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48화 (49/137)
  • 48화

    “오랜만이구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잘 지내고 있다. 너도 잘 지내는 모양이더구나.”

    정호기를 맞은 백영호의 태도는 무감정했다.

    “자, 인사도 나눴으니 이만 돌아가 주겠느냐? 요즘 일이 좀 바쁘구나.”

    분명 정운룡도 이 같은 축객령을 당했으리라.

    “련 매를 보고…….”

    “됐다. 너나 그 아이를 위해서도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이만 떠나도록 하거라.”

    “하지만…….”

    “됐다 하지 않느냐!”

    결국 백영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어서 떠나거라!”

    백영호가 다시 축객령을 내릴 때,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호기가 왔다고!”

    백영호의 아내인 채진진이었는데, 해쓱한 얼굴이 마치 병자의 그것과 같았다.

    “백모님…….”

    “아이고, 호기야! 잘 왔다, 잘 왔어!”

    정호기는 다짜고짜 자신을 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채진진의 모습에서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 떨어지지 못하겠소!”

    “못해요! 아니, 안 해요! 어떻게 호기를 이대로 보낼 수 있단 말이에요!”

    “어허!”

    백영호가 호통을 쳤지만 채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기야, 우리 수련이 좀 살려다오! 제발 수련이를 살려 줘……!”

    “부인!”

    한동안 채진진의 울음소리와 애원, 그리고 백영호의 호통 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 * *

    ‘이렇게 변했던가?’

    침상에 누워 있는 백수련은 목내이라 여겨도 될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고, 정호기가 들어왔음에도 눈조차 뜨지 못했다.

    “수련아, 호기가 왔단다. 눈을 떠 보렴, 응? 수련아…….”

    채진진이 잡고 있는 백수련의 손은 바싹 마른 나뭇가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후우…….”

    문밖에서 들리는 백영호의 한숨 소리가 정호기의 어깨를 짓눌렀다.

    ‘답답하다.’

    사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백수련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혈신이었다면 백수련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열호아였다.

    ‘아버지를 위해서다. 이별은 몸이 다 낫고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말을 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그는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잠시 둘이 있고 싶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채진진이 망설이다 방을 나섰다.

    “나야.”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정호기가 백수련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른 몸 어디에 물이 있었는지, 백수련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보같이 이게 무슨 꼴이야? 그 괄괄하던 백수련은 어디 가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을 맞춘 정호기가 내력을 끌어 올렸다.

    “받아들여. 그리고 일어나는 거야. 알았지?”

    정호기의 손을 떠난 내력이 갈라진 백수련의 몸을 채우며 흘렀고, 이내 황폐했던 그녀의 몸에 시원한 빗줄기가 되어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는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악취가 풍겼지만 정호기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맡은 백수련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괜찮아. 서둘지 마.”

    한 번, 두 번, 세 번…….

    그날 정호기는 밤이 새도록 백수련의 곁에서 내력을 불어넣기를 반복했고, 아침이 되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생기가 느껴졌다.

    ‘이제 됐군.’

    어느 정도 백수련이 회복된 것 같자 일어나려던 정호기는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힘도 없을 것 같던 백수련의 손이 정호기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가… 지… 마…….”

    가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멍청한 놈! 계집 따위에 정신을 빼앗겨? 그러고도 네놈이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정략적인 혼례를 명하는 자신에게 반발하던 아들이 떠올랐다.

    ‘사랑?’

    금슬(琴瑟)이 좋은 정운룡과 백난영을 보고 자란 정호기였지만, 아직도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인 존재.

    어쩌면 이 말이 지금의 정호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

    “고맙다, 고마워.”

    방을 나선 정호기에게 연방 인사를 한 채진진이 서둘러 백수련에게 다가갔다.

    “술 한잔하겠느냐?”

    밤새 밖에서 기다리던 것은 백영호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그가 정호기에게 낮술을 권하고 있었다.

    “예.”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에게 잔을 권하며 말없이 술만 마셨다.

    “호기야.”

    “예.”

