여인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겼기에 모두 거절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파도는 더 큰 파도에 사라지기 마련이니, 지금의 별호는 앞으로 유 소저의 행보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질 것입니다.”
“고마워요.”
사준우의 말에 유옥접이 얼굴을 풀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도 그 말을 하려고 했단 말이다!’
정말이었다.
같은 말은 아니라고 해도 비슷한 말을 하려고 운을 뗀 것인데, 그저 화심이란 말이 먼저 나온 것뿐이었다.
‘제기랄! 저놈이 나를 밟고서 유 소저에게 환심을 사는구나.’
가정호는 자신의 실수를 빌미로 유옥접에게 알랑거리는 사준우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남이 실수를 하면 보듬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제 욕심만 차리다니. 그러면서 세인들에겐 정인군자인 척하겠지? 흥!’
가정호는 박구를 꼭 잡고 싶었다.
‘이제 세상에 내 이름을 알려야 할 때야. 기필코 잡고 만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정호기가 새삼 고마웠다.
‘정 소협이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잘 될 거야.’
어느새 이런 믿음을 가진 그였기에, 만일 박구를 잡기라도 한다면 그의 정호기를 향한 믿음은 철옹성이 될 것이었다.
***
“이곳입니다.”
정호기 등을 안내한 이는 사가장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무사였다.
“여기가 바로 사체가 발견된 곳이고, 지금 이 주변을 개방을 비롯해 우리 사가장의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감시한다고 알겠습니까? 이렇듯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데?”
정호기의 말마따나 산의 초입이었기에 행락객들이 분주히 오가는 곳이었다.
“자, 가 소협, 이제 말씀을 해 주시지요.”
-안 됩니다. 이번 일은 우리 영웅회가 처음으로 하는 사건이니만큼 우리의 힘으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지금 사 소협에게 말씀을 했다가는 사가장의 공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정호기의 전음을 듣지 않았더라도 가정호는 말할 마음이 없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지적해 주는 정호기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잠시 저쪽으로 가시지요.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 흉수가 어디 겁나서 오기라도 하겠습니까?”
행락객들을 노린 노점이 주변에 가득했기에 가정호가 일행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저놈이 벌써 와 있구나.’
정호기는 이미 박구를 발견했는데, 뻔뻔하게도 민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힐끔힐끔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역질나는 놈.’
박구가 왜 또다시 이 자리를 찾는지 알기 때문에 정호기로서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헤헤헤, 제가 왜 다시 가는지 말입니까? 그때를 회상하기 위해서입죠.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날의 희열이 다시 떠오르거든요.]
‘응?’
문득 박구가 하던 말을 떠올리다, 장님에 고막까지 나간 채 히죽거리면서 걸어가던 놈이 생각났다.
‘그놈도 같은 놈이었군. 뭐가 그리 좋아서 히죽거리나 했더니만.’
사소한 것이지만, 의문으로 남았던 것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자, 요기라도 하시지요. 제가 살 터이니.”
안내한 무사를 돌려보낸 사준우가 가정호의 옆에 앉으며 전음을 보냈다.
-놈의 특징을 알아야 잡지 않겠습니까? 이러는 시간에 놈이 왔다 가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입니다.
사준우의 전음을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정 소협.
-네.
-이러는 동안에 놈이 왔다 가면 어떻게 합니까? 사 소협께 말을 해서 일단 놈을 잡은 연후에 공을 논하는 것은 어떨까요?
-놈의 특징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곱사등이라고 하셨지요.
-놈이 반드시 이곳에 나타날 것이란 것도 말씀을 드렸지요?
-네.
-그럼 놈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까요?
-아무도 놈의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역시나 변장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곱사등이가 변장을 하려면 무엇이 가장 어울리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저곳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곱사등이가 변장을 해 봤자 꼬부랑 할아버지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려면…….
말을 하던 가정호의 몸이 굳었다.
“자, 여기 소면 나왔습니다.”
늙수레한 음성과 함께 허리가 굽은 노인이 소면을 정호기 일행 앞에 내놓았다.
“헤헤헤, 제가 직접 오랜 시간 치댄 것이니, 면이 쫄깃쫄깃할 겁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사준우와 유옥접이 젓가락을 들고 소면을 먹으려는 찰나, 정호기와 가정호가 두 사람을 말렸다.
“왜 그러세요?”
유옥접이 젓가락을 든 손을 잡은 정호기에게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가정호의 입에서 나왔다.
“피로 물든 손으로 치댄 면입니다.”
