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구룡장? 여긴 왜 온 것인가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구룡장의 현판을 보면서 유옥접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정호기 등은 이미 정문으로 다가간 상태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순양현 정가장의 정호기라고 합니다. 무림 동도들이 과분하게도 열호아라 부르고 있지요.”
“아, 사가장의 무림대회에서 우승하신 열호아 정 소협이십니까?”
“예. 마침 이곳을 지나다 구룡장주님께 인사라도 드릴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시면 안에 기별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정호기 등을 정문 옆에 마련된 접객실로 안내한 위사가 사라진 지 일 각이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전 구룡장의 총관인 우희상이라고 합니다.”
우희상은 사가장의 무림대회에 참석을 했었고, 당시 정호기와 유옥접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나온 것이었다.
“정호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의제들인 영초린, 나상진입니다.”
“유옥접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장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확인을 해야 했지만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정호기 등을 맞은 구룡장주는 인상이 후덕한 중년인이었는데, 그의 뒤에 서 있는 청년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놈이 가정호입니다. 아마도 사가장의 무림대회에 참석한 대형을 좋게 보지 않는 모양입니다.
같은 종남의 갈래이면서도 이인자의 위치에 있는 구룡장이었기에 일종의 자격지심이란 것이 있었고, 가정호는 그것이 특히 심한 인물이었다.
다과가 나오고 한동안 덕담이 계속 되다 가정호가 뜬금없이 무공을 배우는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기에 정호기가 이때다 하며 대답했다.
“악인을 무찌르는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가정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서 길을 떠나셨단 말입니까?”
“예, 무공을 배운 이상 세상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신 것은 누구, 노리는 사람이라도 있어서입니까?”
“박구의 종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하더군요.”
“박구? 화류공자 박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화류공자 박구는 아녀자들을 겁간하여 이미 섬서에서는 벌써 수배가 내려진 인물이었는데, 오 년 전부터 보이지 않더니 호남 어디에서 종적을 드러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놈이 다시 섬서로 들어왔단 말입니까?”
“개방에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거기다 이곳 동양현 부근에서 그놈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죽일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구룡장주인 가분심이 분노할 때, 가정호가 냉소를 날렸다.
“우스운가 보지요. 사가장이 있는 산양현에는 갈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니까.”
가정호의 빈정거림에 가분심의 눈에 노기가 깃들었다.
그때 정호기의 말이 이어졌고, 두 사람의 눈이 자연스레 그를 향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저희가 이곳 지리에 어두우니 믿을 수 있는 분이 함께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될 수 있으면 가 소협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정호기의 말에 가정호가 또다시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했다.
“사가장 무림대회에서 우승하신 정 소협의 길 안내를 맡으라는 겁니까?”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런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제가 드린 말씀을 오해하셨나 본데, 저는 가 소협이 우리를 이끌어 주셨으면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박구를 죽이게 된다면 가 소협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릴 것입니다.”
수고는 함께하되 공은 양보한다는 소리였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한 번쯤 사양이라도 하련만, 가정호는 정호기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응했다.
“좋습니다! 대신 그 말씀은 확실하게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보던 유옥접이 정호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말이에요? 왜 우리가 저런 놈의 뒤를 따라야 하지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유 소저는 그냥 넘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유 소저의 이름도 함께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 소협, 그리되면 너무 불공정한 것이 아닌지…….”
가분심이 뭔가 탐탁지 않다는 투로 말을 했다.
“솔직히 놈을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 알 뿐이니까요. 그런 일에 가 소협께서 나서는 것인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오늘 저희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알겠소.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그놈을 쫓는 데 드는 경비 일체를 부담하리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이것만은 거절치 말아 주시구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정호기는 속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박구인지 방구인지는 중요치 않아. 우리가 노리는 놈은 따로 있으니까.’
화류공자 박구를 잡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정파가 모두 나서서 그를 쫓아도 잡는 것에 실패할 정도로 변장술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니까.