    “수련이에게 마음이 있느냐?”

    “…….”

    “그래, 그렇겠지.”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을 대답으로 들었는지 스스로에게 답을 한 백영호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수련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단다. 네게 차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억지로 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이란 것이니, 네게 부탁하마. 수련이의 몸이 낫거든, 부디 좋은 끝맺음을 해 주면 좋겠다.”

    “…….”

    이 말에도 정호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직하구나.’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가슴 어림에서 한 번 걸리더니 한 참을 있다가 내려갔다.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호기의 내심에는 뭔가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대응방을 포기하신다면 수련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고, 말을 꺼낸 정호기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뭐?”

    “수련이와 함께 장에서 기거하신다면 수련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왕 나온 말이었다.

    “사실 전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고, 지금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선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고, 자칫 가족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수련이를 받아들이면 백부님과 백모님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제 능력으로는 부족합니다. 대응방을 포기하시고 장에 기거하신다면 그러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 말이 진심이냐?”

    “예.”

    한동안 정호기를 바라보던 백영호가 다시 말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따를 리가 없겠지. 한마디로 가신이 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인데.’

    낮에 시작된 술자리가 저녁까지 이어졌고, 슬슬 정호기도 피로를 느끼려는 그때 백영호가 입을 열었다.

    “좋다.”

    “예?”

    “좋단 말이다. 네가 수련이를 받아 준다면 대응방을 정리하고 정가장으로 가겠다.”

    “백부님, 술이 과하신…….”

    “어차피 수련이를 잃고 나면 대가 끊길 대응방이다. 그런데 무엇이 아까워 잡고 있겠느냐? 네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리하겠다.”

    정호기의 말을 끊고 백영호가 말을 이어갔다.

    “자식이 말라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못한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네 말대로 할 터이니, 수련이를 부탁한다.”

    말을 마치고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침상에 누운 정호기는 피곤이 몰려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길을 온 것 같았다.

    ‘모르겠구나. 하지만 어차피 뱉은 말이다. 거기다 부모님께서도 간절히 바라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하기로 하자.’

    ***

    “기다릴게.”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정문까지 나온 백수련이 정호기의 손을 꼭 붙잡고 말을 하고 있었다.

    “오래 걸릴지도 몰라.”

    “기다릴게.”

    백수련은 마치 기다리는 것만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또 말했다.

    “형수님, 그만 들어가세요. 이러다 탈이라도 나시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나상진이 선수를 치고 영초린이 어서 들어가라며 거들었으나, 백수련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직도 서 계시네.”

    영초린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정호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근처에 적당한 놈이 있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영초린은 바로 대답했다.

    “열락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미약으로 처자들을 후리는 놈들이 운영하는 기루라고 보시면 됩니다.”

    “좋아, 거기로 가자.”

    정호기 일행이 열락정에 도착한 후 복면을 쓰고 들어간 지 일각 만에 그곳의 현판은 깨지고 건물은 주저앉았으며, 팔다리가 부러져 곡소리를 내는 장정들이 이십여 명에 달했다.

    “조금 후련하군.”

    객점에 모여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정호기의 얼굴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마음껏 먹어 보죠.”

    가슴을 두드리는 나상진의 얼굴도 밝았는데, 그의 품에는 열락정에서 가져온 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할 건가요?”

    유옥접이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싫으시면 가셔도 됩니다. 단, 비밀은 지켜 주시고요.”

    “딱히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열락정에서 가장 날뛴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우리는 의적인 겁니다. 악을 벌하고 의를 행하는 의적이요. 유 소저는 죄책감 느낄 필요 없습니다.”

    영초린의 말에 유옥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젠가는 손봐주려고 마음먹은 놈들이었지만, 이렇게 정리하게 될 줄은 몰랐네.’

    유옥접으로서도 딱히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기루와 기방을 중심으로 뭉친 일월문이었기에 열락정과 같은 곳은 눈엣가시였으니까.

    “자, 식기 전에 드시죠. 그리고 별채를 빌렸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상진은 예전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말투도 훨씬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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