가정호의 말을 들은 노인이 흠칫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을 비비며 물었다.
“협객님, 무슨 말씀이신지?”
“박구!”
가정호의 말에 노인, 박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여겼기에.
“예? 제 성은 권가입니다만.”
-박구는 제 몸에 자기가 죽인 여자들의 숫자만큼 똑같은 나비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것도 외조부님이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순간 박구의 부인에 망설이던 가정호가 다시금 자신감을 찾았다.
“네놈이 박구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웃통을 벗어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구나.”
과연 그 말에 박구의 몸이 굳으며 눈이 사방을 훑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무슨 뚱딴지같은 행동인지 몰랐던 사준우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박구의 뒤로 몸을 날렸다.
“내가 이곳에 왜 앉았겠느냐? 바로 박구 네놈을 잡기 위함이니라.”
가정호가 근엄하게 말했다.
“저… 소인은 당최 무슨 말씀을…….”
다시 박구가 부인을 하려고 할 때, 나상진이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쉬쉬쉭!
그의 검이 허공을 휘저었고, 박구의 웃옷이 순식간에 난자되며 그의 알몸이 드러났다.
“이래도 부인할 테냐!”
선명히 새겨져 있는 나비 문양.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여인들의 사체에 남겨진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가정호의 기세는 역적을 눈앞에 둔 대장군의 그것과 같았고, 박구의 주변을 정호기 등이 완전히 에워쌌기에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가 소협, 지금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으니 영웅회를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영웅회의 회주로서 나, 가정호가 너를 체포하겠다! 순순히 붙잡힌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러나 박구는 순순히 잡힐 생각이 없었다.
지금 산다고 해도 잡혀가면 어떤 꼴을 당할 것인지 능히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옥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언제나 여인들을 만만하게 봤던 그였고, 여인은 그에게 있어 유희의 대상이었으니까.
“흥!”
코웃음을 친 유옥접이 륜을 상하로 움직여 날아오는 독침을 쳐 내고, 우아하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떨어지며 박구의 불룩 솟은 등을 발로 후려쳤다.
“컥!”
“감히 나 옥봉 유옥접을 뭐로 보고!”
유옥접은 유옥접대로 실리를 챙기고 있었는데, 스스로 지은 옥봉이라는 별호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일이었다.
화심이라는 수치스러운 별호를 없애기 위해!
바닥에 나뒹군 박구의 등을 밟은 유옥접이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옥봉 유옥접? 이봐 자네, 들은 적 있나?”
“아니. 그나저나 저놈이 바로 박구란 말인가? 화류공자라고 하던데…….”
“영웅회는 뭔가?”
“나도 처음 듣네. 가만, 가정호라고 하면 저 구룡장의 가 소협이 아니던가?”
“구룡장의 소장주?”
“응.”
***
“수고하셨습니다. 놈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백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에 있는 흉터와 그가 잡힌 직후에 스스로 박구라 인정한 것이 있기에 관에서 우리에게 포상을 한다고 합니다.”
사준우의 말을 들으며 가정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꿈만 같았다.
마적의 소굴을 토벌하고, 중원에 악명 높은 박구를 잡다니.
이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하던 일인 것이다.
거기다 그 모든 일의 앞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으니, 지금의 그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놈이 어디다 독을 숨기고 있었을까요?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하게 수색을 했을 것인데…….”
가정호의 의문에 정호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숨기고자 하면 어딘들 못 숨기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기왕 영웅회의 이름이 알려진 김에 악인을 찾아 그들을 응징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찬성입니다!”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제일 먼저 찬성의 뜻을 표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부회주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준우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행보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직위도 잃을 것이고, 혹시라도 자신이 박구를 잡는 일에 참여한 것도 잊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유옥접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스로 옥봉이란 별호를 지었으니, 이제 그것을 중원 곳곳에 알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자, 그럼 영웅회의 첫 사건을 해결한 기념으로 제가 술을 사겠습니다.”
이날, 정식으로 영웅회의 발족이 이루어졌다.
‘흐흐흐! 그래, 이제 시작이지.’
처음부터 흑룡문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
열에 하나둘이면 족하니까.
‘어쩌다 걸린 것처럼.’
정호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영웅회가 발족한 뒤, 사가장과 구룡장이 반씩 투자를 하여 동양현과 산양현의 중간에 있는 연천현에 버려진 장원을 구입하고 수리를 한 연후에 그곳에 영웅회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정호기 등은 지금 그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