* * *
“개방에서 말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가정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이십여 호의 집이 모여 있는 산골 촌락이었다.
“이런 마을에 그놈이 노릴 만한 여인이 있었을까요?”
나상진이 의문을 표한 것처럼 박구는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만 노렸었다.
“어느 곳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개방에서 허튼소리를 할 리 없으니, 일단 가서 조사를 하도록 하지요.”
가정호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정호기 등이 따랐다.
-대형, 저놈은 구룡장을 나선 후부터 한 번도 앞을 떠나지 않는군요.
심지어 나란히 간 적도 없었다.
-어지간히 나서기 좋아하는 놈인 모양이다.
-제 명에 죽기는 힘들 놈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와 같이 있을 때 죽으면 곤란하니, 죽지 않도록 보살펴 줘라.
-예.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유옥접의 요상한 눈길을 받은 영초린이 물었다.
“정말 스물여덟이세요?”
“네.”
“아무리 봐도 스물두셋으로 보이는데…….”
“감사합니다.”
“비결이 뭐예요?”
“잘 먹고 잘 싸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없고요?”
“없습니다. 이런, 벌써 이렇게 뒤처졌군요. 어서 가시지요.”
걸음을 재촉하는 영초린의 뒤에서 유옥접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나이로는 안 보이는데…….’
* * *
“별 성과가 없군요.”
마을을 돌면서 겁간이 일어난 사건을 조사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나같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부인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방의 보고서에 보면 처자의 어깨를 나비 모양으로 지졌다고 하니 박구 그놈일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그놈을 따라 한 놈일 수도 있지만, 개방에서 그놈을 지목한 것에는 그것이 놈이 직접 그린 것과 같아서이지 않겠습니까?”
박구의 특징은 겁간한 여인들의 어깨에 일종의 낙인처럼 불로 달군 단검으로 나비를 그린다는 것에 있었다.
“놈은 자신이 겁간한 여인을 다시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니,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제 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를 찾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얼굴도, 특징도 모르는 사람을 어찌 찾는단 말씀입니까?”
가정호의 말에 정호기가 전음을 날렸다.
-놈의 특징을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음을 들은 가정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이것은 개방에서도 모르는 것인데, 저는 오래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조사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꿀꺽.
침을 삼킨 가정호가 귀를 기울였지만, 전음은 오지 않았다.
-정 소협.
“예?”
-그 특징이 뭡니까?
“아,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음식 좀 드시지요.”
오늘도 정호기 일행의 탁자는 푸짐한 음식들로 넘쳐 났다.
“하하하하. 자, 한잔 드시지요.”
밥을 먹고 술을 마신 지 벌써 두 시진.
끊임없이 먹어 대는 정호기와 영초린, 나상진에게 질린 가정호였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는데, 아직 박구의 특징에 대해서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 소협, 이제 그만 그놈의 특징을 가르쳐 주시지요.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설마 제가 가 소협이 그것을 듣자마자 장에 연락해 놈을 잡은 후, 우리를 따돌릴 것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가정호는 내심 뜨끔했는데,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놈이 나를 놀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에야 모든 공을 자신에게 준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박구를 실제로 잡게 되면 어떤 마음을 먹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특징만 알면 정호기 등을 배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놈이 아무리 변장을 해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말을 하려는 찰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있는 객점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응? 무슨 일이지?”
그때, 뒷간에 다녀온다면서 나갔던 영초린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대형,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객점이 포위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반갑게 맞아 주던 주인도, 새치름한 표정으로 음식을 내오던 소녀도 보이지 않았다.
쾅!
객점의 문이 부서지면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응?”
들어온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무기가 들려 있었는데, 누가 봐도 명백하게 정호기 등을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객점에는 손님이라고는 그들이 전부였으니까.
“내놓아라!”
다짜고짜 들이닥쳐 뭘 내놓으란 것인지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